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83)
97. 용행호보 (14)
바닥에 남은 나비 비늘 조각도 허공에 녹아들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황지호는 짜증을 냈고, 황룡은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탄식했다.
“용궁과 지상에 위기가 닥치겠구나.”
“한탄할 틈은 없다. 용새의 정보가 새어 나갔으니 대책을 세우도록.”
“그만 약한 소리를 했군. 적의 존재를 안 이상, 허술하게 대응할 생각은 없다.”
나비가 사라졌으니 더는 이곳에 볼일은 없다.
황룡과 황지호는 그대로 배신자들을 고문하던 장소로 돌아갈 생각인 듯했다.
‘지금 황룡에게 말하는 게 좋겠어.’
나는 곧 용궁을 떠난다.
다른 용들이 없는 자리에서 황룡과 대면할 자리를 만드는 건 어려울 거다.
황지호가 옆에 있긴 하지만, 촉룡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선 지금 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잠시만요.”
황룡과 황지호가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존댓말을 썼으니 황룡에게 말을 걸었다는 걸 알 거다.
“말씀드릴 게 있어요.”
“말해 보렴.”
황지호는 자리를 비울 생각은 없는지 가만히 상황을 지켜봤다.
촉룡은 내게 부탁을 할 때 ‘다른 용이 없는 자리에서 전해 다오.’라고 덧붙였다.
황지호는 용이 아니니까 괜찮을 거다.
“수정궁에 관해서예요.”
수정궁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황룡의 얼굴이 흐려졌다.
동해의 광덕왕 오광.
서해의 광순왕 오흠.
남해의 광리왕 오윤.
북해의 광택왕 오순.
이 네 명을 묶어 사해 용왕이라 부르는데, 이들이 승천하기 전에는 수정궁에 머물렀다고 한다.
하나 이곳 용궁에는 다섯 용의 궁은 있어도 수정궁은 없었다.
“촉룡에게 들었나 보구나.”
“네.”
“촉룡에게 어디까지 들었느냐.”
“다른 용에게는 비밀로 수정궁을 관리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용궁의 결계 밖에 있는 수정궁을 관리하기 위해서 많은 힘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도요.”
촉룡의 부탁은 다음과 같았다.
황룡이 수정궁 관리를 그만두도록 전할 것.
홀로 오방색의 용의 이름이 붙은 용궁과 수정궁을 지키는 황룡의 부담은 몹시 클 것이다.
촉룡은 사해 용왕 중 하나와 연을 맺은 자로서 황룡이 수정궁을 놓도록 권하려 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청룡이 아니라 나를 통해 말을 전하려는 게 뭔가 이상했지.’
촉룡은 다른 용족들이 없는 자리에서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수정궁 안건은 다른 용이 알면 매우 곤란한 사항인 듯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별거 아닌 듯한 이 부탁에는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촉룡은 내가 수정궁 관리를 그만두기를 바라나 보구나.”
“네.”
“용족의 은인이 하는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다만…….”
“호족의 은인은 부탁한 게 아니라 그저 촉룡이 하는 말을 전한 것뿐이다.”
딱히 은인 행세하면서 황룡에게 뭔가 강요할 생각은 없다.
말은 전했으니 그걸로 되지 않았나?
촉룡과는 우호적인 관계이지만 황룡이 하기 싫은 짓을 억지로 하게 할 만큼 의리가 깊진 않다.
황룡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용족의 은인에게라면 말해도 좋겠지.”
“이 자리에는 이 몸도 있다는 걸 잊지 않았겠지?”
“황호, 자네와 나는 닮은 구석이 있다. 친우를 아끼는 너라면 분명 나를 이해할 것이다.”
황호는 닮은 구석이 있다는 말에는 별로 동의하는 것 같지 않았으나, 친우를 아낀다는 말엔 불만이 없어 보였다.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도 같긴 하다.
황호가 침묵한 것을 보고 황룡이 말했다.
“먼저 묻지. 지상에 사해 용왕과 같은 오씨 성을 쓰고, 가문의 상징으로 용을 사용하며, 구성원들은 인간의 기준으로 탁월한 능력을 타고났고, 상당한 수준의 부와 명예를 얻은 집안에 관해 아는가?”
오씨 성을 쓰는 집안.
용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곳.
탁월한 능력을 가진 구성원.
월등한 수준의 부와 명예.
그 단서를 듣자 한 집안이 떠올랐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집안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그 집안은 장수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확실해졌다.
황룡은 오혜지의 가문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씨 성을 쓰고, 구성원인 오혜지는 은광고에서 최상위권에 속할 만큼 뛰어나고, 4대 재벌 중 하나인 주오 그룹의 한 축이다.
또한, 그들이 용을 상징으로 쓴다는 건 대한민국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다.
