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77)
97. 용행호보 (8)
용왕신은 따스하고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무녀들이 부른 이무기의 힘에 겁에 질렸던 게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용왕신이시여……!’
홍의 무녀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용왕신과 용족들에게 사죄도 못했는데 울 수 없었다.
홍의 무녀가 용왕신의 온기 속에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다가오는 무언가로부터 용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홍의 무녀는 입을 틀어막고 몸을 숨겼다.
‘어째서 여기에?’
갑자기 나타난 무언가의 정체는 유황의 무녀였다.
유황의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옷에 가려지지 않아 공기 중에 드러난 유황의 피부는 보기 흉한 상태였다.
돋은 비늘을 억지로 뜯어낸 것처럼 살점이 떨어져 나간 자국이 보였고, 지혈을 못 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괴물이 비늘을 통해 힘을 흡수하자 유황은 비늘이 돋은 생살을 잘라 내 버티고, 이 자리까지 도망 온 것이다.
‘용왕신께서 저렇게 만든 것 같지는 않아. 설마 이무기가…… 어?’
숨죽이고 유황을 관찰하던 홍의 무녀는 유황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황이 힘껏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보이는 건 일부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홍의 무녀는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유황은 황룡의 뼈로 만든 용새(龍璽)를 들고 있었다.
황룡궁이 침식당했을 때, 황룡이 약해진 틈을 노려 유황이 용새를 빼돌린 듯했다.
‘황룡 님의 용새로 무엇을 하려고!’
용족에게는 용새가 두 개 있었다.
청룡과 황룡의 뼈로 만든 용새는 용족을 지키는 결계의 열쇠이기도 했다.
이번에 용궁의 결계를 뒤흔든 건 무녀들이 용궁 내에서 의식을 한 결과다.
하지만 용새가 밖으로 빠져나가면 내부에 배신자가 없어도 다시 용궁의 결계가 뒤흔들릴지도 모른다.
홍의 무녀가 용새에 관해 아는 것은 결계와의 관계성뿐이었지만, 그 외에도 더 큰 비밀이 있을지도 몰랐다.
‘막아야 해.’
홍의 무녀는 평소 유약한 모습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용기를 냈다.
용왕신이 강림하자 없던 용기가 나는 것 같았다.
무녀들이 몇 년간 죽여 온 홍의 마음이 되살아나려 하고 있었다.
홍의 무녀는 어설프게 미행을 시작했다.
유황은 이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초조해하며 어디론가 향했다.
‘위로 향하고 있어. 위쪽에는 용왕신이 계실 텐데 왜…….’
유황은 홍의 무녀보다 체력과 이능파 소모를 심하게 했는데도 길을 찾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유도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지하를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유황이 문을 열자 황운호가 보였다.
그러자 나비 하나가 유황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이 팔랑거리며 날아왔다.
나비를 본 홍의 무녀는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겁에 질렸다.
‘그때 그 나비야!’
홍의 무녀는 재작년,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염준열이 학생회의 일원으로서 실기 시험을 서포트하게 되었을 때였다.
홍의 무녀는 유황과 다른 무녀들이 나비를 상대로 대화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
나비는 입학시험 때 학교에서 일이 벌어질 예정이므로 염준열과 용제건이 개입하지 못하게 막으라고 전했다.
하지만 나비가 사라진 후, 유황이 이렇게 말했다.
―그분들은 준열이가 지금 죽으면 곤란해하시는 것 같던데, 빨리 보내는 게 슬픔을 덜어 줄 길이 아닐까?
―여의보주는 개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되, 준열이는 이번에 같이 보내 주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홍의 무녀는 무녀들이 염준열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무녀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선 용족이 하루라도 빨리 힘을 잃어야 했다.
그들은 흑막의 계획보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걸 우선시했기에 얼른 저들을 처리하고 싶어 했다.
흑막의 뜻을 따른다면, 무녀들은 염준열과 용제건에게 ‘비가 올 것이다’라는 거짓 정보를 전해 그들이 실기 시험장에 가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흑막의 말을 따르지 않을 듯했다.
―준열이에게는 맑을 거라고 전하는 게 좋겠구나. 활발한 아이니, 홍룡을 타고 여기저기 돌다가 그 시험장을 발견할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날씨를 엇갈려 전했다는 게 드러나지 않도록 홍이에게 시키죠. 홍이는 미숙한 아이니 날씨를 잘못 읽을까 두려워하는 시늉을 내면 비밀을 지켜 줄 겁니다.
홍의 무녀는 무녀들이 자리를 비운 후에도 꼼짝하지 못했다.
그들이 불로장생을 위해서 용족을 죽일 각오가 있다는 건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홍의 무녀는 그 끔찍한 계획을 알고도 이를 용족에게 알리지 못했다.
‘불로장생을 하겠다고 무녀들이 여러분들을 해치려 해요.’라고 증거도 없이 홍이 말한다면 어느 용이 믿겠는가?
