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95)
99. 새로운 1학년 0반 (6)
은광고 거주 구역, 1학년 건물의 17층.
은호는 기숙사 오리엔테이션에 불참하고 곧바로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조의신이 사용하던 기숙사 방이었다.
‘여기가 의신이 형이 쓰던 방이구나.’
기숙사 방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학생이 퇴실한 후, 필요하면 벽지, 장판 교체 등의 리모델링을 해 모든 방이 깨끗하게 유지되지만, 조의신의 방은 딱히 뒤처리할 게 없었다.
조의신의 이삿짐이 얼마 없었다는 황호의 말을 듣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플마고 설정집을 제외하면 눈에 띄는 물건 없이 말끔하게 정리된 조의신의 고시원 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몸이 가벼우면 그만큼 저택으로 모시기 쉽겠지.’
은호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짐을 정리한 후에는 천동하가 보낸 메시지에 답을 했다.
남은 시간에는 옛 시대의 연표를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하려 했는데, 다른 생각이 차올랐다.
신입생 입학 선서를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갈 때, 눈이 마주쳤던 은서호와 은이호에 관해서였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적호가 두 후예의 사진과 영상을 자주 보여 줬기에 둘의 생김새는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가까이에서 마주치면 동요할지도 모르니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막상 교실에서 마주쳤을 때에는 담담한 기분으로 있을 수 있었다.
‘내가 저 아이들의 조부일 자격이 없어서인가.’
당연한 소리지만, 은서호와 은이호는 은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용제건도 은호의 모습을 보고 진족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백 년도 살지 않은 미숙한 후예 둘이 알아볼 리가 없었다.
물론 인식하기는 했다.
1학년 0반 교실에서 천은하의 모습을 한 은호를 본 후예들은 후다닥 달려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지 않아!
―승부하자!
자신과 승부를 하기 전에 차석부터 꺾고 와야 하지 않을까?
저들은 0반이 아닌 차석은 라이벌로 취급하지 않는 건가?
은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온화하게 웃으면서 ‘응, 알았어.’라고만 답했다.
그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진 탓에 은서호와 은이호는 더욱 분해하고, 투지를 불태웠다.
흔들림 없이 그 상황에 대처했는데, 이상하게도 자꾸 두 후예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도 붙이지 못한 아이도 같이 생각이 났다.
기억에 새겼던 그 아이의 얼굴은 세월 탓에 흐려졌다.
그러나 옥토연의 말에 의하면 저들의 외모는 어머니와 닮았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멋대로 머릿속에서 얼굴을 그렸다.
은호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
창문을 열고 찬바람을 맞으니 머리가 식었다.
‘입학 첫날부터 의신이 형이 학생을 구했다고 했지.’
1년 전 오늘 이 자리, 조의신은 자신의 힘이 드러나는 걸 각오하고 권레나를 구했다.
입학 첫날에는 조의신의 힘이 지금에 비하면 별로 성장하지 않았고, 협력을 구할 상대도 많지 않았을 텐데 망설임 없이 나선 걸 떠올리니 쓴웃음이 나왔다.
“안녕?”
은호 외에도 밤바람을 맞는 중인 학생이 있는 듯했다.
옆을 돌아보니 플마고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였던 인물이 있었다.
저 학생의 이름은 차석원.
입학 성적이 은호 다음으로 좋았던 학생이었다.
“입학식에서 선서한 천은하지? 옆방인 건 지금 알았어. 나는 1반 차석원이야.”
차석원이 은호의 옆방에 배치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황호와 김신록의 힘을 빌린 결과물이었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이므로 조의신이 사전에 사건을 없애 버리지 않는 한, 중요한 시나리오에 연루될 것이다.
하지만 반이 갈렸기에 은호는 그를 감시하고 관찰할 겸, 기숙사 옆방에 그를 두기로 했다.
‘차석원은 실기에서 만점을 받았다고 했지. 필기 성적도 상당히 좋아.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괜찮아 보여.’
체격은 좋은 편이나 인상이 순한 편이고, 붙임성 있는 태도를 보여 말을 걸기 쉽게 느껴졌다.
