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82화 (782/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82)

97. 용행호보 (13)

용왕신은 초하룻날이 끝나자 현세 강림을 마치고 신계로 돌아갔다.

긴 강림이었으나 용족들에게는 짧게 느껴졌는지, 용왕신이 돌아가자 몇몇 용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밤이 깊어 무녀들이 침소로 향한 후에도 우울해하는 용족들이 있었다.

“우리가 슬퍼하면 용왕신의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마무리할 일이 남았다는 것을 잊지 마라.”

청룡의 말에 용족이 마음을 다잡고 무녀들이 있는 흑룡궁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용족들은 무녀의 심문을 김신록에게 맡기기로 했다.

용궁에 있는 모든 용들이 참관할 예정이나 이는 김신록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한때 가족이었던 이들의 말로를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용족들이 정신을 차리자 적호가 독촉했다.

“제 아들이 먼저 흑룡궁으로 향했습니다. 기다리게 하지 마십시오.”

“그렇군. 어서 가세.”

“안내하겠다.”

황룡이 부른 운룡을 따라 흑룡궁으로 향하던 중, 황룡이 내게 말을 걸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구나.”

X와 흑호에 관한 사항에 고찰하느라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티가 많이 나나 보다.

황지호도 나를 보며 조금 전까지 잔소리를 해 댔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냐는 둥, 저번에 그 정도로 이능파를 크게 소모했다면 전서구를 안 쓰고 뭐 했냐는 둥…… 그 외에도 뭔가 더 말한 것 같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용왕신께서는 신계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네 걱정을 했다. 나도 네 걱정을 한다.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 다오.”

“네, 죄송합니다.”

“사과를 듣기 위해 한 말이 아니란다.”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흑룡궁에 도착했다.

흑룡궁에 발을 들이자 삽시간에 추위가 몸을 덮쳤다.

운룡을 따라 흑룡궁 깊은 곳으로 향할수록 공기가 점점 차가워졌다.

체온을 빼앗기기 전에 황룡이 구름을 부려 주변을 감싸 찬 기운을 막아 주어 그리 춥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기온이 떨어진다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왔어?”

검은 얼음으로 뒤덮인 지하실.

김신록과 용제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룡은 얼음 감옥 속에서 부들거리며 용제건을 노려보는 전 무녀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 물었다.

“먼저 고문한 건가? 저들의 정신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다만.”

“전에 무녀들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잖아? 그 얘기를 조금 했어.”

김신록 대신 용제건이 멋대로 답했다.

용제건은 그사이에 전 무녀들의 속을 뒤집어 놓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듯하다.

“용족의 은인의 소원을 들어주느라 바쁘거든. 그래서 저번에 한 말을 철회했지.”

“호족의 은인을 핑계 삼지 마라.”

용제건의 말도 안 되는 핑계에 황지호가 어처구니없어했다.

말이 철회지 한 명 정도는 구제해 줄 것처럼 희망으로 고문하다가 절망으로 밀어 넣었을 거다.

용제건이 배신자를 상대로 장난질을 친 게 드러났으나 용족들은 누구도 눈치를 주지 않았다.

청룡은 용제건을 책하는 대신 김신록에게 말했다.

“용궁에 용왕신께서 남긴 힘이 충만하니, 어지간한 일로 죽지 않을 걸세. 하고 싶은 대로 하게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청룡의 차가운 말이 똑똑히 들렸을 텐데도 무녀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곪은 상처 자국과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여유를 부렸다.

흑룡궁에 방치되어 추위에 시달렸을 텐데도 아직 오래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에 기운이 나나 보다.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걸 깨달은 배신자도 있겠지. 하지만 다른 다수가 여유를 부리니까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착각하는 거야.’

김신록이 최선을 다한 고문을 맛보고도 그 착각이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김신록은 무슨 일을 겪은 건지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지고, 몸에 자잘한 상처가 많은 배신자를 지목해 말했다.

“우선 저들의 체력, 정신력을 가늠해 보고자 합니다. 정보량이 적어 보이는 자를 대상으로 실험하겠습니다.”

김신록이 볼펜을 하나 꺼내 들었다.

무녀들 중 몇몇이 볼펜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김신록이 볼펜의 끝을 이용해 상직근을 시작으로 안구를 움직이는 근육을 하나씩 잘라 가자 그들의 비웃음이 멎었다.

