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81)
97. 용행호보 (12)
용왕신이 윤여랑의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아이들에게 세배를 받는 날이 오다니. 황룡, 세뱃돈을 준비해야겠다.]
“대신할 것을 마련하겠습니다.”
용궁에 현금이 들어간 봉투는 없겠지만, 대신할 보물은 차고 넘칠 것 같다.
황룡은 운룡 여럿을 움직여 한쪽은 용궁의 보물고로 향하게 하고, 다른 쪽은 세배할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비단 보료를 깔게 했다.
용왕신, 황룡 외의 다른 용들도 몹시 들떠 보였다.
“청룡, 우리도 세배하는 게 좋겠나?”
“용왕신께서 저리 기뻐하시니 우리도 하는 게 좋겠군. 물론, 새로 맞이한 가족인 무녀의 세배도 받아야겠지.”
“큰일이군. 새 무녀들의 세배를 받아도 세뱃돈으로 줄 만한 게 없다. 준열이 몫밖에 생각하지 않았어.”
“황룡에게 우리 몫까지 부탁해야겠군.”
용들은 금방 대응했다.
아마 매년 염준열에게 세배를 받아 온 덕에 익숙할 거다.
한편, 호랑이들은 한발 물러나 이를 지켜보려 했으나 용제건이 이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신록아, 너도 세배할래?”
‘무녀들한테 세배받을래?’가 아니라 너도 세배하라는 게 참 용제건다웠다.
김신록이 반응하기 전에 다른 호랑이들이 선수 쳤다.
용제건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랑이들이 냉큼 말했다.
“아들에게 받는 첫 세배가 되겠군요. 황호, 뭐 없습니까?”
“뭘 맡겨 둔 것처럼 말하는군. 그리 묻지 않아도 우리 후예가 세배를 하는데 뭐든 내놓을 거다.”
“황룡에게 저 아이 몫도 준비하라 이르겠네.”
청룡도 김신록한테 세배를 받고 싶은 모양이다.
호랑이들은 용족과 신경전을 벌이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죽이 잘 맞았다.
김신록은 용제건의 헛소리에 빼도 박도 못하고 세배를 하게 생겼다.
5천 살을 넘게 먹고 세배를 할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한 김신록은 용족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호랑이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뒤늦게 만악의 근원인 용제건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 같지만, 용제건은 용족과 호족 사이에 자리를 잡아서 공격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용제건은 용족 사이에서 약 올리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황호, 조의신 몫의 세뱃돈도 준비하십시오.”
“물론이다.”
“우리도 용족의 은인 몫을 준비해야겠군. 운룡이 아주 바빠지겠어.”
“호족의 은인인 조의신이 용족에게 세배를 올리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조의신, 할 거면 우리한테만 해라.”
“황호, 여기는 용궁이고, 지금 용왕신이 강림해 계시네.”
갑자기 불똥이 내 쪽으로도 튀었다.
다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진족들이니 세배를 하는 건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는데, 하고 나면 쓸데없는 걸 세뱃돈으로 떠넘길 것 같아 하기 싫다.
윤여랑도 나와 비슷한 심정인 것 같았다.
운룡이 구름에 얹어 온 금은보화와 보물 상자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윤여랑이 말했다.
“그냥 덕담만 해 주셔도 되는데요!”
[덕담도 해 줄 거란다.]
용왕신으로부터 무언가를 주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다.
‘주면 감사하게 받겠다’라는 태도를 보이는 전 막내 무녀, 현 신입 홍의 무녀를 제외하고 전원 난감해했다.
결국 나도 세배를 하게 되었으나 치열한 교섭 결과 용왕신에게만 하기로 했다.
호랑이들은 세배를 두고 나한테 뭐라 하긴 했지만, 아마 후예의 세배를 받는 걸로 만족할 거다.
김신록이 이 자리에 있어서 다행이다.
[새해 복 많이 받거라.]
용왕신은 무녀, 용족, 나의 세배를 받고 매우 기뻐하며 덕담과 오색 채운으로 만든 복주머니를 건넸다.
내 차례가 되어 내가 용왕신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네가 짊어지고 있는 것이 없다면, 녹의 무녀 자리를 채워 달라고 권했을 것이다.]
용왕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다른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말이었나 보다.
하긴, 저 말을 들었으면 시험을 통과해 용왕신의 무녀가 된 이들의 기분이 미묘해졌을 것이다.
덤으로 호랑이들도 호족의 은인 어쩌고 하면서 시끄럽게 굴 것 같으니 좋은 선택이었다.
‘짊어지고 있는 게 많긴 하지.’
흑막을 막기 위해 둬야 할 수가 많이 남아 있었다.
특이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상위 존재가 알아보는 걸까?
[용족의 은인에게 큰 도움을 받은 데다 세배까지 받다니, 나는 복된 용이로다.]
