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08)
100. 약속 (8)
4월 1일 만우절이 지나간 직후의 자정.
김신록은 어트랙션의 회수와 이동을 위해 호랑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국언과 이야기하겠노라고 고했다.
‘성국언은 분명 응하겠지. 바쁘더라도 억지로 시간을 낼 거야.’
성국언이 은사를 생각하는 마음은 극진하니, 없던 시간도 만들어 낼 거다.
아마도 이번 주말에 성국언과 전무영에게 리플레이를 쓰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독촉한 주제에 이런 생각을 품는 건 좀 아니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리플레이의 기능을 확인하느라 잠을 설쳤다.
아침이 되자 은광고 학생들은 만우절을 맞이해 잠시 외면했던 현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중간고사는 성큼 다가와 있었고, 은광고 학생들은 벚꽃을 보며 반쯤 죽어 가고 있었다.
“중간고사도 구라였으면 좋겠다.”
2학년 구역에서 어트랙션이 있던 장소를 보며 맹효돈이 중얼거렸다.
맹효돈은 어젯밤은 앉아서 공부만 했을 텐데 탁거산 도인과 훈련을 했을 때보다 더 지치고 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중간고사는 구라가 아닌 현실이다.
“조금만 더 힘내. 시험 끝나면 다 같이 소풍 가자!”
“어, 어…….”
김유리의 응원을 받아 조금 기운이 난 건지 맹효돈이 다시 수학 문제와 마주했다.
모처럼 김유리가 응원했는데 응원 덕에 힘을 얻었다기보다는 공연히 마음이 어지러워진 것처럼 보이긴 했다.
저래서야 제대로 수학 문제를 풀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위기에 처한 맹효돈과 달리 소풍이라는 말이 나오자 다소 여유롭게 중간고사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소풍 이야기를 했다.
“송 할아버지한테 작년 봄 소풍 이야기 들었어. 엄청 사이좋아 보이고 재밌게 논다고 들어서 이번엔 꼭 가고 싶어……! 애들이 열네 명이나 오면 더 재밌겠지?”
“……학교 안 오는 두 명이 소풍은 올까?”
“왔으면 좋겠다. 대석이도 꼭 와야 해.”
“물론 갈게!”
송대석의 입 모양을 보니 구슬비와 옹길동에 관해 언급할 때, ‘관종’이라고 부르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올해 들어 부쩍 성장한 송대석은 그 말을 한 글자도 입에 담지 않아 민그린을 기쁘게 했다.
송대석이 처음에 막말을 하던 입학 초기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한편, 봄 소풍에 관해 생각할 여유가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기본적인 한자도 못 외우는 주제에 한문 관련 심화 과목을 고른 진정묵이 그러했다.
“한자는 그냥 외우는 것보다 생성 원리를 파악한 후에 익히는 게 쉬워.”
“부디 가르침을 주시오.”
한이는 한문 과목에 자신이 있다 하여 진정묵을 전담하고 있다.
진정묵은 감사를 표하며 뭔가 해 주겠다고 했는데, 한이는 고민 끝에 시험 후에 대련을 해 달라고 청했다.
진정묵은 곽경구를 거의 제압할 정도의 실력을 가졌으니, 한이가 이기기는 어려울 거다.
‘진정묵은 현재 검의 고수만을 상대하고 있긴 한데, 아마 맨손 격투자를 상대로도 잘 싸울 거야.’
진정묵은 은광고에서 검의 고수에게 비무를 청하고 다니는데, 그중에는 작년 주수혁네 반의 담임이었던 노영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노영미는 맨손 격투에도 능해 검과 주먹을 섞어서 싸웠는데도 진정묵은 훌륭하게 막아 냈다.
쉬는 시간을 이용한 대련이었기에 무승부로 끝났으나 짧은 시간으로 끝난 게 아쉬울 정도로 대단한 비무였다.
‘은호가 둔 수 덕에 태호권 소모임에 가입한 신입생이 많다 보니 한이가 동등하거나 자신 이상의 상대와 대련할 기회가 적었겠지. 중간고사가 끝나고 진정묵과 비무 하면 도움이 될 거야.’