플마고 대로라면 0반에 배치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이 정도면 일반반에 배정해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은호도 차석원 못지않게 사교성이 느껴지는 태도로 답변했다.
“옆 반이네. 앞으로 잘 부탁해. 이능파 반응이 느껴지는데, 뭐 하고 있어?”
“아, 방 안에 간이 실험실을 차리고 있었어.”
입학 첫날에 방에 간이 실험실을 차린다고?
은호는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0반에 갈 뻔한 학생답다고 생각하며 납득했다.
은호는 부드러운 어조로 알고 있는 정보를 전달했다.
“서류를 제출하면 연구동 구역의 실험실을 빌릴 수 있어. 연구동 구역만큼 설비가 갖춰져 있지 않지만, 지익회관에도 있다고 들었어.”
“아, 그래? 거기도 빌려야겠다. 은광고는 좋은 시설이 많구나.”
차석원은 실험실을 빌린 후에도 기숙사 방 안에서도 연구를 속행할 계획인 듯했다.
은호는 웃으며 대화하는 도중, 신경을 날카롭게 가다듬어 옆방의 기색을 살폈다.
기숙사 건물은 청소년의 취침 중 이능파 방출 현상에 관한 대책이 되어 있어, 벽을 통해서는 이능파가 차단되나 발코니의 창문이 열려 있었기에 안을 살피는 게 가능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실험을 하는지 파악할 수 없었으나 상당히 불안정한 기척을 감지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인화 물질이 담긴 플라스크가 알코올램프 근처에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0반 아이들은 오늘 기숙사 건물에서 사고를 칠 계획이라고 들었어. 그런데 이런 실험실이 옆에 있으면 위험하지 않을까?’
은호는 1학년 0반 신입생 사이로부터 기묘한 열기를 느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떤 책과 데이터칩을 소지하고, 그 안에 든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그 정체는 우기환 일당이 뿌렸던 우주의 기운과 0반 시절의 행적이 담긴 미친 내용의 책자였다.
여기 있는 이들은 저 책과 지난 0반의 활약을 보고 감화된 듯했다.
그렇게 감화된 자들을 하나로 모으자 사고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2학년 0반 선배들은 작년에 첫날부터 사고 쳤대.
―우리도 뭐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번에 0반 들어오기 어려웠대잖아. 역대 0반 중에선 지금 3학년이 최강 최악으로 꼽히는데, 우리가 그 타이틀 가져오자.
―최고로 뽑히는 3학년을 넘으려면 2학년과 졸업생보다 더한 걸 보여 줘야지.
그렇게 말하는 아이들의 얼굴에선 악의라곤 한 점도 없었다.
그저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저들은 의문의 이유로 문제아가 되고 싶은 듯했다.
1학년 0반 학생들은 기숙사생들을 상대로 뭔가 계획하기로 했다.
은호는 그 계획에 휘말리기 전, 적당한 이유를 대고 빠져나왔다.
마침 빠져나올 만한 이유도 있었다.
―우리 반에 아직 오지 않은 애가 있어. 길을 잃었나 봐. 찾으러 갈게.
윤여랑은 상인관에서 1학년 0반 교실로 오던 중, 길을 잃었다.
1학년 0반의 인원수를 전부 파악하고 있던 은호는 곧바로 그 사실을 알아채고 소동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빠져나왔다.
1학년 0반 아이들은 담임인 공청훤을 상대로 딱히 반항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이 일이 그를 번거롭게 할 건 분명했다.
‘이 단계에서 사건을 무마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아. 하지만 첫날부터 반 아이들의 반감을 사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설령 일 대 다수로 적대하게 된다 해도 상대는 어린 고등학생이다.
은호가 질 리는 없지만, 3년간 학교생활을 할 텐데 적을 만들어 봤자 손해밖에 발생하지 않았다.
은호는 우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모셨던 신인 공청훤이 저들의 장난질에 다칠 리가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현재 은광고의 지익회장은 계이담이라고 했지.’
은호는 계이담이 계상중이라는 이름을 쓰던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은호는 과거에 만났던 계상중을 떠올렸다.
