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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78화 (778/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78)

97. 용행호보 (9)

김신록은 황룡궁과 백룡궁 사이에 놓인 길을 따라 곧게 걸었다.

황룡의 배려로 구조가 정비된 덕에 길을 헤맬 필요가 없었다.

얼마 걷지 않아 본래의 색을 완전히 되찾아 순백색으로 빛나는 백룡궁이 보였다.

‘정말 그 용이 아직도 저기에 있나?’

김신록이 용제건더러 그 자리에서 보고 있으라 하긴 했지만, 볼 걸 다 보고도 그 자리에서 기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중간에 무녀의 힘이 끊겨 그 자리를 비추던 수경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용제건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직접 보는 편이 재밌겠다며 당장 날아오는 게 정상이었다.

김신록은 정말 백룡궁에서 용제건이 기다리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지만, 용왕신이나 황룡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도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용궁의 위협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미련이 없어졌다고 승천하지는 않을까?’

황룡의 말을 듣고 용제건이 승천하려는 이유가 어쩌면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용제건이 승천하려는 이유가 온전히 자신 때문일까?

어쩌면 유희계 용은 슬슬 현세가 질려서 용왕신의 곁으로 돌아갈 겸, 친우를 도울 겸 승천을 결심한 건지도 모른다.

용제건은 용왕신의 총아라고 불릴 만큼 총애를 받고 있고, 용왕신은 승천을 결심하게 할 만큼 위엄 있고 아름다운 상위 존재였다.

‘적룡, 백룡, 흑룡이 현세 대신 용왕신을 택한 이유가 납득이 갈 정도였다. 어쩌면 그 용도…….’

용왕신이 강림했는데 얼굴을 내밀지 않는 건 곧 승천하여 거리낌 없이 배알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굳이 용제건이 저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친우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한참 전에 자정이 지나 정월 초하루가 되어 용제건의 승천까지 남은 시간의 카운트는 0이 된 상태다.

김신록은 그 숫자가 떠오르자 길 위에서 우뚝 멈춰 섰다.

―김신록 선생님, 성국언 선배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 주세요.

김신록은 문득 용궁으로 가기 전, 안다인이 한 말을 떠올렸다.

―선생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감사를 자주 표현하지 못한 걸 몹시 후회했습니다. 선생님이 다른 선택을 하시도록 돕지 못한 것도요.

―용제건 선생님이 곧 승천한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선생님께서 저 같은 후회를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김신록은 자신의 마음은 무시해도 제자들의 말은 무시하지 못했다.

성국언이 한 말 중 ‘표현’과 ‘후회’라는 단어가 매우 따갑게 느껴져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김신록은 그 말의 무게를 느끼며 다시 앞으로 걸었다.

스르륵.

백룡궁의 정문 앞에 서자 김신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바로 열렸다.

문이 열리자 넓은 백룡궁의 로비가 보였다.

그리고 눈이 아플 정도로 하얀 공간 속에 용제건이 서 있었다.

‘문 바로 앞에 있었나?’

김신록은 잠깐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어쩌면 용제건이 황룡이 처음에 구성한 미궁에서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룡은 용제건이 원한다면 바로 합류할 수 있도록 정문 앞으로 위치를 조정해 둔 듯하다.

용제건은 정말 제 의지로 여기에 있던 셈이다.

눈가리개로 가려지지 않은 용제건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신록이 말대로 계속 여기에서 보고 있었어. 잘했지?”

뭘 잘했다고 웃고 있는 건지, 저렇게 묻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저 꼴을 보니 생각해 둔 말 대신 다른 게 나왔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면서도 보고만 있었다고?”

“응. 다들 잘 싸우는 것 같더라.”

“용왕신이 강림했는데도?”

“이번에 못 보면 꿈에서 만나면 돼.”

용제건은 밖에서 열심히 싸우고 수습한 이들이 들으면 분노하고, 용왕신이 들으면 서운해할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용제건이 나서지 않아도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계산하에 저리 행동한 거겠지만, 참 아니꼽게 느껴졌다.

