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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03화 (803/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03)

100. 약속 (3)

MITRON은 평소보다 이르게 영업을 마친 상태였다.

일찍 문을 닫은 탓에 봄 분위기가 물씬 나게 장식된 매대 위에는 아직 재고가 남아 있었다.

‘나 때문에 닫은 건가? 이럴까 봐 그냥 밖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하지만 류장은 내 제안을 거절했다.

은광고에는 워낙 눈이 많아 방관과 침묵의 마왕, 시델렌티움이 밖에서 힘을 쓸 수 없다는 게 거절의 이유였다.

그냥 내 용건을 생각하면 류장하고만 이야기하면 됐는데, 시델렌티움은 그 광경을 직접 봐야겠나 보다.

이렇게 된 거 MITRON에서 기숙사생인 1학년 후배들에게 사 줄 간식을 골라야겠다.

‘은호, 은호와 방이 가까워 친해졌다는 차석원, 기숙사 소속인 1학년 0반, 신문부 후배들…… 생각보다 수가 많네. 너무 많이 들고 가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으니 부피가 작은 걸로 고를까.’

딸기 요거트 마카롱과 크랜베리 딸기 피낭시에 중 어느 게 먹기 편할까 고민하고 있자니 류장이 등장했다.

류장은 파티시에 복장 대신 평상복으로 입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옷을 갈아입었나 보다.

“후배들 간식을 고르나 봐요.”

어떻게 알았지?

류장이 내 생각을 꿰뚫어 봤는지 말을 이었다.

“조의신 학생은 반 친구들의 간식은 보통 아침에나 사니까요. 저녁에는 기숙사에 있는 후배들을 챙겨 줄 것 같았어요.”

그야 어쩔 수 없다.

우리 반 아이들은 오후에는 각자 선택 수업을 들으러 흩어지거나 아예 조퇴하여 할 일을 하곤 한다.

오후에 종례를 하긴 하지만, 다 모이는 일이 드물어 다 같이 간식을 먹는다면 아침을 택한다.

류장의 말이 계속되었다.

“가게를 찾는 1학년 학생들이 조의신 학생 이야기를 하는 걸 몇 번 들었어요. 선배가 사 준 간식이 맛있어서 찾아왔다고 했죠.”

후배들이 그런 말을 하고 다녔나?

다 착한 애들이라서 그런지 뒤에서도 감사의 말을 하고 다니다 보다.

후배들이 맛있게 먹었다니 사 주는 보람이 생겼다.

오늘도 꼭 간식을 사 가야겠다.

“후배들이 맛있게 먹어서 다행이네요.”

“네, 그러게요. 순전히 맛 때문이라기보다는 사 주는 사람 덕이 큰 것 같아요. 조의신 학생이 재학 중인 동안은 매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류장이 겸손하게 말했다.

아무리 내가 열심히 사 줘 봤자 MITRON의 상품이 맛없다면 여길 찾는 애들도 없을 거다.

그런 요지의 말을 했지만, 류장은 웃기만 하고 받아치지 않았다.

대신 쿠키를 몇 종류 추천해 줬다.

“쿠키의 매출도 올랐어요. 조의신 학생의 빵셔틀이 뭘 사 갔는지 물어보는 학생들이 꽤 있거든요.”

“요새 쿠키를 자주 사 가나 봐요.”

“네, 여자친구랑 만날 때마다 사 가죠.”

방윤섭은 빵셔틀을 하면서 많이 먹어서 그런 건지 제과류 쪽 입맛이 까다로워졌다.

그런 방윤섭이 매일 같이 쿠키를 사 가면 다들 흥미를 가지긴 할 거다.

그런데 류장도 방윤섭과 최영희가 사귀는 걸 알고 있나?

방윤섭이 대놓고 사귄다고 입방정을 떤 것도 아닌데 말이 금방 퍼지는 것 같다.

류장과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을 테니 고백 이벤트를 한다고 여기에서 뭘 사 갔다가 들킨 것 같긴 하다.

―왔군.

긴 복도를 지나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자 시델렌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델렌티움은 전과 다름없이 까마귀 가면을 쓰고 소리 없이 입만 움직여 말을 했다.

―용궁은 잘 다녀왔나?