참관이 가능하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자칭 한이의 친우들이 두 사람을 방해했다.
“한이야, 나는 그냥 다 외웠어.”
“하하하하! 이 몸은 외운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익혔지.”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둘은 공부하는 한이와 진정묵 사이에서 이것저것 훈수를 뒀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있긴 했으나 도움이 안 되는 쓸데없는 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 우리 반에서 성적이 위험한 아이는 한 명 더 있었는데, 이쪽은 몹시 평화로웠다.
“이번에는 정묵이도 가니까 열네 명이 가는 거네. 진짜 사람 많아졌다.”
“담임 선생님을 포함하면 수가 더 늘어납니다. 기대됩니다.”
“응! 다 같이 소풍 가면 재밌을 것 같아. 추가 시험에 안 걸리도록 열심히 할게.”
권레나는 목우람에게 너무 도움을 받는 것 같아 미안해했지만, 그러다가 추가 시험을 치르게 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는지 목우람의 도움을 받아들였다.
권레나는 나중에 목우람에게 감사를 표할 겸 권제인의 신곡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해 줄 예정이라고 한다.
목우람 몰래 준비하는 깜짝 연주라는데, 그런 짓을 했다간 목우람이 곡을 반도 듣기 전에 기절할 것 같다.
하지만 기절한 본인이 기뻐할 것 같으니 일단 모른 척하기로 했다.
‘다들 서로 잘 도와주고 있으니 내가 봐줄 필요가 없겠다. 맹효돈의 수학 과목만 빼고.’
교실을 둘러보던 나는 맹효돈이 붙잡고 있던 문제지를 확인했다.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같은 문제를 붙잡고 있었다.
머리와 손이 돌처럼 굳어 있는 맹효돈에게 말을 걸었다.
“계속 한 문제만 풀고 있는데, 어디에서 막혔어?”
“……해설에서 지수 함수 그래프를 회전시키라는 부분. 계속 돌렸는데 이상하게 나와.”
“이 그래프는 180도가 아니라 원점을 대칭으로 회전시켜야 해.”
맹효돈은 ‘아!’ 하고 탄식을 토하며 문제를 풀었다.
그토록 헤매던 게 허무하게 느껴지나 보다.
원래 수학 문제를 풀다 보면 어이없는 부분에 막힐 때가 많긴 하다.
‘그래도 내 설명을 이해하는 걸 보니 수업 때 열심히 들었나 보네.’
낙제를 면하려면 좀 더 열심히 해야겠지만, 그래도 아주 절망적인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우리 반은 이번 중간고사를 그럭저럭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반에 걱정되는 놈이 하나 있었다.
[장남욱] 상훈아, 네가 저번에 말했던 게임 말인데 우리 학교 생도 중에도 베타 테스터로 선정된 애가 있어. 예전에 같이 농구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장남욱] 걔 말에 따르면 너처럼 보이는 유저를 만났다고 해.
유상훈은 장남욱의 메시지를 읽고도 반응하지 않았다.
유상훈이 뭐라고 답변하기 전에 장남욱이 계속 긴 메시지를 쏟아 냈다.
[장남욱] 매일 긴 시간 플레이하고, 현재 테스트 서버 랭커가 음성 채팅을 하는 걸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게 네 목소리 같았다고 하더라.
[장남욱] 너로 추정되는 서버 랭커가 게임 하는 시간을 확인해 봤어. 결과가 좀 충격적이야.
[장남욱] 네가 학교생활을 하고, 농구부 훈련을 하는 걸 제외하고 시간 계산을 하면 하루에 세네 시간 정도 자고 게임 한다는 소리가 되거든.
유상훈이 그 정도로 그 게임에 빠진 건가?
사관학교 생도가 게임에서 봤다는 서버 랭커가 유상훈이라는 확증은 없지만, 거의 맞는 말인 것 같다.
테스트 서버라고는 하지만 랭커라니.
그 갓겜은 돈으로 찍어 누르는 플레이가 불가능하고, 투자한 시간과 실력이 중요했다.