근거라고는 방금 홍의 무녀가 들은 날씨 운운하는 대화뿐이었다.
오랜 기간 용족들과 함께하며 신뢰를 쌓은 유황과 무녀들, 신참인 홍의 무녀 중 용족이 어느 쪽을 믿을지는 뻔했다.
―홍이야, 여의보주에게는 비가 올 거라고 전하고, 준열이에게는 날씨가 맑을 거라고 전해 다오.
실기 시험이 다음 날로 다가와 유황이 지시를 내렸다.
이상한 지시였지만, 뒤에 감춰진 이야기를 몰랐다면 홍의 무녀는 두말없이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저 말이 염준열을 위험으로 몰 걸 뻔히 아는데 할 수 없었다.
홍의 무녀는 무녀들의 배신을 밝혀낼 기지도, 용기도 없었지만 염준열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염준열과 단둘이 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내일은 비가 올 것 같아요.
물론, 비는 내리지 않았다.
염준열은 홍의 무녀가 그저 날씨를 잘못 읽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녀의 실수를 감춰 주었다.
무녀들은 염준열이 맑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도 학교 사정상 실내 안내역을 맡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염준열 외에는 홍의 무녀가 ‘비가 올 것이다’라고 전한 걸 알지 못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었을 때, 홍의 무녀는 또 나비를 보았다.
이번에는 실기 시험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크고 두려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을 것 같아요.
홍의 무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지혜와 용기를 짜내 그렇게 말했다.
용제건과 염준열을 은광고에 가지 않게 막으면 안전할 거라는 생각에 한 거짓말이었다.
―눈이 올 것 같아요. 부디 두 분이 팀 빌딩에 머무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용제건은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웃기만 하고 가 버렸다.
홍의 무녀가 잡을 틈도 주지 않았기에 말릴 여지가 없었다.
홍의 무녀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용왕신이시여, 부디 둘을 지켜 주세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졌을 때에는 용족의 영역과 용궁은 이무기의 비늘이 잔뜩 뿌려져 용왕신이 다가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홍의 무녀가 올리는 기도가 용왕신에게 닿을 리가 없었다.
홍의 무녀는 무녀들이 삿된 눈을 뿌리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힘이 부족해 눈을 뿌리는 방법을 익히지 못하는 척하다가 유황의 지시로 제 뺨을 때려야 했고, 끝내 은광고에 삿된 눈이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유황은 검은 눈을 뒤집어쓰며 쓰러지고, 은광고로 향한 용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이다.
‘아니야, 무사하지 않았어. 다들 크게 다치고, 지쳐서 돌아왔어.’
홍의 무녀는 용제건의 옷에 남았던 핏자국을 떠올리며 공포와 분노로 벌벌 떨었다.
그동안 겪은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기 직전엔 항상 유황의 곁에 나비가 있었고, 그 나비가 지금 용궁에 있었다.
“용새와 내가 용족에 관해 아는 정보 그리고 나의 협력을 대가로 거래를 하고 싶다. 용궁에서의 탈출과 영원한 삶을 다오!”
유황이 핏발 선 눈으로 나비를 향해 외쳤다.
나비가 유황의 말에 답했다.
[대가의 균형이 맞지 않는군요.]
“그렇다 한들 탈출과 불로장생 외에는 더 많은 걸 요구할 생각은 없단다.”
유황은 피가 말라붙어 새카맣게 굳은 입가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도망자답지 않은 오만한 태도였다.
유황은 용새, 자신이 가진 정보, 자신의 협력이 몹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나비의 목소리가 몹시 달콤하고 겸손하게 들렸기에 한 생각이었다.
[착각하고 있군요. 당신의 정보와 협력에는 가치가 전혀 없답니다. 당신은 용왕신의 힘을 잃고, 공을 들여 만든 이무기신마저 잃었으니까요.]
나비는 방금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달콤한 목소리로 몹시 냉정하게 말했다.
[애초에 그분께서 당신을 택한 건, 당신의 다음을 이을 무녀가 지나치게 우수하기 때문이랍니다. 당신은 그분께서 오래 준비한 수를 망쳐 버릴 정도로 무능하지요.]
“뭐라고! 감히 나에게 무슨 말을……!”
나비는 유황을 책했지만, 아주 희미한 기쁨이 느껴졌다.
나비는 그분의 수가 망쳐진 게 기쁘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나비가 날개를 팔랑이는 횟수가 늘어나고, 허공에 뿌리는 비늘 가루가 늘어났다.
[당신과 달리 당신이 가진 용새는 큰 가치가 있지요. 하지만 거래를 할 필요는 없답니다.]
“너희는 용새를 탐내지 않았더냐. 이제 와서 포기할 생각이냐? 우선 나를 탈출시켜서…….”
[용새는 가져갈 생각이에요.]
나비가 쿡쿡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유황은 나비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뒤늦게 이해했다.
