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80)
97. 용행호보 (11)
용왕신의 무녀를 뽑는 자리에서 시 짓는 솜씨를 확인하는 건 좀 엉뚱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용왕신과 무녀의 특징, 관계를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시험은 아니었다.
무녀의 소질을 가진 자는 용왕신을 접하면 감상이 절로 떠오른다고 한다.
그런 감상을 잘 표현할수록 용왕신과 현세를 잇는 능력이 뛰어난 셈이다.
“저는 용왕신께서 강림하시어 용궁이 찬란한 빛과 색을 되찾은 순간에 관해 시를 썼답니다.”
첫 번째로 눈이 좋은 무녀 후보생이 시를 발표했다.
무녀 후보생은 용왕신이 강림한 순간 자신의 눈으로 본 것과 그 감상을 시조로 담아내었다.
3장 6구 4보격 12음보의 기본 형식을 지킨 평시조로, 정해진 틀에 맞춰 단어를 억지로 채워 넣었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후보생의 감상이 잘 전달되었다.
짧은 시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광경이 눈에 그려졌다.
“저는 용궁에 울려 퍼지던 용왕신의 위엄 넘치는 목소리에 관해 시를 써 왔답니다.”
두 번째로 귀가 밝은 무녀 후보생이 준비한 시를 읽었다.
무녀 후보생은 용왕신이 말을 하던 순간을 시로 썼다.
용왕신이 강림한 순간 무녀 후보생에게 한 인사, 괴물을 향한 경고, 무녀의 배신을 두고 보인 슬픔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전반적으로 어색한 느낌이 드는 시였으나 의성어를 잘 활용해 시를 쓴 덕에 운율감이 느껴지고 현장의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써 온 시를 발표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막내 무녀 차례가 되었다.
막내 무녀는 산문시를 준비했다.
시라기보다는 매우 짧은 수필, 아니, 보고서를 쓴 게 아닌가 싶었다.
운문시의 형식을 쓰지 않고 사무적으로 쓴 탓에 딱딱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 덕에 막내 무녀가 강력한 상위 존재인 용왕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묘사할 만큼 굳건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게 잘 느껴졌다.
시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용족이 몇 명 있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윤여랑이 앞으로 나왔다.
‘윤여랑은 어떤 시를 쓸까?’
용궁 시나리오를 플레이한 플마고 유저라면 누구나 궁금해할 사항이었다.
플마고 속 윤여랑은 시를 쓰지 못했다.
윤여랑은 그 자리에 있던 게 용왕신이 아닌 이무기라는 걸 꿰뚫어 보아 시를 못 쓰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진짜 용왕신이 존재했다.
“용왕신을 위한 시를 들려다오. 어떤 시를 준비했지?”
황룡의 물음에 윤여랑이 기대에 부푼 얼굴로 답했다.
윤여랑은 시험 주제가 시라는 걸 알게 된 후부터 시상이 계속 솟아올라 주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네! 멋지고 강하고 아름다운 용왕신님에 관해 써 왔어요. 첫 번째 연은 꿈에서 봤을 때 느낀 감상을 담았고요, 두 번째 연에는 뵐 수 없었을 때 쓸쓸했던 마음을 적고, 세 번째 연에는 용궁에 왔을 때…….”
윤여랑은 긴 설명을 마치고 시를 읊었다.
윤여랑의 시에는 명랑한 단어들이 발랄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시라기보다는 동요의 가사처럼 들렸다.
맑은 내용의 시를 들으며 용들이 연신 감탄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쉽고 밝은 단어로 미지의 존재를 묘사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윤여랑의 시에는 용왕신을 향한 이해, 호의와 존경이 잘 담겨 있었다.
‘윤여랑은 이렇게 멋진 감상을 품고 있었구나.’
윤여랑이 노래를 불렀을 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칠 뻔했지만, 용왕신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겨우 참았다.
이 자리에 어울릴 만한 감상을 표현할 만큼 시에 소양이 있다면 윤여랑의 시가 얼마나 훌륭한지 더 잘 파악하고, 내 소감을 전할 수 있을 텐데.
아쉬워하고 있자니 문득 시를 짓지 못하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남옥시인 제갈재걸이 떠올랐다.