이번엔 용왕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이 아니라 귀에 울렸다.
용왕신은 짐짓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굴며 복주머니를 내밀었다.
복주머니에서 척 봐도 심상치 않은 힘이 느껴졌다.
황룡, 청룡, 용제건은 저 복주머니 안에 든 것의 정체를 알아본 듯 주의 깊게 응시했다.
[이 비늘을 받아 다오. 내가 먼 옛날 용제건에게 준 것과 같은 비늘이다. 용궁 어디를 가든 허락해 줄 것이며, 네가 도움을 청하면 내가 강림할 것이다.]
용제건에게 준 것과 같은 비늘이라면 역린에서 가장 가까운 비늘 아닌가!
용왕신의 신기가 짙게 담기고, 모든 비늘 중 제일 늦게 자란다는 귀한 비늘이었다.
“저 비늘은 언제 돋은 거지?”
“용제건에게 그 비늘을 준 후로 수천 년간 비어 있었다고 한다. 마침 얼마 전에 그 비늘이 차오른 모양이다.”
청룡과 황룡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니 더 받기 어려워졌다.
차마 복주머니를 받지 못하고 있자니 용왕신이 추가타를 날렸다.
[마음에 차지 않느냐? 그렇다면 더 좋은 선물을 마련할 테니 우선 받아 두거라.]
“아니에요. 과분한 선물이라 받기 어려워서…….”
[과분한 건 네가 용족에게 준 은혜란다.]
받지 않으면 더 큰 선물을 떠넘길 것 같았다.
이러다가 용의 뿔을 자르는 거 아닌가?
‘이 비늘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중을 위한 수라고 생각하자.’
더 큰 선물을 주겠다는 게 빈말이 아닌 것 같아 고심 끝에 받기로 했다.
복주머니가 내 손으로 넘어오자 용왕신이 만족해하며 말했다.
[나는 치유에 능하다. 내 힘을 받은 무녀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를 잊지 말아 다오.]
용왕신은 선물을 건넨 후에도 따뜻한 말을 했다.
명절 분위기는 한바탕 세배를 마치고도 이어졌다.
무녀들의 계승식이 무사히 끝난 걸 축하하기 위해 열린 연회가 그냥 명절 식사 자리처럼 느껴졌다.
“정식으로 무녀가 된 걸 축하해.”
“감사합니다. 의신이 오빠를 따라잡을 만큼 열심히 할게요!”
윤여랑에게 축하 인사를 하자 약간 핀트가 어긋난 듯한 답변이 돌아왔다.
나를 따라잡는다는 건 뭔 소린가.
혹시 그때 사용한 윤여랑의 광림을 두고 한 소리일까?
윤여랑은 플마고 속과 달리 용왕신과 용족의 서포트를 받으며 성장할 것이다.
내가 플마고 버전에서 육성한 캐릭터보다 더욱 강력한 무녀가 될 테니 굳이 나를 본받지 않아도 되는데.
“의신이 오빠가 그때 보여 준 무선(巫扇)은 제가 만들고 싶은 그대로였거든요. 그걸 보니까 머릿속에 막 영감이 떠올라서요! 조언을 좀 듣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내가 윤여랑의 질문에 답하는 사이, 다른 무녀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저들은 강림 의식 때 내가 사용한 무녀의 힘이 대체 무엇인지 좀 신경 쓰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내가 사용한 윤여랑의 힘은 용족과 인연이 없는 일개 고등학생이 가지고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용왕신과 용족이 나를 두고 별말이 없는 걸 봤으니 수상하게 여기지는 않아도 마음에 걸리는 게 많은 듯했다.
“의신아, 소원 들어줄게.”
무녀들과 대화를 마치고 자리를 옮겼다가 용제건에게 붙잡혔다.
용제건이 시안색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전에 소원을 빌었는데요.”
“용궁에서 승천하지 말라는 그 소원 말이지? 난 이제 승천할 마음이 없어졌거든. 그래서 그 소원은 무효야.”
대체 저 소원은 언제까지 우려먹을까.
소원에 관해 묻지 말라는 소원이라도 빌어야 하나?
하지만 용제건은 제 맘에 들지 않는 내용은 아무렇지 않게 무효라 해 대므로 소용없을 것 같다.
용제건은 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더욱 귀찮고 집요하게 굴었다.
“신록이가 이렇게 잘 싸우는 줄 알았으면 더 빨리 마음을 바꾸고 다른 소원을 들어줄 준비를 했을 텐데.”
“용제건 선생님이 승천 준비를 하느라 바빠 보이셔서 말할 기회를 놓쳤어요.”
“그래도 의신이가 마음만 먹으면 말할 기회는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었잖아?”
