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04)
100. 약속 (4)
모처럼 호족들과 유원지에 왔지만, 김신록은 좀처럼 마음 놓고 즐길 수 없었다.
성국언에게 닥친 위기와 이를 둔 대처를 두고 생각이 많았던 탓이다.
조의신은 황호와 김신록이 호족으로서 성국언과 접촉해 협력할 것을 권했다.
‘성국언 학생과 협력하기 위해 접촉해 왔으니 마땅히 그렇게 해야하는데…….’
하물며 성국언에게 위기가 닥치지 않았는가.
바로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인데, 김신록은 자신의 망설이는 마음을 두고 자괴감을 느꼈다.
호족들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김신록에게 아무 재촉도 하지 않아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조의신 군이 처음 말을 꺼냈을 때, 최소 한 달 전에는 마음을 굳히라고 했다.’
조의신은 그때까지 김신록이 준비가 안 되면 조의신이 개인적으로 성국언, 전무영과 접촉해 리플레이를 하겠다고 밝혔다.
리플레이라는 말을 떠오르니 가슴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리플레이가 시작하는 것은 실기 시험이 치러진 12월, 게임 속의 두 사람이 사망하는 것은 5월이므로 약 1년 반의 악몽을 체험하게 된다.
1년 정도 길이의 리플레이를 겪었던 적호와 용제건이 일어난 직후에 혼란스러워했던 모습이 떠올라 걱정되었다.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한때 그들의 스승이었던 입장에선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심적으로 복잡한 와중에 용제건이 보낸 메시지 때문에 더욱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용] 가족들이랑 유원지 가는구나. 재밌게 놀다 와^^
김신록은 일단 경호를 위해서 동행한 건데 용제건은 마치 가족끼리 놀러간 것처럼 말했다.
사실 경호를 핑계로 삼지 않으면 김신록이 오지 않을까 봐 호족들이 그렇게 둘러댄 것뿐, 실제로 용제건의 말대로 가족끼리 놀러 온 게 맞긴 했다.
용제건의 속 긁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용] 다음에는 나랑 같이 갈래?
[용] 아니면 제자들이랑 가는 것도 괜찮겠다. 국언이라든가. ^^
김신록은 용제건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특유의 화법으로 들쑤시고 다녔다.
그러다 결국 용제건은 김신록이 하는 고민의 중심에 성국언이 있다는 걸 알아채고 저렇게 짜증나게 굴기 시작했다.
방식이 참 얄밉긴 하지만, 어쨌든 등을 밀어주려는 걸 고맙게 여기기로 했다.
“아들아, 다음엔 저걸 타자꾸나.”
적호의 말에 김신록이 홀로그램 창을 닫았다.
적호는 아들하고 처음으로 유원지에 같이 와서 몹시 들떠 있었다.
이참에 생각이 많아 보이는 아들의 스트레스를 풀어 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아버지의 마음까지는 다 알지 못했으나, 김신록은 적호가 기뻐하는 걸 보니 자신도 기뻐졌다.
적호는 김신록을 향해 자상하게 말했다.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나는 네 편이다.”
무엇을 택하든 자신의 편이 될 존재가 있다.
김신록은 여전히 적호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김신록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적호와 나란히 걸었다.
* * *
유원지에서는 기다리는 즐거움, 어트랙션 사이를 이동하며 걷고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만, 처음 오는 후예들은 모든 어트랙션을 빠르게 즐기고 싶어 했다.
황명 테마파크의 손님은 우리뿐이었기에, 모든 어트랙션을 기다리는 일 없이 바로바로 탈 수 있었다.
또, 어트랙션 간에 거리가 있어도 플레이어 특유의 이능으로 빠르게 이동해 시간이 단축되었다.
하지만 후예 중에서 가장 어린 은재호는 금방 지쳐서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졌다.
“하하하하! 지친 모양이군. 이 몸이랑 같이 가지.”
내가 나서기 전에 황지호가 은재호의 손을 잡고 날듯이 뛰었다.