주오 그룹이 가지고 있는 야구단 이름이 ‘주오 드래곤즈’ 아닌가.
‘오씨는 비교적 흔한 성씨고, 스포츠 팀 이름에 드래곤즈가 들어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이야. 그래서 주오 그룹이 용족과 연관되어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아마 사정을 모르는 용족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그리고 오씨 집안 사람들은 오래 살지 못한다.
불현듯 주수혁의 친척, 주수겸이 ‘주오의 난’을 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근본적인 원인은 ‘오씨 집안의 불운’이다.
―오씨 집안에는 유독 단명하는 이들이 많다. 그중에는 주오 그룹의 차기 총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씨 집안에서는 손이 귀하다. 거기에 급사하는 인물들이 많아 명줄도 짧으니 이사회에서는 아무도 오씨를 요직에 올리고 싶어 하지 않아. 오씨를 제외하고선.
황지호는 그룹 총수이니 지금 황룡이 어느 집안을 가리키는지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황지호의 눈치를 보니 알고 있던 것 같진 않았다.
오씨 집안이 용족과 관계가 있다는 건 호족도 알지 못한 듯하다.
아니, 지금 상황을 보니 오씨 집안은 용족과 관계가 있다기보다는 사해 용왕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사해 용왕과 ‘오씨 집안의 불운’ 사이에 관계가 있나 보군요.”
“그렇다.”
황룡이 긍정한 후, 말을 이었다.
“이계 충돌이 일어난 직후, 여러 바다에 흩어져 있던 용들은 바로 만나지 못했다. 그사이에 수정궁이 공격당해 궤멸 상태에 놓였다.”
“용왕신이나 다른 용족들은 도울 수 없는 상황이었나요?”
“변한 현세에 적응하고, 용왕신이 강림하시는 용궁을 지키기에도 벅찼지.”
황룡의 목소리에서 죄책감이 묻어났다.
사해 용왕을 돕지 못한 과거를 후회하는 듯했다.
용궁이 이토록 드나들기 어려운 심해 속에 숨겨져 있고, 폐쇄적으로 유지되는 건 수정궁 사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해 용왕은 용족의 총의와 별개로 이 사태에 직접 대응하기로 했다.”
“대응이요?”
“새로운 수정궁을 세우고 용을 섬기는 대가로 한반도의 인간과 계약하여 그들의 피와 살을 나누어 주고 부와 명예를 약속했다.”
설마 오씨 집안은 용의 피와 살을 먹은 자가 세운 건가!
대략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이해했다.
진족의 힘은 지명도에 갈린다.
만약 한반도의 강력한 집안이 사해 용왕을 섬긴다면, 사해 용왕의 힘은 상승할 것이다.
그들은 피와 살을 주고서라도 수정궁을 재건하고 싶었던 거다.
그렇다면 왜 이 사실은 용족 사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걸까.
“피와 살을 주면서까지 인간과 계약하다니. 치욕스럽군.”
그 의문은 황지호의 저 말로 풀렸다.
저 계약은 진족에게 있어서 불명예스러운 내용인 듯했다.
그래서 용족 중에서도 당사자인 사해 용왕과 촉룡, 황룡만 알고 있었던 걸까.
“사해 용왕은 그 인간에게 오씨 성을 주고, 부와 명예를 약속했다. 계약은 순조롭게 이행되었고, 신격이 상승한 그들은 하나둘씩 승천했다. 하지만 마지막 사해 용왕이 승천한 후, 문제가 발생했다.”
사해 용왕 중 마지막으로 승천한 건 염준열의 외할아버지 되는 용이다.
그 용이 승천한 후, 계약에 문제가 발생한 거다.
뒷말을 듣지 않아도 무슨 내용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르고, 계약을 상기시킬 사해 용왕이 없어지자 오씨 집안은 계약을 잊었다. 수정궁은 방치되었고, 그들은 더는 사해 용왕을 섬기지 않는다. 그 잔재로 가문의 상징에 용이 남았을 뿐이지.”
사해 용왕과 직접 계약을 나눈 인간은 죽었고, 대가 이어지며 계약을 잊었다.
선대로부터 계약에 관해 들은 후계자가 이를 소홀히 여겼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제대로 이행하려 했으나 다른 구성원들이 반대하여 포기했을 수도 있고, 이행 중에 정적에게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
선대의 약속이 후대까지 이어지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주오 그룹의 한 축인 오씨는 유독 잡음이 많았지. 후계자 싸움 중에 계약에 관한 건 흐지부지됐을 수도 있다.”
“인간의 사정이 복잡한 건 안다. 그러나 그들과 사해 용왕은 무거운 약속을 나누었다. 용의 의지와 관계없이 계약 불이행에 따른 대가를 받아 가게 될 것이다.”
