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06)
100. 약속 (6)
만우절을 맞이해 은광고 전체가 거짓말과 장난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아침에는 거주 구역에서 가짜 말벌이 떼로 출몰했다.
말벌 자체는 플레이어에게 있어 큰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벌 떼가 내는 소리가 문제였다.
이능파가 섞여 있어서 그런지 방음 설계를 무시하고 소음이 방 안으로 들어와 몹시 시끄러웠다.
결계를 따로 더 치지 않는 한, 소음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오늘 기숙사생 중에 지각하는 사람은 없겠네.’
좋은 소식도 있었다.
그 가짜 말벌 무리 중에는 진짜 말벌이 한두 마리가 섞여 있었다는데, 수습에 나선 지익회장이 멍청하게도 쏘였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들렸다.
플레이어의 능력을 활용하면 벌에 쏘일 일도 없고, ‘계’새끼에게 과분한 광림, ‘밤정적의 안개’를 활용하면 이런 소동을 진정시키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참 어이없고 한심했다.
“올해는 만우절 수습이 좀 늦지 않았냐? 시완이 형 없어서 그런가.”
“계이담 선배 요새 피곤해 보이더라. 아, 다인이가 있다면 저런 벌레 떼 정도는 금방 해치울 텐데.”
“다인이는 이제 부모님이랑 산다고 퇴소했지…… 아쉽다.”
안다인은 최강의 타이틀 히로인답게 벌레 따위에는 지지 않는다.
천익산을 끼고 있는 기숙사에선 벌레가 자주 출몰했는데, 안다인이 늘 솔선수범하여 벌레를 퇴치하곤 했다.
안다인은 효과적인 벌레 퇴치를 위해 각종 살충제 스프레이를 성분별, 브랜드별로 갖출 정도로 열정적이었기에 벌레에 대처하지 못하는 겁쟁이들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족과의 시간을 1분 1초라도 더 늘리기 위해 퇴소하여 호랑이 저택의 별채에서 지내는 중이다.
‘이 와중에 지익회장이 믿음직하지 못하니 답답할 노릇이겠지.’
한편, 은광고인은 아니지만 아침부터 허무하고 철딱서니 없는 거짓말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무려 12지 동맹의 일각, 토족의 수장인 옥토연이었다.
[옥토연] 나 이제 은인이랑 야구 안 볼 거야. ㅡㅡ
[옥토연] 개막전 혼자 봤는데 완전 재밌었어.
[옥토연] 진짜 같이 안 볼 건데?
[옥토연] 왜 말이 없어?
[옥토연] 야구 진짜로 같이 안 볼 거라고!
진짜로 앞으로 야구 같이 안 보겠다고 답장하면 옥토연이 생난리를 칠 것 같았다.
‘이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할 만큼 서운했었나.’
저번 주말에 프로야구 개막전이 있었고, 옥토연이 같이 보러 가자며 권유했다.
하지만 호랑이들과 테마파크를 가기로 먼저 약속했기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옥토연은 개막전을 혼자 가고, 나중에 후예들과 유원지에 갈 기회를 놓쳤다는 걸 안 후 길길이 날뛰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야구를 같이 보러 가고, 후예들과 유원지도 가겠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옥토연이 진정했다.
만우절에 이런 메시지를 보낸 걸 보면 아직 화가 난 것 같지만 말이다.
[옥토연] ……오늘 만우절인 건 알지?
내가 뭐라고 답변을 할지 망설이는 사이 옥토연이 추가 메시지를 보냈다.
진짜 안 보러 간다고 할까 봐 허둥지둥 메시지를 보낸 듯했다.
내가 나중에 야구를 꼭 같이 보러 가자는 말을 하자 옥토연이 안심하고 물러났다.
바보 같은 메시지는 더 있었다.
[도시후] 너무해! 다들 죽을 준비해!
갑자기 도시후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도시후가 저런 소릴 한 건 나와 유상훈도 있는 단체 메시지방이었다.
예전에 장남욱에 관해 물을 겸 만든 방인데, 그 이후 사용하는 일이 없었는데도 아직 터지지 않고 남아 있던 게 신기했다.
유상훈도 메시지를 읽었는지 읽음 표시가 떴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도시후는 읽음 표시가 뜬 것만으로도 만족한 건지 추가 메시지를 보냈다.
[도시후] 그러니까 나는 배추할게! 그리고 밥을 준비할게! ㅎㅎㅎㅎ
무랑 배추, 죽이랑 밥을 가지고 말장난을 한 건가?