은호는 계상중이 영원히 미지근한 행운 속에서 살아가길 원했으나 그는 어마어마한 행운을 잡아 이곳에 왔다.
자신을 지지하고 이끌어 줄 인간이 있는 세계에서 새로 인생을 시작하다니.
탐탁지 않았으나 계이담이 된 그를 적극적으로 어찌할 생각은 없었다.
초상 우주와 엮인 이상, 어쩌면 조의신이 유용하게 사용할 수가 될지도 모른다.
‘성시완에 비해 얼마나 빨리 올지 볼까.’
은호는 입학 첫날 사고가 발생하자 에어보드를 타고 날아왔다는 성시완을 생각했다.
어쩌면 계이담이 안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계이담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정당한 탄핵 사유가 될 테니 그건 그것대로 잘된 일이다.
조의신도 그의 탄핵을 원하지 않을까?
은호는 생각을 정리한 후, 차석원에게 말했다.
“방에는 안전 설비가 부족하겠다. 방어용 소모 아이템은 있어?”
“오늘은 간단한 실험만 할 거라서 따로 준비하지는 않았어.”
“그럼 내가 만든 걸 줄게.”
“오, 진짜? 나도 나중에 뭐 사 줘야겠다.”
은호는 아이템 제작이 특기였고, 만약을 대비해 여러 소모용 아이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걸 건네 두면 무슨 일이 있어도 조의신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안전할 것이다.
기뻐하는 차석원에게 인사를 한 후 은호는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약 몇십 분이 지났을 때, 옆방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 * *
호랑이 저택, 식당.
폭발 사건 수습을 마친 김신록이 도착하여 사건 경위를 듣게 되었다.
은서호와 은이호는 내내 폭발 사건에 관해 물었다.
“기숙사 애들이 뭔가 한다더니, 그거였구나!”
“그런데 왜 1반 차석은 말려든 거예요?”
“폭발은 그 학생의 방에서 일어났습니다.”
“아, 걔들이 귀신 모양 마네킹을 던진 게 그쪽이었나 보다.”
공교롭게도 폭발이 일어난 방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차석원의 기숙사 방이라고 한다.
게다가 마침 은호의 옆방이라고도 한다.
기숙사 설비가 잘되어 있어 은호는 말려들지 않았고, 차석원은 방어용 아이템을 가지고 있던 덕에 다친 곳이 없다고 한다.
그렇게 저녁 식사 시간 내내 폭발 사건 얘기만 하게 되었다.
은서호와 은이호는 폭발 사건에 연루된 아이들에 관해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은서호와 은이호가 마친 후에는 은재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자마자 간식이 나왔는데요, 엄청 맛있었어요. 어린 황호 님을 호랑이라고 부르는 애가 다른 맛을 들고 있어서 몇 개 바꿔 먹었는데요.”
은재호는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다가 처음 등교한 학교에서 있던 일을 줄줄 말했다.
은재호는 아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좀 친해진 듯 자주 언급했다.
차를 전부 마신 후에도 화제가 도통 바뀌지를 않았다.
‘이래서야 오늘 은호…… 천은하를 만난 소감을 듣긴 어렵겠네.’
0반이자 수석인 천은하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 걸까?
아이들의 마음을 생각해 억지로 은호에 관해 묻는 건 자제하기로 했다.
은재호를 시작으로 후예들이 졸려 하면서도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내일도 등교해야 한다. 설마 둘째 날부터 결석할 생각은 아니겠지.”
황호의 이 말에 아이들은 얌전히 침실로 돌아갔다.
아이들이 돌아가자 거실에는 나이 많은 호랑이만 남았다.
황지호가 불쑥 나에게 물었다.
“네가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건, 할 말이 있어서겠지. 너도 늦지 않게 자야 하니 어서 말하도록.”
황지호의 말에 오늘 줄곧 생각하고 있었으나 꺼내지 못한 말을 했다.
“성국언 선배님과 전무영 선배님께 리플레이를 쓰자고 제안하고 싶어.”
봄이 되어 성국언 암살 시나리오의 시작이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