제갈재걸이라면 무녀 후보생들의 시를 듣고 상위 존재도 흠을 잡지 못할 만큼 훌륭한 평을 내렸을 것이다.
의미 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모든 시를 듣고 감상을 마친 용왕신이 고했다.
[시험에 응한 모든 이들이 무녀로서 부족함이 없도다.]
용왕신의 말에 후보생들의 얼굴이 활짝 폈다.
막내 무녀도 민망해하긴 했으나 밝은 표정을 지었다.
땅에 내려온 용왕신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용왕신이 지상에 가까워지자 김신록은 압박감을 느끼고 몇 발자국 물러났는데, 더 가까이에 있는 예비 무녀들은 서서 맞이했다.
[부디 나의 무녀가 되어 주겠느냐.]
용왕신이 청하자 시를 지은 네 명이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이 수락하자 용왕신의 기쁨이 용궁 전체로 퍼져 채운이 눈부시게 빛났다.
오색의 채운은 다섯 갈래로 흩어졌고, 그중 네 개의 색이 예비 무녀 위에 떠올랐다.
바로 무녀의 계승 의식이 시작된 듯했다.
[무녀들이여, 이 힘을 받아들여 나와 용, 현세를 이어 다오.]
윤여랑에게 유황색의 구름이.
눈이 좋은 무녀 후보생에게 벽색의 구름이.
귀가 밝은 무녀 후보생에게 자색의 구름이.
그리고 막내 무녀에게 홍색의 구름이 흘러갔다.
막내 무녀는 자신 쪽으로 온 구름의 색을 보고 당황하다가 고개를 돌려 황룡 쪽을 바라보았다.
황룡 뒤에는 이제 선대 홍의 무녀가 된 염준열과 동갑인 아이가 서 있었다.
‘막내 무녀는 몰랐던 것 같네. 황룡이 용궁에 벌어진 상황은 대략 전했다고 들었는데, 홍의 무녀 건은 전하지 못했나.’
시험이 시작되기 전, 황룡이 운룡을 통해 어느 이야기를 전했다.
호랑이들과 나는 운룡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용제건이 알아서 해석해 주었다.
―처음부터 홍의 무녀는 제 자리가 아니었어요.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분은 따로 있어요.
그녀는 사의를 표하며 그렇게 말했다.
용왕신이 슬퍼하며 잡고, 용왕신의 무녀 자리는 하나 더 비니 남아 있어도 좋다고 해도 그녀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대신 아주 주저하다가 다른 제안을 했다.
―만약 허락해 주신다면, 속죄하는 마음을 담아 용궁의 일을 돕고 싶어요. 이젠 용궁의 무녀가 없으니까요.
막내 무녀가 하나 남긴 했지만, 강림 의식에서도 대활약을 한 그녀가 용왕신의 무녀가 될 건 자명한 일이었다.
용왕신은 어떤 형태로든 무녀로서 남아 준다면 기쁘게 받아들이겠다고 답했고, 황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용궁에 남아 다오. 하나 속죄하는 마음은 버려 다오. 어린 네가 그토록 고민하는 동안 아무것도 못 한 우리의 잘못이 더 크단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눈물을 쏟으며 사죄와 감사를 입에 담았다.
황룡은 오로지 감사의 말만을 마음에 담고, 그녀를 용궁의 무녀로서 받아들였다.
파아아앗!
막내 무녀가 당황한 사이에도 채운은 각 예비 무녀의 몸에 스며들었다.
거절하거나 자초지종을 물을 틈도 없이 막내 무녀는 홍의 무녀가 되었다.
정식으로 무녀가 된 이들 주변에 채운이 감돌았다.
[나의 무녀들의 계승이 끝났다. 지금부터 그대들은 나와 용족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용왕신이 선언하자 엄숙하게 계승식을 지켜보던 용족들이 무녀들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황룡, 청룡은 물론이고 용제건까지 그 뒤를 따랐다.
“우리의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한다.”
청룡이 용족의 수장으로서 대표로 인사했다.
뒤따라 다른 용족들이 가족이 된 무녀들에게 인사를 올렸고, 무녀들도 머뭇거리다 같이 인사를 했다.