말한 적은 없는데 시델렌티움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저 정도의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데, 침묵하고 방관하다니 참 아까운 짓을 하는 것 같다.

방관하고 있기에 적이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용족과 호족이 같이 움직이는 바람에 개입도 못 하고, 전말을 지켜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고 있긴 하다.

그때, 류장이 디바이스 홀로그램을 시델렌티움에게 보여줬다.

홀로그램 화면을 빠르게 눈으로 훑은 시델렌티움이 말했다.

―용궁에서 오씨와 사해 용왕이 맺은 계약의 비밀을 알아내 전한 건가? 그 비밀의 단서가 남은 곳이 습격당했군.

시델렌티움이 손짓하자 류장이 나에게도 홀로그램을 보여 줬다.

홀로그램에는 주수겸이 전했던 법률 사무소 습격 사건에 관한 기사 전문이 떠 있었다.

시델렌티움은 저 법률 사무소가 오씨 집안의 불운과 관련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나 보다.

시델렌티움은 내가 용궁 이야기를 하는 걸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해야 했다.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하러 왔어.”

―용궁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풀어 주는 대가로 무언가 요구할 줄 알았다만. 아쉽구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용궁에 관해서 말할 거야.”

만일 필요하다면 호족과 용족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선에서 정보를 풀 작정이었다.

“포모르 마족이 연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서 듣고 싶어.”

포모르 마족은 핼러윈 파티에 등장한 진족과 상위 존재의 개입을 몹시 경계했다.

그들의 경계는 지당했다.

그날 그 자리에는 마족(馬族)의 수장인 흑마와 서족의 수장인 서돌이 있었고, 수많은 켈트 신화 속 상위 존재들이 개입했다.

‘하지만 그날 사건을 움직인 건 인간이었지.’

진족과 상위 존재를 경계한 만큼, 인간에 대한 경계는 약했다.

그때 경매장에 온 인간은 미처르의 가호를 받은 괴도 네온 옹길동.

몽마의 후예 멀린의 제자 드루이디스 구슬비.

왕의 자격을 갖춘 성국언과 보좌관 전무영, 그 일행이었던 나.

그리고 까마귀 마왕의 심복인 류장.

결과적으로 경매를 뒤흔든 건 인간들이었다.

“그날 파티시에님은 경매에서 대관석을 찾아 안배를 했다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류장은 순순히 답변했다.

전에 류장과 서돌이 마주친 경위에 관한 화제를 꺼내다 시델렌티움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모리안의 부탁을 받아서 ‘리어 팔(Lia Fáil)’을 찾던 중에 마주쳤어.

―돌은 찾았어?

―그래. 내 계약자는 우수하니까,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지.

그때 류장이 대관석에 무슨 짓을 했는지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자세한 방법은 말하지 않았지만, 류장은 ‘대관석을 다누 신족에게 돌려주기 위한 안배’라고 한다.

그 방법은 류장의 광림과 크게 연관되어 있어 자세하게 묻는 건 실례라고 판단했다.

그저 대관석에 안배를 했고, 그 안배가 상위 존재의 의뢰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걸 파악하고 주의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성국언에게도 위와 같은 사항만을 전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아야 할 때다.

“그 대관석에 어떤 힘을 쓰셨는지, 현재 그 힘으로 인해 대관석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요.”

류장은 답변하는 대신 시델렌티움에게 눈을 돌렸다.

류장 혼자 판단하고 답변할 수 없는 사항인가 보다.

―이유를 듣지. 포모르 마족이 한반도에 온 것과 관련 있나?

“그자들은 왕의 자격을 갖춘 자에게 대관석을 부수어 달라고 할 생각이야. 그자가 은광구에 있다는 걸 특정 짓고 찾고 있어.”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왕의 자격을 갖춘 자는 충분히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다만.

시델렌티움은 절흑풍림의 움직임도, 성국언의 대처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저걸 다 알고도 입을 다물고 있다니 여러 의미에서 무서운 존재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까진 알지 못했을 거다.

“누군가가 그 왕의 자격을 갖춘 자를 암살하려 해.”

―한국의 국회의원을 암살해? 보통 일이 아닐 텐데.

과연 성국언을 향한 암살 시도는 모르나 보다.

