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79)
97. 용행호보 (10)
용왕신의 애정 어린 처분을 받은 무녀들은 춥고 어두운 흑룡궁에 격리되었다.
용왕신은 그들이 눈을 뜰 만큼 회복시켜 주었으나, 괴물의 비늘 탓에 생긴 상처 등은 회복시켜 주지 않았고 추위를 막아 주지도 않았다.
무녀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무슨 일을 겪어도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내 사랑이 나의 용들과 무녀들이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전해져서 기쁘도다.]
실성한 듯 웃으며 흑룡궁으로 끌려가는 무녀들을 바라보며 용왕신이 다정하게 말했다.
용왕신은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무녀들의 처참한 미래를 비웃는 게 아니야. 정말로 무녀들이 오래 살아서 기쁜 것 같아.’
용왕신은 현세와 연을 맺은 이들을 아꼈기에 자신의 사랑을 자제하고 있던 게 아닐까?
자신과 연이 닿은 무녀들이 오래도록 살길 바라지만, 인간다운 삶을 살길 바라기에 참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무녀들을 상대로는 참을 필요가 없어졌고, 용들도 반대하지 않을 테니 거리낌 없어진 거다.
[후보생들에게는 세 번째 시험이 남았지.]
용왕신이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후보생들에게 말을 걸었다.
윤여랑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네, 기다리고 있었어요!”
윤여랑에 이어 다른 후보생들도 관심을 보였다.
용왕신의 무거운 사랑에 질려 시험을 포기하는 후보생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생각이 많아 보였으나 시험을 치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나를 위해 시를 지어 주겠느냐?]
용왕신의 말에 시상이 떠올랐는지 윤여랑이 밝게 대답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용왕신은 무녀 후보생들의 의지를 확인한 후, 막내 무녀에게도 물었다.
[너에게도 부탁하고 싶구나.]
“저요?”
막내 무녀는 날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을 지었다.
막내 무녀는 다른 무녀들이 끌려가는 걸 보면서 속이 몹시 시원했지만, 대놓고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느라 방심하고 있었다.
용왕신이 그런 제안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한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가 치렀던 시험은 공평하지 않았다. 바로잡을 기회를 주지 않겠는가.]
용왕신은 이번 건을 계기로 홍의 무녀 선발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나 보다.
그 과정에서 막내 무녀가 불합리하게 탈락했다는 것도 알았을 것 같다.
‘용왕신은 처음엔 저 막내 무녀를 뽑고 싶어 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다른 무녀들이 수작을 부리고, 홍의 무녀를 추천하니 용왕신은 무녀들의 뜻에 따르기로 한 거겠지.’
막내 무녀는 그 속사정을 전부 파악하지는 못했겠지만, 지금 무슨 의도로 용왕신이 자신에게 시를 요청하는지는 알 거다.
말이 시를 지어 달라는 거지 사실상 용왕신의 무녀 자리를 맡아 달라고 청하는 거다.
용왕신이 제안하는 사이 홍의 무녀가 막내 무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어딘가 간절해 보이는 게 막내 무녀가 부디 용왕신의 제안을 받아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막내 무녀는 혼란스러워하다가 ‘네, 알겠습니다.’라고 업무를 확인하는 것처럼 답했다.
[고맙다.]
용왕신이 부드럽게 말하자 막내 무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막내 무녀는 어째 의욕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으나 용왕신을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시험을 치를 이들의 의향을 확인한 후, 용왕신이 말했다.
[답해 주어서 고맙다. 휴식을 취하고, 자리를 비운 용들이 돌아온 후에 시험을 치르는 게 어떻겠느냐.]
“오래 머무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 훌륭한 강림 의식 덕에 이번에는 현세에 길게 개입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용왕신이 황룡의 걱정을 가라앉혔다.
용왕신이 길게 머문다는 말에 황룡 주변을 떠돌던 운룡이 구름 위에서 뛰어다니며 기뻐했다.
기뻐하던 운룡 중 하나가 내 쪽으로 와 고맙다며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훌륭한 강림 의식’이라는 말을 할 때 용왕신이 내 쪽을 보는 바람에 저런 반응을 보인 것 같다.
강림 의식은 나 혼자 한 게 아닌데, 이 점을 상기시킬 타이밍을 잡기 어려웠다.