오씨 집안이 의도적으로 사해 용왕과의 계약을 어겼는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대로 가다간 영문도 모른 채 대가를 치르게 생긴 이들이 있다는 거다.
‘오혜지나 오혜정은 사해 용왕과 나눈 계약에 관해 전혀 모르겠지.’
플마고 속에서 오혜지는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에서 죽는다.
오혜정은 제대로 이름이 나오지도 않고, 환몽 경매 때 사월세음을 구출하다가 죽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이유로 이미 죽어 버렸으니 ‘오씨 집안의 불운’과 속사정에 관해 언급될 틈이 없었다.
기껏 두 사람을 구했더니 알 수 없는 요소로 단명할 처지에 놓였다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관리를 그만두면, 내 친우인 사해 용왕이 지키고자 한 수정궁은 어찌 되겠느냐. 그리고 수정궁이 무너지면 오씨 집안은 더욱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황룡은 수정궁 관리를 그만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황룡이 계속 큰 부담을 짊어지는 것도 그렇고,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수명이 걸려 있다.
이 상황을 그저 두고 볼 수 없었다.
오혜지와 오혜정.
오씨 집안의 불운.
사해 용왕과 나눈 계약.
황룡과 수정궁.
이들에 관해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촉룡은 당신을 생각해 그저 수정궁 관리를 그만둘 것만을 청했어요.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제가 개인적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제안할 게 있나 보구나.”
황룡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황지호는 입을 다물고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봤다.
나는 내가 떠올린 수에 관해 전하기로 했다.
“네,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 * *
김신록의 고문은 용궁에서 하루를 더 보내기 전에 무사히 끝났다.
전 유황의 무녀가 길게 버티자 청룡과 용들이 고문하는 장소의 시간을 왜곡시켜 고문 시간을 늘렸다고 한다.
시간 왜곡은 가든에서나 가능한 줄 알았는데, 용궁에서 용족들이 힘을 합쳐도 할 수 있는 듯하다.
전 유황의 무녀가 나비령과의 접선 방법, 시간, 시기 등을 토해 냈기에 이를 붉은 사자 팀 빌딩 보안 강화에 활용할 예정이다.
“나는 지상으로 향하나 다른 용들은 용궁에 남을 걸세.”
전 무녀들을 감시하기 위해 왔던 다섯 용은 황룡 곁에 남기로 했다.
용궁의 무녀가 전 홍의 무녀 하나밖에 없는 상태인데 이 난리 통을 황룡에게만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청룡도 사실 남아서 황룡에게 도움을 주려 했다.
그러나 용궁으로의 전이가 가능한 황룡, 청룡 중 하나는 지상에 남아 있는 게 좋다는 의견을 따라 돌아가기로 했다.
“황룡 님! 금방 또 놀러 올게요!”
새롭게 무녀가 된 네 사람도 지상으로 향할 것이다.
이들은 지상에서 용족을 도와 엉망이 된 용왕신의 무녀 체계를 점검할 예정이다.
윤여랑이 금방 놀러 오겠다는 말에 황룡이 다정히 답했다.
“그래, 다음에는 편하고 쉽게 놀러 올 수 있게 하마.”
황룡은 윤여랑을 시작으로 지상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유독 김신록과는 길게 말을 나눴다.
옆에서 실실거리는 용제건을 잘 챙기라는 내용 외에도 이능파 링크 당시 사용한 문양을 두고 조언을 하는 듯했다.
‘그때 이능파 링크를 하면서 뭔가 느낀 게 있는 걸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어떤 조언을 했는지 김신록에게 들어 보는 것도 좋겠다.
마지막으로는 내 차례가 되었다.
“네게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은혜를 입었다. 이 용궁의 반 이상이 네 것이기도 하니 다시 찾아 다오.”
“네?”
“그렇다면 전이를 시작하지.”
적룡궁, 백룡궁, 흑룡궁을 나한테 주네 마네 하는 건 분명 거절했던 것 같은데 왜 당연한 듯이 ‘네 것’이라고 칭하는 거지?
황룡의 말에 뭐라 답할 틈도 없이 주변에 이능파가 넘치기 시작했다.
청룡이 기다린 것처럼 힘을 발산하기 시작했는데, 노리고 있던 것 같다.
뭐라 사양의 말을 하려 했지만 강렬한 힘의 파동에 묻혀 소리가 잘 전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적호가 쓸데없는 걸 떠넘겼다며 큰 소리로 험한 말을 쏟아 내는 건 아주 잘 들렸다.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겠다.”
굉음 사이에서 들린 황룡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용궁과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적호의 말대로 쓸데없는 걸 떠맡긴 했으나 용궁 붕괴 시나리오는 완봉했다.
용과 호랑이들과 함께 아쉬움 없이 당당하게 지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