유상훈이 예전부터 게임을 좀 잘한다는 건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장남욱] 곧 테스트 기간이 끝난다고는 하는데, 지금 은광고는 중간고사가 얼마 안 남은 중요한 시기야. 그러니까 게임은 좀 줄이고 공부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유상훈] ㅇ
유상훈은 성의 없게 대답했다.
만약 그 랭커가 유상훈이 아니었다면 ‘ㄴ’라고 답했을 테니 진짜 저놈이 랭커인가 보다.
‘베타 테스트에 저 정도로 시간을 쏟다니. 게임이 출시되면 정말로 빠지는 거 아니야?’
그 갓겜은 프로 리그가 형성되고, e스포츠 중 관객 동원수 1위를 달성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저 갓겜에서는 플레이어들의 프로 리그 진출을 막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어 중에서도 최초로 프로 게이머가 탄생한다.
어쩌면 프로 게이머의 길을 택한 플레이어들 중 하나가 유상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유상훈이 농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프로 농구 선수는 될 수 없잖아. 하지만 저 갓겜에선 프로 게이머가 될 수 있어.’
여러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유상훈이 은광고를 졸업해 줬으면 했기 때문에 부디 낙제는 면했으면 좋겠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이런저런 걱정이 있는 가운데, 학교 외부의 일도 좀 신경 쓰였다.
‘아직 주수겸으로부터 온 연락은 없네. 저쪽은 좀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
저번 달에 있었던 로펌 습격 사건은 슬슬 대중에서 잊히기 시작했다.
제법 규모가 있는 법률 사무소가 습격당해 한때 난리가 났지만, 현대 사회에선 매일같이 사고가 터지다 보니 금방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그 법률 사무소는 온전히 기능을 회복하지 못했고, 또 습격당할 걸 두려워한 건지 소속한 변호사들 다수가 퇴사 의사를 표명했다고 한다.
그 바람에 수임했던 사건들이 의뢰인과의 합의하에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그 바람에 예상치 못하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득을 봤지.’
놀랍게도 대부분의 일감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운영하는 법률 사무소로 넘어갔다.
저 습격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는 현재 파악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다른 로펌들은 습격을 피하기 위해 저 법률 사무소에서 맡던 사건을 수임하는 것을 꺼려 했다.
그러다 보니 사건을 가리지 않는 변호사, 습격당하더라도 격퇴할 만한 능력이 있는 플레이어 변호사 쪽에 대부분의 사건이 넘어갔다.
의뢰인 측에서도 또 사고가 발생해 새로 변호사를 선임하느니 처음부터 쉽게 안 다칠 변호사를 뽑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일이 워낙 없다 보니 한가했을 텐데, 잘됐지.’
오씨 집안의 계약 건을 은폐하려던 누군가가 괜히 연막을 친다고 변호사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습격할까 봐 조금 걱정되긴 한다.
그래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고작 그런 수준의 습격에 당할 리 없다.
로펌에 소속한 플레이어들과 함께 잘 대처하리라 믿어 본다.
‘그 대신,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악법을 폐지하기 위한 수고를 들일 일이 없게 해 줘야지.’
성국언의 죽음을 막는 게 그 첫수가 될 거다.
* * *
4월의 첫 주말.
은광구의 유일한 마천루, 황명 타워의 최상층.
나는 기숙사 아이들과 중간고사 공부를 하는 대신 이곳에 왔다.
자습 중인 맹효돈이 좀 걱정되긴 하지만, 이쪽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왔군.”
약속한 시각이 되자 황지호가 문을 보며 말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자 성국언과 전무영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호랑이들 사이에 선 나를 발견하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황지호가 호족으로서 그들을 초대한 자리에 내가 있으니 좀 놀랐을 텐데, 바로 이해해 준 것 같다.
“의신아, 너도 왔구나.”
성국언은 바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의신이 네가 진족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 신뢰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믿지 못하게 되셨나요?”
이 질문에 성국언이 말을 돌리거나 솔직하게 ‘그렇다’라고 답변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국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성국언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호랑이들을 살폈다.
그러다가 성국언의 시선이 김신록 쪽에서 멎었다.
“생각이라는 건 시간과 경험에 따라 바뀌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