“그럼 우리는 청룡궁으로 돌아가 쉬겠다. 조의신, 가자.”
“그렇다면 나도 청룡궁으로 가겠네. 은인이 머무는 데에 불편함이 없는지 살펴야겠군.”
“그럴 필요 없다. 용왕신과 다른 용들이 있는 황룡궁에서 쉬지 그러나, 청룡.”
“황호, 잊고 있는 듯한데 청룡궁은 내 궁일세.”
수장 둘이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걸 들으며 청룡궁으로 향했다.
황룡은 황룡궁에서 세 번째 시험을 치를 준비를 하고, 뒷수습을 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마중 나왔다.
용왕신이 돌아와 기운을 되찾았다고는 하나 소모한 힘이 크고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 괜찮을지 모르겠다.
‘아직 촉룡의 부탁이 남아 있는데.’
저렇게 바쁜 황룡을 상대로 지금 당장 뭘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용궁의 뒷수습을 두고 생각할 게 많았지만, 우선 용왕신이 있는 자리에서 치러질 세 번째 시험에 관해서 생각하기로 했다.
* * *
정월 초하룻날, 정오.
무녀가 사건을 일으킨 지 열두 시간이 지난 시점, 황룡은 각 궁으로 운룡을 보내 준비가 끝났으니 모여 달라고 청했다.
운룡의 부름을 듣고 휴식을 취한 이들이 황룡궁으로 향했다.
숙면을 취한 덕에 몸이 가벼운데 노친네는 내내 옆에서 말이 많았다.
“조의신, 이능파 소모를 그리 했으니 아직 휴식이 더 필요하다. 시험의 참관을 미루고 좀 더 쉬는 게 어떻나.”
“괜찮아.”
“괜찮기는 무슨. 아직도 평소보다 이능파의 상태가 좋지 않다. 안 그렇나, 적호?”
황지호는 괜히 적호한테까지 말을 걸었다.
적호는 나를 천천히 살피다 말했다.
“황호의 말대로입니다. 이능파의 흐름이 평소보다 약합니다. 정말로 괜찮습니까?”
“저는 괜찮아요. 적호야말로 적연을 긴 시간 동안 사용했는데 괜찮으세요?”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적연으로 황호를 챙기지 않아도 되니 시원해졌습니다.”
“조의신, 이 몸도 이번 사건에서 꽤 큰 힘을 다루었다만.”
황지호가 마지막에 뭐라고 하긴 했으나 지금은 적호와 이야기하는 중이므로 대답은 그냥 안 하기로 했다.
적호는 용궁에 머무는 내내 적연을 발동하고 행동 범위가 제한되어 꽤 답답했을 거다.
하지만 적호는 지친 기색 없이 아주 활기차 보였다.
활기의 원인은 물론 김신록이었다.
적호의 몸 상태에 관해 대화 중이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김신록 자랑으로 얘기가 바뀌었다.
“이번엔 제가 싸울 일이 별로 없었기에 힘이 넘칩니다. 제 아들이 뇌호를 불러내 잔챙이를 다 처리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나설 틈이 없더군요. 황룡은 그때 상태가 좋지 않아 별 도움이 안 되었죠. 그래서 이능파 링크를 할 당시에 황룡이 많은 힘을 보태지 않았는데도 제 아들은…….”
끊이지 않는 아들 자랑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며 생각에 잠겼다.
적호의 말대로 그때 황룡의 상태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능파 링크를 사용했을 때, 김신록은 순식간에 적을 일소했다고 한다.
‘이능파 링크로 이어진 힘은 단순히 힘을 합한 결과물이 아니야.’
적호의 말대로 그때 보태진 황룡의 힘은 아주 작았다.
만약 이능파 링크의 결과물이 단순한 힘의 합산물이라면, 그때 발현된 힘은 거의 후예의 힘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웅족의 권속을 효율적으로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하다.
즉, 이능파 링크의 결과물은 그냥 이능파들을 모아 둔 게 아니라 링크를 통해 발현된 새로운 힘이라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진족, 후예, 인간. 이 셋 중 둘 이상, 후예를 포함하면 강력한 힘이 발현되는 것 같아.’