옆에 도시후가 있으면 나도 모르게 한 대 쳤을지도 모른다.
[유상훈] ㄲㅈ
무시하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유상훈은 화가 많이 난 건지, 꺼지라는 의미를 담아 자음을 보냈다.
요즘 유상훈의 심기는 매우 불편한 상태다.
도원우와 유상희는 학부는 다르지만, 같은 대학교에 진학했으며 졸업식 데이트를 한 이후로 계속 가깝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아직 사귀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주변에선 예비 캠퍼스 커플로 취급하는 중이다.
유상훈은 그게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TC 관련 광고나 제품만 봐도 짜증을 낸다.
이런 상황에서 TC의 도씨 놈이 저러고 있으니 더욱 화가 날 거다.
‘그렇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게임으로 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원래 유상훈은 게임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베타 테스터로 뽑힌 이후에는 더 게임에 몰두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고등학생이 게임에 빠져 학업에 큰 지장이 발생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라 걱정되었다.
도시후는 유상훈의 속도 모르고 그저 시무룩한 반응을 보였다.
[도시후] 재미없었어?
[도시후] 재밌다고 하신 분도 있는데……. ㅠㅠ
대체 누가 저걸 재밌다고 한 건가.
누군지 몰라도 생각 수준이 도시후급인가 보다.
만우절이랍시고 장남욱 속 썩이는 짓은 작작하라는 말을 대충 정리해서 보내고, 메시지방을 닫았다.
기숙사를 나선 후, 나는 2학년 구역 대신 중앙 구역으로 향했다.
오늘은 그쪽에 볼일이 있었다.
퍼펑, 펑!
중앙 구역으로 향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죽 소리가 났다.
오늘 같은 날 폭죽 몇 개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등교 중이던 학생들은 별로 놀라지 않은 얼굴로 소리가 난 하늘을 봤다.
하늘을 본 이들의 눈이 하나같이 커졌다.
하늘에 거대한 제갈재걸 선생님이 여럿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 제갈재걸 선생님을 담기에는 땅만으로도 부족하지.”
“그동안의 기획에선 땅 위주였으니까 이제 하늘로 향할 때가 됐어!”
하늘에는 에어 보드를 타고 아이템을 사용 중인 금찬왕찬 일당이 있었다.
저들이 손에 들고 있는 건 에어 호텔에서 기념일을 맞아 하늘에서 특별한 연출을 할 때 사용하는 특수 효과용 아이템이었다.
마치 하늘에 CG로 제갈재걸의 얼굴을 합성한 듯한 연출은 저 선배놈들의 작품인 듯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일단 하늘에 가득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디바이스로 찍어 두기로 했다.
직접 보는 것만 못하겠지만. 이 사진과 영상은 나중에 홍규빈용 당근으로 활용할 수 있을 거다.
‘우리도 함근형 선생님께 저런 거 해 드리면 좋지 않을까?’
선배놈들과 비슷한 연출은 할 수 없지만, 스승의 날에 함근형 선생님을 위해 뭔가 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제일 기뻐하실 건 들으나 마나 출석률 100%겠지만 말이다.
제갈재걸의 모습으로 가득한 하늘을 디바이스에 담으며 교실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삐이이이!
갑자기 교내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알람음이 들렸다.
방송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알람음이 들린 후에도 방송은 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이어질 뿐이었다.
“뭐야, 제갈 쌤 목소리를 틀기로 했잖아. 방송부에 간 애들 어떻게 됐어?”
“가람 갑이 응답하지 않음요. 바쁜가 봄.”
“뭘 하고 있는 거야. 서두르라고 해!”
저 선배놈들은 작년에 이어 또 방송부를 괴롭혔나 보다.
금찬왕찬 일당이 하늘에서 뭐라 떠들고 있을 때, 소음이 멎었다.
그 후에도 제갈재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1학년 0반의 반장 은서호입니다. 현재 방송부를 습격한 3학년 0반 선배님들은 전부 제압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은서호가 왜 방송에 나오고 있지?
방송부를 습격한 선배놈들을 뭐 어쨌다고?
설마 1학년 0반 아이들은 금찬왕찬이 방송부를 습격할 거라는 걸 계산하고 역습을 노린 걸까?
만우절에 준비한다는 이벤트가 이거였나?
잠시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사이에도 은서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다름이 아니라 만우절을 맞아 3학년 0반 선배님들께 단체 대련을 신청하고자 합니다.]
