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88화 (788/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88)

98. 송사 (5)

주수겸을 만나러 가는 길에 교사 여럿을 마주쳤다.

가장 먼저 마주친 건 공중 정원을 확인하기 위해 상인관 옥상으로 달려온 임연화였다.

임연화는 우기환 일당이 만든 티저 영상을 확인한 후 말했다.

“졸업 안 할 거야? 다시 고1부터 시작한다고?”

“네! 승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승부도 하고 미로랑 같은 학교 다녀야 됩니다!”

우기환과 정해수가 진지하게 개소리로 답했다.

저 두 선배놈이 은광고의 수많은 학생들을 제치고 졸업식에서 상을 받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임연화 역시 저들 못지않게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기에 걱정이 되었다.

승부를 해서 이기지 못하면 재입학 금지라고 할까?

아니면 순순히 재입학을 받아들여 승부를 계속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난리가 날 게 분명했다.

“그럼 다음 승부는 3년 뒤에 하겠구나.”

“네……?”

임연화는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했다.

임연화의 표정은 평소처럼 자애심이 넘쳤지만, 말하는 내용은 한없이 냉정했다.

“선생님은 성장하지 않는 자, 멈춰 있거나 퇴보한 상대와는 안 싸워. 결과가 똑같거나 더 비참해지잖아.”

졸업생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막 졸업했는데 1학년으로 돌아가겠다는 건 빼도 박도 못하는 퇴보였기 때문이다.

“재입학하겠다면 말리지 않을게. 대신 졸업할 때까지 상대하지 않을 거야. 적어도 졸업생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겠니? 자, 그럼 선생님이랑 졸업 기념 사진 찍자!”

임연화는 귀여운 제자들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앞으로 졸업할 때까지 상대할 마음은 없는 듯했다.

임연화가 열심히 돌아다니며 셀카를 찍는 내내 우기환 일당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얼어 있었다.

저 꼴을 보니 우기환 일당은 무사히 졸업할 것 같다.

뒤늦게 서운함이 밀려온 건지 내가 옥상을 벗어날 때쯤에는 우는 바람에 근손실을 일으키는 선배놈이 속출했으나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큰 싸움 없이 마무리됐다. 정신적으로도 임연화가 완승이네. 우기환 일당은 아직 멀었다.’

상인관 앞으로 가자 사진을 찍는 졸업생들과 교사, 그 가족들로 사람이 넘쳐났다.

그중에서도 유독 사람이 많은 곳이 눈에 띄었다.

졸업생들에게 포위된 교사가 있기에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인가 싶어서 봤더니 김신록이었다.

“신록 쌤…… 스승의 날에 와도 돼요?”

“물론 좋지.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면 바빠질 거야. 그때 가서 괜히 지금 한 약속을 지킨다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

“김신록 선생님…… 저는 대학 안 가고 프로 플레이어 팀에 들어가니까 와도 되죠?”

“물론이야. 그래도 언제 이계가 발생할지 모르는데, 네 시간을…….”

졸업생들은 졸업 후에도 구질구질하게 굴겠다는 의사를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었고 김신록은 무의식적으로 선을 긋고 있었다.

김신록은 제자를 보내는 서운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있었지만, 아이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에 물기가 차서 다 들켰다.

김신록의 제자 노릇을 하며 눈치를 키운 졸업생들은 이를 알아채고 울먹거렸다.

‘이 정도 되면 매년 스승의 날마다 난리가 날 것 같다. 그래도 김신록 주변은 꽤 잠잠하지 않았나?’

김신록의 유일한 친구가 이 의문을 풀어 줬다.

“신록이 제자들이 졸업 후에 모임 갖고 있는 건 알지? 거기에 행동 강령이 있으니까 확인해.”

그런 모임도 있었다니!

아마 김신록의 옛 제자들은 그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모임을 갖고 규칙을 정해 행동하는 듯하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에선 전무영이 김신록 제자인데, 그 모임에 가입해 있지 않을까?

“물론 알죠. 용쌤, 일단 와서 같이 사진 찍어요!”

“승천한다고 하셔서 졸업식에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승천 안 하기로 했어.”

“대체 갑자기 왜 마음을…… 아, 아니에요. 안 물어볼래요.”

용제건이 보기 드물게 상쾌히 웃으며 말하자 졸업생들이 식겁하며 이유를 묻지 않았다.

당장 달아날 줄 알았으나 졸업생들은 용제건과 사진을 찍으며 버텼다.

특히 체스 소모임 스테일메이트 출신 졸업생들은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용제건이 불길한 기운을 발산할 때에는 너도나도 도망친다고 하지만, 일단은 저렇게 학생들이 몰릴 만큼 인기가 좋은 교사긴 했다.

용제건과 사진을 찍은 졸업생들이 물었다.