김신록은 비명을 질러 대는 배신자를 관찰하며 무덤덤하게 실험을 계속했다.

“이 정도 고통에는 기절하지 않는군요. 출혈량에 따른 기절 여부를 확인하겠습니다.”

저들이 원한 건 무녀 시절 누렸던 우아한 삶을 영원히 이어 가는 것이었다.

고통과 치욕 속에서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위해 배신을 획책한 건 아닐 것이다.

그 증거로, 얼마 지나지 않아 김신록에게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배신자가 속출했다.

죽음을 청하는 배신자의 말에 용제건과 청룡이 답했다.

“오래 살고 싶어 했는데 그새 마음이 변했어? 그런데 죽고 싶으면 신록이가 아니라 용왕신께 부탁해.”

“용제건의 말대로다. 용제건의 친우는 용왕신의 사랑을 받는 자를 죽일 만큼 모질지 못하다.”

죽이지 않을 뿐, 죽고 싶어질 만큼 고문을 하지만 말이다.

고문을 시작한 지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그동안 벌인 짓들을 금방 실토했다.

하지만 대부분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라 쓸모가 없었다.

그나마 쓸 만한 정보가 있다면 ‘그자’와의 접촉은 모두 전 유황의 무녀가 담당했다는 점이었다.

“이자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군요.”

정보의 핵심을 쥐고 있는 전 유황의 무녀는 다른 무녀들보다 손이 더 많이 갔다.

버텨 봤자 고통이 길어질 뿐인데, 왜 고집을 부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고문이 길어질 것 같아 제안했다.

“나비를 보고 와도 될까요?”

“물론이다. 동행하겠다.”

“이 몸도 가지.”

나비령의 권속을 보러 가는 길에 황룡과 황지호가 동행했다.

국경을 벗어날 수 없는 황지호를 배려해 무녀들의 고문은 흑룡궁 내에서도 동쪽으로 치우친 구역에서 이루어졌는데, 나비령의 권속도 국경 내에 있는 듯했다.

복도를 걷는 사이 황룡이 황지호에게 물었다.

“황호, 지상은 어떤가.”

“조의신이 어제 돌아오지 않아서 서운해하는 이들이 많다.”

황지호가 동문서답을 했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닌 것 같지만, 마음이 넓은 황룡은 그냥 웃어넘겼다.

말이 길어지다 보니 다행히 황지호가 황룡이 궁금해하던 붉은 사자 팀 빌딩 쪽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그쪽은 별 피해 없이 무사히 마족을 생포했고, 노리던 물건도 입수했다고 한다.

“마신의 사제는 포박된 상태로도 정보를 옮기는 귀찮은 술수를 지니고 있지. 우리 학교에 소속한 언령술사를 파견해 이를 완전히 봉쇄했다.”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예전에 ‘눈’을 옮긴 적이 있어 이를 방지할 대책도 세워 뒀다.

저들은 붙잡힌 이후, 정보가 어느 정도 모이면 아바리티아의 사제와 같은 수를 쓸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정보를 흘릴 여지를 남기며 애를 태우다가 공청훤을 불러 언령으로 한 번에 모든 움직임을 구속하는 방법을 택했다.

‘공청훤은 호족과 연이 점점 깊어지고 있구나.’

공청훤은 한이와 달리 호족을 상대로 뭔가 느끼는 게 있는 듯했다.

공청훤에게는 신인 시절의 감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황지호는 한참 중요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해괴한 소리를 했다.

“지상에서 입수한 용살의 무기 그람(Gram)은 조의신에게 줄 예정이다. 이견은 없겠지?”

“물론이다. 용족의 은인에게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무기의 소유권을 나한테 준다는 중요한 이야기를 왜 나를 빼고 정하는 것인가.

황룡이 저렇게 대답하는 바람에 마치 저게 기정사실인 것처럼 들렸다.

이 자리에 황지호만 있었다면 그냥 대놓고 ‘됐어.’라고 답했을 텐데, 황룡한테까지 너무 편하게 말하는 것 같아 그러지 못했다.

“도착했다.”

문 앞에 선 나는 까마귀 가면을 쓰고, 광림을 발동시켜 체격을 감췄다.