그러나 거기에서 보고 있으라고 한 건 김신록이라 대놓고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김신록이 입을 다무니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신록아, 살고 싶어?”

용제건이 엉뚱한 소리로 침묵을 깼다.

저 말만 들으면 마치 김신록이 삶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았다.

김신록은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냐고 받아치려 했으나 용제건을 보고 말을 멈췄다.

용제건은 평소처럼 실없이 웃고 있었지만, 저 말은 초조하게 들렸다.

“딱히 죽고 싶지 않아.”

영문을 알 수 없으나 저 질문은 용제건에게 있어 몹시 중요한 것인 듯했다.

김신록은 솔직히 답하기로 했다.

“드디어 웅족과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었어. 이 힘을 이용해서 싸울 수 있는 한, 삶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러면 웅족이 다 죽을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겠네.”

용제건은 김신록의 대답을 만족스럽게 여긴 것 같지 않았지만, 기뻐 보였다.

김신록은 웅족과 싸울 수 있는 힘이 언급된 김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아 억지로 말을 쥐어짜 내야 했다.

“누가 상위 존재로서 광림으로 힘을 주는 것보다, 옆에서 이능파 링크를 도와주면 더 잘 싸울 수 있을 거야.”

차마 주어를 대놓고 용제건으로 지목하지 못했다.

그래도 저 말을 하는 건 엄청나게 낯뜨거운 짓이었다.

마치 용제건이 승천하는 이유는 다 김신록 때문이고, 옆에 있는 게 도움이 더 되니 가지 말라고 붙잡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제호야.”

김신록은 갑자기 나온 이름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인식하고 있지 않았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가 내려간 듯했다.

용제건은 친우의 이름을 부른 후 조르듯이 말했다.

“나, 앞이 안 보여. 눈가리개 풀어 줘.”

저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란 말인가.

없는 용기를 쥐어짜 내어 한 소리에 제대로 된 답변은 안 하고 헛소리를 하니 김신록의 속이 터졌다.

“네 손으로 풀어.”

“앞이 안 보여서 못 풀겠어.”

김신록은 용제건을 한 대 쳐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앞이 보이든 말든 제 얼굴에 있는 눈가리개를 왜 못 푼다는 말인가?

용제건의 완력이나 공간술을 활용하면 1초도 안 걸려 눈가리개를 없앨 수 있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또 용제건은 신격이 오르는 바람에 눈가리개 따위가 있어도 앞이 훤히 보이지 않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김신록은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신격이 높아지면 시야가 넓어져. 지금 안 보인다는 건…….’

김신록은 용제건의 눈가리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찌나 꽉 묶었는지 쉽게 눈가리개를 풀 수 없었다.

김신록은 비도로 잘라 버릴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냥 용제건의 소유물이라면 모를까 황룡이 선물한 것을 자를 수 없었다.

손이 떨리는 바람에 눈가리개를 푸는 데에 시간이 오래 소요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눈가리개를 풀었으나 용제건은 눈을 감고 있었다.

김신록은 고문할 때처럼 칼등으로 상대의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눈 떠.”

용제건은 그 말을 듣자 황홀하게 웃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옥색의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친우의 눈을 응시하다가 김신록은 저도 모르게 마주 웃었다.

가까이에서 관찰해도 용제건의 눈에 신격이 남아 있지 않았다.

*    *    *

김신록이 백룡궁으로 향한 후.

큰 난리를 겪어 휴식이 필요한 이들이 많았으나 아직 쉴 수 없었다.

용족들은 용왕신이 강림한 사이 무녀들의 처우를 결정하기로 했다.

‘가볍든 무겁든 벌을 내리겠지. 어느 쪽이든 그리 보기 좋은 꼴은 아닐 거야.’

무녀들의 처우를 결정하는 자리에는 모든 이들이 참석하기로 했다.

나나 호족의 손님은 직접적으로 그들의 처분에 관여하지 않을 예정이나 사건의 당사자로서 결말을 지켜볼 예정이다.