새로운 무녀들과 용족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무녀 계승식 시나리오가 무사히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네가 무사해서 기쁘다. 네가 나의 무녀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용왕신은 유황의 무녀가 된 윤여랑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용궁에 있는 용족 전원과 인사를 막 마친 윤여랑은 용왕신이 말을 걸자 꽃이 피어난 것처럼 웃었다.
덩달아 윤여랑 주변에 떠 있던 유황색의 구름이 밝게 피어올랐다.
선대 유황의 무녀가 다룰 때에는 어딘가 어둡고 불쾌한 느낌이 들던 색이었는데, 윤여랑이 다루니 신비롭고 쾌활한 느낌이 들었다.
“저도 기뻐요! 무녀가 되니까 용왕신님이 더 가까이 느껴져요. 목소리도 더 또랑또랑하게 들려요! 이제 꿈에서 더 자주 뵐 수 있나요?”
[물론이다.]
윤여랑이 마치 용왕신을 꿈에서 여러 번 보았다는 것처럼 말하자 용족들이 경악했다.
용왕신이 이를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자 더더욱 놀라워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대단함을 모두가 알아주니 뿌듯했다.
“저, 시험이 끝나고 제가 무녀가 되면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어요.”
[나의 무녀여, 뭐든 말해 보거라.]
“왜 선배였던 무녀님들이 멋있고 아름다운 용왕신님을 배신한 건지 열심히 생각해 봤거든요. 불로불사 때문이라고 듣긴 했는데, 왜 용왕신님보다 불로불사를 택한 건지 이해가 안 가서요.”
윤여랑의 말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숨을 들이켰다.
이 좋은 자리에서 용왕신에게 민감한 화제를 꺼낸 대담함에 놀라고,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하기도 한 것 같다.
윤여랑은 배신의 이유를 전해 듣고 생각을 한 모양인 듯한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할지 나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윤여랑은 악의가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녀가 되면 이름을 버리고, 면사를 쓰잖아요. 용왕신님이 강요한 게 아닌데도 말이에요. 그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좀 더 자세히 말해 주겠느냐.]
윤여랑의 마음에 그늘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용왕신은 흥미롭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이름과 얼굴을 감추고, 닫힌 사회에서 지내면 나쁜 생각이 금방 옮기 쉬우니까요!”
윤여랑의 말은 너무나도 단순명쾌해서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일리가 있었다.
이름과 얼굴을 숨길 수 있는 곳에서는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이들이 넘치고, 닫힌 사회에서는 끔찍한 사건들이 셀 수 없이 벌어진다.
무녀들의 배신에는 여러 복잡한 생각과 음모가 얽혀 있으나 멀리서 보면 윤여랑의 말대로였다.
“그래서 저는 제 얼굴을 드러내고, 유황이 아닌 윤여랑으로서 용왕신님의 무녀가 될래요.”
윤여랑은 이 사건에 관해 열심히 생각하여 나름의 결론을 내린 듯했다.
그것도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말이다.
용왕신은 윤여랑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다른 무녀들에게 물었다.
[다른 무녀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녀들은 윤여랑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면사를 쓰고 이름을 버리는 걸 좋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사실 면사를 쓰고 다니는 건 조금 묘한 기분이 들 것 같아요.”
“이름을 계속 쓰는 건 좋은 생각이네요.”
“……뭐, 그렇죠.”
무녀들의 말을 통해 그들의 속마음을 확인한 용왕신이 말했다.
[나의 무녀, 윤여랑은 강한 힘을 타고난 것뿐만 아니라 현명하기까지 하구나.]
나도 용왕신의 말에 동감했다.
윤여랑의 제안은 어쩌면 먼 훗날 벌어질지도 모르는 무녀들의 변심을 막을 수가 될지도 모른다.
[나의 무녀들이여, 나를 위해 얼굴을 감출 필요도, 이름을 버릴 필요도 없다. 너희가 나를 따르고, 내게 시간을 할애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길을 열었다.
황룡은 윤여랑이 말한 ‘닫힌 사회’라는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어쩌면 윤여랑의 제안은 더 큰 변화를 불러올지도 모르겠다.
윤여랑의 제안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구나. 말해 보거라.]
“네! 사실 시험이 일찍 끝나면 드리고 싶었던 제안이 있어요.”
윤여랑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용왕신님께 세배를 올리고 싶어요!”
그 말에 이 자리에 있는 대다수가 잊고 있었던 명절의 존재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