아직 이능파 링크에는 고찰할 점이 많은 것 같다.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건 근원과 관련이 깊은 광림을 쥔 두 후예, 김신록과 염준열이다.
“맞아, 신록이 잘 싸우더라.”
한편, 이능파 링크에 관해 알게 된 용제건은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사건이 수습되고 한참 뒤 김신록과 나타난 용제건은 눈가리개를 벗고 있었는데, 자신의 눈에 신력이 없는 걸 자랑하듯 크게 눈을 뜨고 다녔다.
황지호와 적호, 청룡은 용제건이 눈가리개를 벗고 나타날 걸 예상한 것처럼 별로 놀라진 않았다.
그래도 신경은 쓰이는지 용제건의 눈에 신격이 남았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물론, 용제건은 신격을 미련 없이 버린 상태였다.
“용제건, 용왕신이 강림한 건 알고는 있겠지. 어째서 황룡궁에 안 가고 청룡궁에 붙어 있나.”
“신록이가 부탁했어.”
용제건은 뻔뻔하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신록이 대놓고 청룡궁에 머물라고 할 것 같진 않았다.
역시나 김신록이 저 말을 부정했다.
“내가 언제.”
“신록이가 그랬잖아. 옆에 남아서 이능파 링크를 도와달라고.”
“그렇게는 말 안 했는데.”
“아니야?”
“아닌 건 아닌데…….”
“그럼 맞는 거지.”
김신록은 용제건을 한 대 치고 싶어 하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용제건의 눈을 보다가 얼굴을 풀었다.
용제건이 속을 긁는 것보다 친우가 승천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뭔지 몰라도 눈가리개를 벗는 과정에서 용제건이 김신록을 놀려 먹을 구실을 제대로 잡은 것 같다.
황지호가 어처구니없어하는 얼굴로 지켜보다 말했다.
“용제건, 어쨌든 우리 후예를 너무 귀찮게 하지 마라.”
“이해해 줍시다, 황호. 용제건은 수천 년 쌓아 온 신격을 내려놓는 큰 결심을 하였습니다. 당분간 유희계 용다운 짓거리를 하겠지요.”
적호는 용제건한테 실드를 치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르겠다.
황룡궁으로 향하니 용왕신이 자신의 총아를 기쁘게 맞이했다.
용제건을 발견하자 용왕신 주변의 채운이 더욱 밝은 빛을 뿜었다.
[드디어 네 얼굴을 보는구나, 용제건.]
“오랜만이에요, 용왕신.”
용제건도 제법 반갑게 용왕신에게 인사했지만, 용왕신만큼 기뻐 보이지는 않았다.
치사랑에 비해 내리사랑이 압도적으로 큰 것 같다.
용왕신은 용제건의 태도를 보고도 서운함을 전혀 느끼지 않은 말투로 다정히 말을 걸었다.
[선택을 마쳤으면 바로 얼굴을 보이지 그랬나. 아직 나는 네 친우 소개도 받지 못했다.]
“신록이는 상위 존재의 존재감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요. 지금쯤이면 인사 정도는 할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소개해 주겠느냐.]
용왕신이 부르자 김신록이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김신록은 용왕신이 용궁에 오래 머무른 덕에 그 존재감에 익숙해진 건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용왕신 가까이 설 수 있게 되었다.
늘 생각하지만 용족들은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언제나 김신록을 환영하는 것 같았다.
하긴, 저 유희계 용족 용제건한테 친구가 있으면 신기하기도 하고 좀 감사하기도 할 것 같다.
[앉지. 후보생들이 준비한 시를 함께 듣자꾸나.]
용왕신의 말에 모든 손님과 용족이 착석하자 황룡이 황운호를 등지고 앞에 섰다.
황운호의 풍경은 처음 봤을 때와 달라진 상태였다.
구조가 바뀐 것도 있었지만, 나비령의 권속을 몰아내고 용왕신이 강림한 여파가 컸다.
황운호에는 나비가 한 마리도 남지 않은 대신, 꽃이 머금은 오색의 빛깔과 주변을 감싼 구름이 더욱 짙어져 있었다.
“지금부터 세 번째 시험을 치르도록 하겠다.”
황룡의 선언으로 세 번째 무녀의 시험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