은재호는 지나치게 빨라 당황하면서도 재미가 있는지 크게 웃었다.
은이호와 은서호가 그 뒤를 따라 달려갔다.
‘신났네.’
후예들보다 황지호가 더 신난 것 같다.
후예들이 좋아하는 게 기쁜 건가?
바빠서 가족들과 얼굴도 못보다가 오랜만에 가장 노릇한 아버지 보는 기분이다.
아니, 비유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어트랙션을 한 번씩 다 돌고 난 후에는 황지호가 지참한 도시락을 먹었다.
금빛 호랑이가 장식된 화려한 찬합 속에는 소풍 도시락의 정석 메뉴, 김밥이 가득했다.
호랑이 나들이라고 도시락 콘셉트도 그렇게 잡은 건지, 각 호랑이의 상징색을 메인으로 한 김밥이 보였다.
황지호의 경우에는 계란말이 김밥, 백호군은 흰 쌀밥을 활용한 누드 김밥, 적호는 고추장 볶음 고기를 메인으로 쓴 김밥이 그러했다.
척 봤을 때 특이한 재료는 없는데 한입 먹은 순간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좀 연한 색의 콩코드 포도 잼이 발린 빵은 청호를 표현한 거겠지?’
맛도 훌륭했고 메뉴가 가진 상징성도 매우 괜찮았다.
황지호가 이 몸의 요리 실력이 어떠냐며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기에 순순히 맛있다고 했더니 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에도 어트랙션 순회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대관람차 앞에 도달했다.
각 관람차별로 네 명이 정원이라 누가 누구와 같이 탈지 많이 갈렸는데, 공평하게 사다리타기로 정하기로 했다.
그 결과 나는 은서호와 나의 천사 올무와 함께 타게 되었다.
‘천사와 함께 타게 되다니, 오늘은 운이 좋구나!’
왕왕!
천사는 먼저 날듯이 뛰어 올라탔다.
이동 중에도 천재성을 발휘하여 앞서가곤 했는데, 이번에도 천재답게 먼저 갔다.
그 뒤를 따라 걷자니 뒤에서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의신은 지능이 많이 떨어진 상태이니 네가 잘 챙기도록 하거라.”
“네, 황호 님!”
실제로 지능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나보다 후배인 애한테 나를 맡기다니 저게 뭔 소리인가.
하지만 오늘은 좋은 날이니 굳이 태클을 걸지 않기로 했다.
천사의 옆에 앉으니 자연스럽게 내 무릎 위로 왔다.
관람차가 움직여 점점 시야가 높아지다 보니 정말로 천사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의신이 형,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대관람차가 정점에 오르기 전, 조용히 창밖을 보고 있던 은서호가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었으면 언제든 해도 좋은데, 왜 지금 물은 걸까?
천사를 쓰다듬는 중에도 은서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 반에 천은하라는 애가 있어요. 이번에 수석으로 입학한 앤데요…… 아는 사이에요?”
정신이 번쩍 들어 나도 모르게 손을 멈췄다.
갑자기 은서호가 은호에 관해 물으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기에 표면적인 관계만을 전하기로 했다.
“알고 있어. 천동하 선배님의 동생이고, 신문부에 신입으로 들어왔으니까.”
“역시 아는 사이였구나! 걔가 가끔, 아니, 자주 형 얘기를 하는데 의신이 형 얘기 같기도 했거든요.”
은호는 대체 반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건가.
형 얘기를 하다가 0반에 갔으니 콘셉트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그런데 천동하 얘기만 하지, 왜 내 얘기를 한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냥 천동하 얘기만 한 건데 은서호가 오해한 게 아닐까?
“수석을 놓쳐서 은하한테 라이벌 선언을 하긴 했는데요. 저랑 은하는 같은 반이기도 하고, 이제 저는 반장이고 걔는 부반장이잖아요.”
은서호는 천은하를 두고 고민하는 게 많았나 보다.