나비는 이용 가치가 사라진 유황을 버리고, 용새를 빼앗아 갈 생각인 것이다.
유황이 기겁해 용새를 품에 깊숙이 안았지만, 나비가 뿌리는 비늘 가루가 그녀를 덮칠 듯 밀려왔다.
비늘 가루가 용새에 닿았을 때였다.
휘이이이!
그러나 비늘 가루가 용새를 완전히 삼키기 전, 홍색의 구름이 나비를 밀어냈다.
흐릿한 구름이지만, 용궁에 강림한 용왕신의 신령한 기운을 받아 오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홍의 무녀가 다루는 채운이었다.
‘어째서 홍이의 구름은 그대로지?’
유황은 아주 잠시 의문을 품었다.
용왕신의 무녀들이 다루는 권능은 회수되었을 터인데, 홍이는 구름을 불러냈다.
용왕신은 괴물에게 힘을 실으려 한 구름의 권능을 회수했으니, 그 자리에 없던 홍이의 권능은 그대로 남았던 것이다.
그 생각에 미친 유황은 자신이 홍의 무녀를 벌했던 것을 잊고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홍이야, 잘했다! 저 나비를 이용해 밖으로 나가자꾸나.”
유황은 어떻게 하면 홍의 무녀가 지닌 권능을 빼앗을 수 있을지 생각하며 다정하게 말했다.
홍의 무녀는 유황을 보고 여러 감정이 치밀어 올라 입을 벙긋거리다가 구름을 움직였다.
홍색의 채운은 용새를 꽉 쥐고 있는 유황을 구속했다.
스스스!
“……싫어요.”
유황이 눈을 부릅뜨고 일갈하려 했지만, 구름이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유황은 하찮게 여기던 홍이의 구름을 떨쳐 내지 못해 굴욕에 부들부들 떨었다.
홍의 무녀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당신의 말을 듣기 싫어요!”
파아아아앗!
홍의 무녀가 목이 아플 정도로 소리쳤을 때, 갑자기 목이 따뜻해졌다.
따뜻한 공기가 밀려 들어와 상처가 남은 목을 치료해 주는 것 같았다.
동시에 무릎과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홍의 무녀가 고개를 돌리자 오색의 구름이 보였다.
구름 너머로 용왕신과 용족들 그리고 용궁의 손님들이 서 있었다.
* * *
모든 사람이 상황을 타파하고 나아갈 힘을 가진 건 아니다.
권레나처럼 감당하기 힘든 불행 앞에서 소극적인 저항밖에 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계’ 새끼처럼 한계까지 몰아가지 않으면 개심하지 않는 놈도 있다.
홍의 무녀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렇기에 예전에 염준열과 용제건에게 거짓 날씨를 고했던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에 홍의 무녀가 결국 무녀들 쪽으로 기울 가능성도 생각했는데.’
그럴 가능성은 없어졌다.
홍의 무녀의 얼굴에는 비늘 하나 없었고, 여전히 용왕신이 내린 권능을 다루고 있었다.
용왕신을 보고 저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의심이 날아갔다.
‘배신자가 아닐 가능성은 예상했지만, 유황이 황운호에 있는 나비령의 권속과 접촉하는 걸 방해할 만큼 용기를 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
황운호에 있는 나비의 존재를 두고 유황이 마지막 발악을 할 때 접선할 것까지는 예상하고 황룡에게 대비할 것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홍의 무녀가 이를 방해하리라는 건 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쿠구구구!
“용궁을 이용해 나비 채집을 한 건 처음이다.”
황룡이 구름으로 용궁을 움직여 나비령의 권속으로 추측되는 나비를 격리하고, 운룡을 부려 용새를 회수했다.
기운을 차린 운룡은 씩씩거리며 유황으로부터 용새를 회수했다.
유황은 버둥거리며 운룡을 쳐 내려 했지만, 홍색의 채운과 황룡의 구름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용왕신은 슬퍼하는 얼굴로 그 장면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용왕신이시여, 용궁의 청소가 끝났습니다.”
무녀들을 감시하기 위해 왔던 다섯 명의 용족들이 나타나 인사를 올리며 보고했다.
저 용족들은 괴물을 황룡과 청룡에게 맡기고, 남은 웅족의 권속을 소탕하러 다녔다고 한다.
용궁의 청소는 전부 끝났는데, 아직 보이지 않는 이가 있었다.
[용제건이 기다리고 있으니 마중 가 다오.]
용왕신이 멀리 서 있는 김신록을 향해 말했다.
적호는 ‘왜 손님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겁니까.’라고 따지고 싶어 하는 얼굴을 했으나, 용제건의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참은 것 같았다.
김신록은 적호만큼 거친 감상을 품은 것 같진 않지만 의문스러워했다.
용왕신이 다정히 설명했다.
[네가 그 자리에서 보고 있으라 하지 않았더냐. 그 말을 지켜서 용제건이 기다리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