“용쌤, 사직서 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요.”

“응, 냈어.”

“안 잘렸어요?”

“이사장님한테 확인해 봤는데, 사직서 수리를 안 했대. 신입부터 다시 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는데 아쉽게 됐어.”

신입인데 n천 살에다가 수십, 수백 년 경력을 지닌 유희계 용족 교사!

상상만 해도 다른 교사들의 스트레스가 엄청날 것 같다.

용제건이 저리 얄밉게 굴었는데 황지호가 사직서 수리를 안 한 건 다른 교사들 때문일 거다.

특히 신입이 되면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 달라며 김신록을 귀찮게 굴 게 뻔하니 후예를 지키기 위해서도 그런 선택을 했을 듯하다.

“0반 부담임 자리를 노렸는데 아쉽게 됐구먼.”

“허허. 화백님, 아직도 노리고 계셨습니까?”

“자네도 노리지 않았는가.”

가까이에서 그 대화를 듣고는 홍경복 화백과 탁거산 도인이 아쉬움을 표했다.

둘 다 아직 부담임 자리를 노리고 있었나?

두 노인 주변에도 학생이 여럿 보이는 게 우리 반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여도 다른 학생도 잘 챙긴 듯하다.

“시완이 형, 졸업 축하드립니다.”

주변에서 음침하고 짜증 나는 기운이 느껴진다 싶었더니 ‘계’새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김신록이 있고, 김신록은 지익회 고문이다 보니 지익회 사람들이 와 있었나 보다.

‘계’새끼는 꼴에 지익회장이라고 지익회 대표로 성시완에게 꽃을 건넸다.

“축하해 줘서 고마워.”

성시완은 꽃을 잔뜩 받아 들 손이 없었지만, 기쁘게 꽃다발을 받았다.

받았다기보단 꽃 더미에 새로 얹었다고 표현하는 게 나을 거다.

“시완이 형…… 졸업 축하해요. 자주 놀러 오세요…….”

“그래, 자주 놀러 올게.”

“뭘 울고 그래. 말 안 해도 오시겠지.”

정 많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박승현이 펑펑 울며 인사하자 성시완과 김현구가 어깨를 두드리며 달랬다.

박승현이 지익회에 들어가지 않는 플마고에서도 성시완과 연이 있었다.

전 지익회장이 박승현에게 전서구 아이템을 건네며 괴롭힘을 당할 때 부르라고 한 묘사가 있었지만, 그 전서구 아이템은 건넨 인물이 사망할 때까지 쓰이지 못했다.

게임 속에서는 성시완의 사망으로 둘의 연이 끊어졌으나 이 세계에서는 졸업 후에도 좋은 선후배 관계로 남을 것이다.

“으…….”

그 광경을 보던 ‘계’새끼가 보기 흉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설마 저놈도 울려고 하는 건가?

저놈의 회상 덕에 안다인의 부모를 찾을 힌트를 얻지 못했다면, 스킬을 쏴서라도 멈추게 했을 거다.

가지가지 한다 싶어서 무표정으로 쳐다봤더니 눈이 마주쳤다.

정신이 든 건지 우는 짓은 멈췄다.

더 보고 있기 싫어서 고개를 돌리고 갈 길을 갔다.

‘걔들은 유상희를 찾으면 연락한다고 했는데, 아직 못 찾았나 보네.’

같이 온 애들하고는 나중에 합류해 유상희와 사진을 찍을 때까지 개별 행동을 하기로 했다.

도시후는 은광고에 도원우 외에도 아는 사람이 꽤 있었고, 유상훈은 농구부 선배를 보러 간다고 했다.

장남욱은 도시후와 같이 행동하기로 했으니 셋으로 나뉜 셈이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대상 캐릭터의 광림, ‘그림자 없는 시간’을 사용합니다.〉

은휘관 방문객이 주로 이용하는 은광고 VIP 전용 주차장에 가까워지자 전무영의 광림을 사용했다.

주수겸과 만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싶었다.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주수겸이 은광고 졸업식 참석을 위해 이곳에 온다면,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수겸은 4대 그룹 암투 시나리오의 주요 인물일 거야. 나와의 관계성을 최대한 숨겨 둬야 수를 두기 쉽겠지.’

지금 하려는 일이 그 암투 시나리오와 얼마나 관계가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주수겸이 지정한 층수의 주차장에 들어가 좀 걷다 보니 검은 몸체의 플레이어카가 보였다.

주수겸이 수능 날에 오혜지를 태우고 왔던 그 플레이어카였다.

위잉.

사전에 말한 대로 차문이 열려 있어 손잡이를 잡자 바로 열렸다.

안에는 운전석에 앉아 있는 주수겸밖에 없었다.