그런데 은서호가 자기 할아버지를 ‘은하’라고 부르는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듣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은서호가 창밖을 보면서 말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좀 이상한 태도를 보이는 중이라는 걸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겉으로 티내지 않게 천사를 품에 안고 쓰다듬으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려 애썼다.
“저는 은하랑 친해지고 싶어요. 이호도 은하랑 친해지고 싶어 해요.”
그 말에 다시 한번 굳게 다져 둔 마음이 흔들릴 뻔했다.
은호의 후예들을 아끼는 진족들은 많지만, 실질적으로 이 땅에 피가 이어진 존재는 남매들을 제외하면 은호밖에 남지 않았다.
진명을 감지할 수 없어 진족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혈육을 알아보고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든 걸까?
은서호와 은이호가 라이벌 의식을 그렇게 불태웠으면서도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참 기특하면서도 슬프게 느껴졌다.
‘하지만 은호는 저 둘과 친해지려 할 것 같지 않은데…….’
내 예상대로인 듯 은서호는 기운이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어쩐지 친해지기 어려워요. 말을 걸면 부드럽게 응해 주긴 하는데, 아무리 대화를 나눠도 친해진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끄응…….
올무도 은서호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낮게 목을 울리며 위로했다.
은서호는 계속 바깥을 보며 말했다.
어느덧 관람차는 정점을 지나 계속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의신이 형은 은하랑 친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어요?”
나는 천성헌 시절의 은호를 떠올렸다.
그때의 천성헌은 붙임성이 좋고 다정하여 누구와도 친하게 지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친해졌다기 보다는 천성헌이 먼저 계기를 마련했다는 쪽이 옳을 것이다.
지금의 은호는 그때와 다르겠지만, 아마 근본적인 부분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저 둘이 친손주라는 사실 때문에 가까워지는 걸 꺼리고 있을 거다.
나는 고민 끝에 한심한 답변을 내놓았다.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을까?”
오랜만에 눈을 뜬 은호가 감당해야 하는 현실은 너무 무거우니,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당연하고도 도움이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은서호는 그 답변을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기쁘게 말했다.
“시간…… 학교에서 계속 같이 지내다 보면 친해지겠죠? 은하도 앞으로 주욱 0반에 있을 것 같으니까요!”
은서호는 긍정적으로 말하며 앞으로 있을 0반에서의 이벤트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은서호는 소풍으로 0반 아이들과 다 같이 황명 테마파크에 오고 싶다며 계획을 짰다.
아마 1학년 0반 아이들은 반장의 소풍 계획에 만족할 것이다.
‘부반장인 은호는 그리 좋아할 것 같진 않긴 한데, 결국은 소풍에 같이 오겠지.’
은호는 정말 똑똑하고 현명했지만, 조손 관계에 있어선 후예들 쪽이 훨씬 지혜로울지도 모른다.
나는 은서호가 소풍 계획을 짜는 것을 도와주기로 약속하고, 대관람차에서 내렸다.
은서호의 표정은 대관람차에 타기 전보다 밝아져 있었다.
아직은 해가 짧은 시기라 금방 주변이 어두워졌다.
밤이 되자 화려한 조명이 테마파크를 덮어 또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후예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밤 경치를 즐길 수 있는 어트랙션을 골라 다시 순회를 시작했다.
호랑이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밤이 한창 깊은 후였다.
‘기숙사로 돌아가야 할 타이밍을 놓쳤어. 후예들이 저렇게 즐겁게 놀고 있는데 혼자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행히 나 혼자만 잡힌 건 아니었다.
김신록도 어쩌다 보니 저택으로 와 자고 가게 생겼다.
적호 옆에서 차를 마시는 김신록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니 나만 당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되었다.
황지호가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조의신, 아직 졸리지 않나 보군. 잘됐다. 이 몸과의 약속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다.”
황지호와의 약속?
바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약속이라는 키워드와 현재 시기를 생각하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만우절 장난 말하는 거구나.”
내 대답을 들은 황지호가 만족한 얼굴로 장난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