문제는 무녀 후보생들 쪽이었다.

황룡은 처음에는 무녀 후보생들과 막내 무녀에게 자리를 비우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다.

‘배신했다고 하나 그들은 한때 무녀였던 자들이야. 그러니 후보생들이나 막내 무녀에게 보여 주는 건 좀 그렇겠지.’

하지만 그들은 여기에서 남아 지켜보겠다고 답했다.

막내 무녀는 다 남는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남은 것 같긴 한데, 윤여랑을 비롯한 다른 무녀 후보생들은 제 의지로 선택했다.

그들은 용족들 뒤에 서서 포박된 무녀들을 지켜보았다.

“전후 사정을 캐기 위해서는 고문이 필요하다. 그건 우리 후예에게 맡겼으면 좋겠군.”

“호족의 손님에게 부탁해도 되겠는가?”

“그렇다. 그러니 어떤 처분을 내리든 고문을 할 시간을 주었으면 한다.”

황지호와 황룡은 살벌한 내용의 대화를 훈훈하게 나누었다.

그 대화 내용을 전부 들은 무녀들이 꿈틀거렸다.

기절한 척하거나 실제로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무녀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무녀들의 회복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용왕신이 그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조금씩 치유의 힘을 나누어 주고 있던 덕이다.

‘구름을 다루는 권능은 회수한 것 같은데, 아직 연이 완전히 끊긴 것 같지 않아.’

용왕신의 그런 모습을 보니 조금 마음에 걸렸다.

설마 무녀들을 용서할 생각은 아니겠지?

[나의 무녀들아, 듣거라.]

용왕신의 엄숙한 목소리가 용궁에 울려 퍼졌다.

그 말에 모든 무녀들이 일제히 눈을 떴다.

용왕신의 말을 존중하여 눈을 뜬 게 아니라 강제적인 힘이 작용한 듯했다.

저 모습을 보니 확신했다.

용왕신은 아직 무녀들과의 연을 완전히 끊은 게 아니다.

게다가 ‘나의 무녀들’이라고 칭하지 않았는가.

저렇게 부른다는 건 아직도 저들을 자신의 무녀로 취급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무녀들의 뜻을 알게 된 지금도, 너희를 사랑한단다.]

호족의 손님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도 저 말을 듣고 용왕신이 제정신인가 의심스러웠다.

상위 존재가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은 헤아릴 수 없다곤 하지만, 저런 무녀들을 아직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용왕신의 자비롭고 애정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구나. 너희가 바란 완전한 불로장생이 아니나 가능한 한 오래 살도록 힘을 내어 주겠다. 내 힘이 너희에게 닿는 한, 너희의 삶은 이어질 것이다.]

“아아, 용왕신이시여……!”

눈을 뜬 무녀들이 환희에 차 용왕신을 불렀다.

청룡과 지상에서 온 용족들이 그들을 차마 똑바로 응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한때는 가족으로 여겼던 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도 속물스럽게 굴고 있으니 눈에 담기 싫은가 보다.

그들과 달리 용왕신과 황룡은 끝까지 배신자들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왜 무녀들의 임기가 정해져 있는지 알고 있느냐.”

황룡의 목소리에서는 분노도, 의문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룡은 담담하게 사실을 고할 따름이었다.

“용의 기운을 오래 품으면 인간은 망가진다. 무녀의 소질이 있는 자는 이를 오래 견디지만 한계가 있다. 그래서 시기를 정해 무녀를 새로 뽑고, 은퇴를 원하면 언제든 받아 주는 것이다.”

황룡의 말을 듣자 그가 무슨 의도로 저리 말했는지 알아차렸다.

방금 용왕신이 베푼 자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깨달았다.

아직 황룡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무녀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기뻐하고 있었다.

“너희는 망가지더라도 용왕신의 사랑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용왕신이 무녀들을 사랑하는 한, 그들은 몸과 마음이 망가져도 살아 있을 것이다.

몸이 병들어 손과 발이 썩어 문드러져도, 정신이 병들어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일이 없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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