대체 왜 만우절에 대련을 하는 거지?
설마 졸업한 우기환 일당이 무슨 날만 되면 그걸 핑계 삼아 강한 담임 임연화에게 도전했던 걸 나름의 방식으로 재현한 건가?
1학년 0반이 언젠가 지옥의 한 달을 재현하기 위해 선배 0반에게 도전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우리를 건너뛰고 바로 3학년 0반한테 갈 줄은 몰랐다.
‘우리 반에 호족의 수장인 황지호가 있어서 그런 걸까?’
은호나 후예 입장에선 황지호와 싸우기 거북할 거다.
또, 최강최악의 악동이라는 타이틀은 금찬왕찬이 가지고 있으니, 저놈들만 꺾으면 바로 최고가 된다는 계산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안 해!”
“우린 바쁘다, 어린놈들아!”
“그래! 제갈 쌤이랑 놀 시간도 없는데!”
금찬솔과 왕찬솔이 허공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저런다고 방송부실에 있는 은서호한테 들릴까 싶긴 했지만, 의사소통을 위한 준비를 해 둔 건지 저 말에 은서호가 답했다.
[잠깐만요, 저희 반 부반장이 선배님들이 거절하면 이 쪽지를 읽으라고 했거든요.]
은호도 이 일에 가담했다는 게 확실해져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고, 은서호가 쪽지를 읽었다.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대신 은광고 최강의 0반 타이틀은 우리가 가져가겠습니다.’라고 써 있네요. 와, 싸우지 않았는데 저희가 이긴 건가요!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해맑은 어조로 은서호가 말하자 금찬왕찬은 부아가 치밀어 오른 건지 마구 날뛰었다.
저 정도의 도발에 넘어가다니, 선배놈들은 쉽고 단순한 것 같다.
선배놈들은 방송부실과 1학년 0반 교실 쪽을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저놈이 뭐라는 거야!”
“아니, 악의가 없어 보이는 게 더 짜증 나네!”
“쟤 진심으로 저러는 거 같은데.”
“아, 위아래도 없는 것들아! 그럼 싸우자, 그냥!”
“가람 갑을 구하러 가자!”
‘와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금찬왕찬 일당이 방송부실로 뛰어가고, 언제 또 알고 온 건지 문새론이 취재를 위해 그 뒤를 따랐다.
어린 후배들이 금찬왕찬의 난동에 휘말리는 게 걱정되긴 했지만, 우선 약속한 장소로 가기로 했다.
‘은호가 손주를 다치게 할 리가 없어. 괜찮을 거야. 뭣하면 늙은 호랑이가 가세하겠지.’
황지호도 저 방송을 듣고 있었을 테니 분신을 보내든 해서 대처할 거다.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서 걷자 시야가 오로라빛으로 덮였다.
중앙 구역에 가까워지자 벚꽃잎이 오로라색으로 물들어 있던 덕이다.
저 색 때문에 누구 짓인지 바로 깨달았다.
‘관종들이 한 짓이구나.’
동아리 가입 권유 기간이 끝나자 다시 등교 거부 모드에 들어갔는데, 만우절 이벤트를 위해 잠시 등교했었나 보다.
중앙 구역에는 잠시 등교를 멈추고 오로라색의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아이들이 많았다.
관종들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덕분에 최고의 배경이 완성될 듯하다.
“조의신, 시간에 맞춰서 왔군.”
중앙 구역의 중심, ‘정비 중’이라고 써 있는 안전 펜스로 둘러싸인 큰 공터 앞.
황지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 끝났어?”
“그래, 이 몸이 결계만 해제하면 된다.”
펜스 안에서 이능파가 느껴지는 걸 보니 제대로 준비했나 보다.
저게 하루아침에 가능한가 싶었는데, 황지호의 힘이 있으면 가능했나 보다.
“자, 그럼 시작한다!”
황지호가 황금빛 이능파를 흘려 넣자 안전 펜스가 허물어지며 황금의 입자로 변했다.
눈부신 빛이 중앙 구역에 퍼져 오로라색의 벚꽃과 건물, 사람들을 한순간 삼켰다.
파아아……!
빛이 멎은 후, 아무것도 없어 보였던 공터에 거대한 탑이 생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탑이 아니라 드롭 타워 타입의 어트랙션이었다.
황지호는 만우절을 위해 옮겨 온 황명 테마파크의 놀이기구 중 하나였다.
그리고 숨겨진 어트랙션이 나타난 장소는 이곳 중앙 구역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