플레이어카 뒤에 시동을 껐으나 인기척이 느껴지는 세단이 있었는데, 그쪽에 비서와 경호원이 타고 있나 보다.

“안녕하세요.”

광림을 해제하고 주수겸에게 인사하자 메마른 표정으로 답했다.

“놀랍군. 나타날 때까지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표정만 봐서는 전혀 놀란 것 같지 않았다.

잘 웃고 감정 표현이 풍부한 주수혁과 피가 이어졌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흑림의 검성이 쓰는 은신술보다 한 수 위군. 같은 검은색 이능파를 쓰는데, 네게 말을 걸지 않았나?”

흑림의 검성과 주수겸은 연이 있나?

둘 다 나이가 비슷하고, 검을 다루는 은광고 출신 플레이어이므로 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따지고 보면 흑림의 검성이 주수겸의 후배인데, 0반 후배로 흑림의 검성이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좀 아찔했다.

흑림의 검성이 벌인 짓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선배 중에 쌍검의 고수가 있다고 하면 무림인으로서 비무를 청하러 다닐 게 뻔했다.

“그분께 연락처를 받았어요.”

“역시.”

주수겸이 피식하고 아주 작게 웃었다.

감정이 증발한 주수겸도 0반 후배놈 생각에는 조금 웃음이 나나 보다.

“혜지와 오혜정에 관한 일로 말할 게 있다고 했지. 듣겠다.”

왜 오혜지를 부를 때는 성을 떼고 부르는 건가.

욱한 기분이 들었으나 지금은 주수겸의 협력이 필요했다.

주수겸이 거부하면 주수혁이나 황지호에게 부탁해야 하는데, 그 둘이 오씨 집안에 개입하는 건 아주 힘들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정확하게는 ‘오씨 집안의 불운’에 관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는 사해 용왕이 오씨와 맺은 계약에 관해 설명했다.

피와 살을 먹은 오씨의 선조로 인해 오씨들은 계약의 영향을 받았고, 계약을 잊고 수정궁을 방치하는 한 오씨들의 불운은 계속될 것이라는 게 설명의 요지였다.

“계약을 끝내는 건 가능한가?”

“어렵겠죠. 사해 용왕은 승천했고, 이미 하나가 된 피와 살을 돌려줄 수 없으니까요.”

“어렵다는 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뜻이겠군.”

주수겸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내가 무슨 의도로 이 말을 꺼낸 건지 이미 전부 파악하고, 수단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사해 용왕은 승천했다고 하나 용왕신을 섬기죠. 용의 힘은 용왕신과 이어져 있어요. 용왕신은 무녀를 통해 현세에 개입할 수 있으니, 계약의 조정과 중재를 부탁드릴 수 있을 거예요.”

“네가 용왕신에게 중재를 부탁드린다는 건가?”

“네.”

주수겸은 사무적으로 되물었다.

“우선 오씨 집안의 계약에 관해 조사해 보겠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말씀하세요.”

“너는 출신상 용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안다.”

주수겸이 저 말을 하는 의도를 알아챘다.

고작 은광고의 학생인 내가 용왕신을 끌어들여 중재를 한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주수겸의 의심은 당연했다.

그래서 직접 보자고 한 거다.

“직접 뵙자고 한 건 이걸 보여 드리기 위해서예요.”

나는 용궁을 떠나기 전, 용왕신이 내게 준 아이템을 꺼냈다.

UR+급의 ‘용왕신의 비늘’이었다.

용왕신에서 역린에서 가장 가까운 귀한 비늘로, 용제건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주수겸은 이 아이템 카드를 보자 납득한 듯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의문이 남았는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귀중한 아이템의 존재를 드러내면서까지 개입하려는 이유가 뭐지?”

“두 분을 자유롭게 해 드리고 싶어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오혜지, 사월세음의 가족이 될 오혜정을 생각하면 내가 나서는 건 당연했다.

물론, 용족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오씨 집안 분들이 두 분께 혼사를 강요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짧은 수명 때문이죠. 계약의 중재로 그 이유가 사라졌으면 합니다.”

“나는 그런 이유를 물은 게 아니다만.”

다른 이득을 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한 건가?

내가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자 주수겸이 말했다.

“알았다. 확인 후 다시 연락하지.”

여전히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투가 처음보다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하다.

“너 같은 아이가 수혁이 친구라서 다행이군.”

주수혁의 친구라니, 나야말로 다행이고 영광이고 과분하다.

주수겸도 저렇게 굉장한 타이틀 히어로를 육촌 동생으로 둬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주수겸과 인사를 마친 후, ‘플레이어의 궤적’을 발동해 몸을 숨기고 주차장을 걸었다.

“원우야.”

한층 올라갔을 때, 유상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에 올라타려던 도원우가 뻣뻣하게 굳어 유상희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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