내가 준비를 마친 걸 확인하자 황룡이 구름을 불러 벽면 한쪽을 유리로 바꾸었다.

컴컴하고 좁은 밀실 안, 나비 하나가 희미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나비는 날개를 접고 가만히 이쪽을 보았다.

‘기다리고 있었구나.’

나비령의 권속은 아무리 견고한 감옥에 가두어도 꿈과 현실의 경계를 통과해 빠져나갈 수 있다.

꿈마저 가두는 결계 안에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황룡의 이능에 꿈을 봉하는 능력은 없었다.

저 권속은 나비령의 의지로 남아 있다.

[기다리고 있었다. 황호, 황룡 그리고…….]

나비령의 권속이 나를 바라봤다.

권속의 입을 빌려 나비령이 계속 말했다.

[어둡고 참혹한 별이여, 또 만났네. 가면 같은 걸 쓰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알아볼 수 있는데.]

석촌 호수에서 까마귀 가면을 쓰고 마주친 적이 있긴 하지만, 나비령은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걸까.

다른 사람과 나를 헷갈린 건 아닐까?

[아직 당신한테 소중한 게 있어?]

나비령은 저번에 봤을 때와 같은 소리를 해 댔다.

나비령은 황지호 대신 자신에게 협력할 것을 권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이상한데. 당신한테 소중한 게 있어?

저 영문 모를 소리를 또 하는 걸 보니 나비령이 지칭하는 게 내가 맞는 것 같다.

대체 나비령은 나를 뭘로 보는 건가.

소중한 게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이번엔 어둡고 참혹하다는 수식어를 붙이기까지 했다.

내 신상을 알아내 이명, 이능파의 색, 가정환경을 조사하기라도 한 걸까?

그래 봤자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할 답변은 바뀌지 않았으므로 굳이 번거롭게 입을 열지는 않았다.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접족. 내놓을 정보가 없으면 썩 꺼지도록.”

[후후후, 무서워라. 급하기도 하지.]

황지호가 여차하면 나비령의 권속을 박살 낼 기세로 말했다.

나비령은 엄살을 떨고는 흑막이 용궁에 개입한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시기나 자세한 방법은 파악하지 못한 내용이었으나 대부분 짐작한 대로였다.

이야기의 끝에서 나비령은 마음에 걸리는 말을 했다.

[용새를 가져가진 못했지만, 용새를 만져 볼 수는 있었어. 이 나비는 그분께서 무녀들도 모르게 특별한 진(陣)을 새겨서 말이지. 형태나 감각은 전부 그분께 전해졌어.]

“그렇다면 여기에서 나누는 대화도 전해지겠군.”

[그분은 몹시 신중해. 원하는 걸 얻자 곧바로 이어진 진(陣)을 파기하셨어.]

나비령의 말을 잠자코 듣던 황룡의 표정이 흐려졌다.

흑막이 용족에게 다시 위해를 가할 것이라는 건 상정한 대로였다.

용새의 정보가 새어 나간 걸 알게 됐으니 수를 둘 수 있게 되었다.

[그분께서는 계약을 빌미로 마족을 굴복시켰지. 덕분에 마계에 파견한 그분의 심복이 돌아왔어.]

“저번보다 입이 가볍군. 무슨 꿍꿍이냐.”

[후후후, 물론 내 안위와 꿈을 저울질한 결과지.]

나비령은 다소 위험해지더라도 정보를 흘려야 흑막의 계획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래서 황지호와 접선하기 위해 권속을 남긴 거다.

‘나비령이 흘리는 힌트는 마계 시나리오와 연관이 있어. 마족을 꽤 처리하고, 절흑풍림과 사전 교섭을 하고, 언령을 사용하는 이가 남아 있는데도 난이도가 오를 것 같아.’

머리가 아파졌지만,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말을 주고받는 사이 나비령의 권속이 뿜는 빛이 약해졌다.

흑막이 나비령을 부르고 있는 듯했다.

지금 흑막의 앞에 가면 용궁에 권속을 남긴 걸 발각당할 위험이 있었다.

나비령은 주저 없이 권속을 지워 버렸다.

[그렇다면 안녕히.]

“멈춰라. 아직 들어야 할 게…….”

황지호는 나비령의 안위 따위보다 정보를 우선시해 붙잡으려 했지만, 나비령의 권속은 미련 없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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