“이능파 링크 훈련에는 염준열 선배님도 참석했어요. 그런데도 자리를 비우셨기에 현세에 미련이 없으신 줄 알았죠.”
나는 용제건이 승천 직전 보인 행보를 떠올리며 말했다.
무신경하게 승천에 관해 툭툭 내뱉는 용제건은 참 밉상이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하는 선택이라면 뭐든 존중할 생각이었지만, 그때 보인 모습을 생각하면 김신록과 협력해 용제건을 압정 함정에 밀어 넣고 싶었다.
“미련이 있다는 걸 들키면 다들 나를 만류했겠지.”
용제건이 말을 돌릴 줄 알았는데, 진지하게 답했다.
저 말을 하는 동안에는 용제건의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자신을 붙잡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행보를 보인 걸까?
“그런데 이능파 링크에 관해서 내게 안 알려 준 건, 내가 아니라 신록이 때문 아니야?”
용제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빙그레 웃었다.
나도 모르는 척 용제건의 화제 전환에 어울렸다.
용제건은 용궁에 가는 날이 가까워지자 신변 정리를 하느라 바삐 나돌아다녔다.
그 덕에 용제건에게 광림 훈련을 마무리하고 시행한 이능파 링크 테스트에 관해 말할 기회가 없었다.
억지로 불러낸다면 부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김신록은 왜 용제건이 승천하려 하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어. 스스로 깨닫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지.’
용제건의 친우인 김신록이 용궁에 가면 용족들이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예상대로 용궁에서 용족과 교류를 하고, 용제건과 승천에 관해 점차 알게 되었다.
그 결과 김신록은 자신의 의지로 용제건을 붙잡았고, 승천해야 할 이유를 지워 버렸다.
용제건은 내가 무슨 생각으로 수를 뒀는지 꿰뚫어 보고 황홀해했다.
“의신이한테 입은 은혜가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까 빨리 소원을 말하게 해야겠다.”
누가 봐도 은혜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신이 즐기려고 저러는 것 같다.
마침 세배한 이후로 호랑이들한테 붙잡혀 길고 긴 덕담을 듣던 김신록이 이쪽으로 왔다.
“조의신 군을 귀찮게 하지 마.”
“귀찮게 하는 게 아니라 은혜를 갚으려 하고 있어.”
“어딜 봐서?”
“나를 봐서?”
용제건은 실없는 소리로 김신록의 속을 긁어 댔다.
소원 타령에서 벗어날 겸 나는 그 틈을 타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용제건 못지않게 집요한 노친네한테 붙잡혔다.
“조의신, 지금이라도 세배할 마음은 없나? 딱히 너를 아랫사람으로 보고 대우받으려는 건 아니다. 그저 이 몸도 네게 덕담과 세뱃돈을 건네고 싶을 따름이다.”
황지호는 호족의 수장으로서 용족과 교류는 안 하고 쓸데없는 소리를 해 댔다.
그동안 적연 때문에 못 했던 말이 쌓였는지 황지호는 아주 말이 많았다.
“일주일간 재미있고, 어처구니없는 대화를 하더군. 할 말이 많았다.”
“몇 번은 제게 말을 하도록 눈치를 주지 않았습니까. 적연으로 황호의 기척을 지우는 것만으로도 번거로운데, 몹시 어수선했습니다.”
적호가 몇 번 황지호가 시켜서 말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기분 탓이 아니었나 보다.
황지호가 ‘용제건의 제자’, ‘우리 반 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매우 궁금하다.
“툭하면 저 용들은 너를 용족의 은인 운운해 대지, 너는 한반도의 영역이 벗어난 곳을 돌아다니지. 입이 열 개라도 부족하거늘, 한마디도 할 수 없어서 답답했다. 아, 그리고 그때 이 말이 하고 싶었다.”
나는 황지호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딴생각을 했다.
그때란 또 어느 때를 말하는 건가.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닐 것 같다.
“호족 중에는 흑호가 없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도 했었다.
오방색을 전부 갖춘 용족과 호족을 비교하며 황룡이 흑호에 관해 말했었다.
황지호는 그 이야기를 두고 생각한 바가 있나 보다.
“그 빈자리를 굳이 채워야 한다면, 나는 그 자리를 채우는 자가 조의신 너이길 바란다.”
황지호의 말을 들은 순간, 불현듯 까마귀 마왕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 사라진 X는 필시 호족, 웅족과 깊은 연이 있을 거다. 곤란하게 됐군.
이 세계에는 아무도 모르게 소멸한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라진 자가 있다면 그자는 호족, 웅족과 깊은 연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들은 수천 년간 X의 부재를 알아채지 못한 당사자다.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지. 그들이 함께하며 쌓은 경험, 인연, 정, 확신이 객관적인 사고를 방해할 것이다.
호족은 그 부재에 관해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