시델렌티움이 모르는 정보라면 정말 은밀하고 조용히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거다.

암살 직전이라면 시델렌티움도 파악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수를 전부 확인하려는 거야.”

시델렌티움이 내 말의 의도를 가늠해 보고, 정보의 가치 등을 저울질하는 것처럼 생각에 잠겼다.

류장의 광림과 이능을 소상히 밝혀야 하니 고민될 법도 할 거다.

시델렌티움이 생각을 마치고 말했다.

―좋다. 알려 주마. 대신 조건이 있다.

시델렌티움이 내거는 조건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면 내가 각오한 것보다는 대가가 가벼웠다.

류장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능이 공개될 처지에 놓였는데도 불만이 없어 보였다.

“마왕님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조의신 학생이 마음에 드니까요. 이능 정도는 공개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류장은 내가 고른 간식들의 값을 받지 않고 덤까지 얹어 주었다.

영업 중이 아니라 돈을 받을 수 없다는 핑계를 댔는데, 그냥 주고 싶어서 준 것 같았다.

류장이 너무 손해를 보는 것 아닌가 싶어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앞으로도 후배들에게 MITRON의 제품을 많이 사 주기로 마음먹었다.

*    *    *

3월 말에 가까워지며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벚꽃이 필 시기에 맞춰 호랑이들은 작년부터 계획했던 어느 일을 진행했다.

“놀이공원에는 처음 와 봐요!”

“VR로 보는 것보다 더 게임 같고,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더 멋있어요!”

“전 저거부터 탈래요! 그런데 놀이공원에선 어트랙션을 타기 전에 줄을 서야 한다고 들었는데요.”

황명 테마파크에 온 은호의 후예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벚꽃 장식으로 가득한 이곳은 과거 남궁물산이 운영하던 잠실의 테마파크로, 무사히 오너가 바뀌어 재개장을 기다리고 있다.

아니, 재개장으로 표현하는 건 조금 다른 것 같다.

새로운 어트랙션을 구입한 건 물론이고, 기존의 마스코트를 전부 교체하는 등 거의 유원지를 새로 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한 플레이어의 이능을 감당할 수준으로 짓겠다고 이계 금속을 써 댔고, 안전에 만전을 다한다며 높은 희귀도의 결계까지 둘렀지.’

황명 테마파크는 거대한 결계로 지켜지고 있다.

한때 석촌호수의 비극이 벌어졌던 이곳은 한국에서 가장 거대한 대피소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곳곳에 보이는 호랑이 마스코트들이 마치 테마파크의 수호신처럼 보였다.

이 호랑이들을 테마파크를 위해 새로 디자인된 마스코트로, 봄에 개장하는 테마파크 분위기에 맞춰 벚꽃과 함께 그려져 방문객을 반기고 있었다.

‘저번에 반 아이들과 오긴 했지만, 그때는 여전히 남궁물산의 테마파크라는 느낌이었지. 이렇게 다 새로 뜯어고치고 온 건 우리가 처음일 거야.’

한편, 황명 테마파크의 오너, 황지호는 돈지랄을 한 보람을 느끼는지 뿌듯해하며 말했다.

“하하하! 오늘은 줄을 설 필요 없다. 아무거나 타고 싶은 것을 타도록. 단, 안전을 위해 이 몸과 함께여야 한다.”

“네!”

“황호 님, 감사합니다!”

아이들이 기뻐하는 걸 보니 나도 절로 기뻐졌다.

기뻐할 요소는 더 있었다.

왕왕!

천사가 호랑이 마스코트 장식을 착용하고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천사도 얼른 유원지를 즐기고 싶은 듯하여 안아 들었지만, 금방 딴생각이 들었다.

‘백호군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은호는 어차피 후예들이 있는 한 오지 않았겠지만, 백호군은 자의로 안 온 게 아니다.

내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신역의 수인으로서 은광구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이 테마파크는 송파구에 있으니 올 수 없다.

거의 테마파크를 새로 지은 거나 다름없으니 그냥 은광구로 다 옮기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 말을 하면 황지호가 진짜로 은광구로 테마파크를 이사하겠다고 말할까 봐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 오지 못한 호랑이들을 생각하며 후예들을 따라 어트랙션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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