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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09화 (809/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09)

100. 약속 (9)

시간과 경험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플마고 속 성국언은 시간만으로 변하지 않았다.

성국언의 생각을 바꾼 건 시간이 아닌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의 중심에 있는 건 김신록일 거다.

성국언을 바꾼 건 김신록이 아닐까?

“하핫! 마치 너는 관계없다는 듯한 표정이구나. 호족들이 꽤나 고생했겠어.”

“고생한 보람이 없는 건 아니다. 많이 좋아졌지.”

황지호가 노친네 같은 말투로 답했다.

호족들이 작년부터 일을 많이 한 건 맞는 말인데 왜 내 탓인 것처럼 말을 하는 건가.

둘은 내가 끼어들 틈을 안 주고 말을 나누었다.

“의신이와 같은 반 소속인 황지호로 알고 있다만, 호족이겠지.”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나? 황유호도, 황명호도 전부 이 몸이다.”

황지호가 대뜸 자신이 황호이고, 개천신화 속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밝혔다.

성국언과 전무영을 이곳에 부른 시점에서 밝힐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저렇게 다짜고짜 말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놀란 것 같진 않아.’

성국언과 전무영은 여기 오기 전에 어느 정도 조사를 마친 듯하다.

황명 그룹이 호족과 관련되어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고, 황명호와 황유호를 상대하며 저 둘도 추리를 해 온 듯하다.

“알고 있었나? 반응이 싱겁군.”

“호족의 중심에 있는 존재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황지호가 정체를 밝히자 성국언이 그를 호족의 수장으로서 대했다.

황지호가 교복을 입고 있으니 위화감이 상당할 텐데도 성국언은 정중하게 말했다.

예의는 지켰으나 성국언은 호족의 수장을 앞에 두고도 위축되거나 긴장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성국언의 당당한 태도를 보고 황지호가 입꼬리를 올렸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수하구나. 이 몸을 앞에 두고도 기세가 꺾이지 않는 것도 변함없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의 이사장님은 긴장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이 아무리 날카롭다 해도, 그림 속 존재라면 누가 두려워하겠습니까?”

“하하하! 과거의 일이라 해도 그걸 앞에서 직접 말하다니. 그 정도의 패기가 없다면 사퇴하라거나 은광고를 폐교시키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겠지.”

그림 속 호랑이는 황지호의 태만한 시절을 가리키는 듯했다.

은광고에서 무슨 난리가 나도 황지호는 관심을 주지 않고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니 그림 속 호랑이나 다름없긴 했다.

성국언은 아직도 태만한 시절의 황지호가 그다지 탐탁지 않게 느껴지나 보다.

‘어쩔 수 없어. 성국언은 그 시절을 경험했으니까. 상대가 진족이라는 걸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과거에 있던 그 일은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겠지.’

학생들이 줄줄 피해를 입어도 모르쇠하는 이사장이 있던 시절을 경험한 학생회장이라면 저렇게 반응해도 이상하지 않긴 하다.

그래도 성국언과 황지호는 비교적 태연해 보이는데, 중간에 낀 김신록의 표정이 죽어 가고 있었다.

전무영은 김신록을 걱정한 건지 성국언에게 살짝 눈짓했다.

적당히 하라는 뜻인 것 같다.

지은 죄가 있는 황지호가 먼저 물러섰다.

“그러면 정식으로 소개하지. 이 몸은 호족의 수장인 황호다. 동석한 자는 나의 친우인 백호와 적호. 그리고…… 이 둘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황지호가 말한 둘이란 나와 김신록이었다.

나와는 형식적으로 목례하고 지나갔지만, 김신록은 달랐다.

성국언과 전무영은 오래도록 김신록을 응시했다.

“……저는 후예입니다. 김신록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김신록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진족과 후예를 싫어하는 성국언, 김신록이라는 이름으로 사제지간을 유지했던 전무영 앞에서 후예임을 밝힌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걸 입에 담지 않았다.

하긴, 갑자기 이 자리에서 ‘저는 성국언 학생의 담임이었습니다. 인간인 척했지만 후예입니다. 전 신분은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사장했습니다만, 잘 살아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일 거다.

김신록이 계속 침묵하자 황지호가 끼어들었다.

“인사는 여기까지다. 자네를 여기에 부른 이유는 뭐라고 짐작하고 있지?”

전무영은 한순간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성국언은 얼굴 밖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성국언은 황지호의 말을 태연하게 받아쳤다.

“호족이 하고자 하는 일에 협력을 요청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황유호의 입을 통해 호족의 사상이나 가치관, 전망 등을 간접적으로 전했으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구체적이지 않군.”

황지호와 성국언은 가진 패를 쉽게 내보이지 않았다.

말로 상대의 의중을 캐고 뜻을 전하는 데에 도가 튼 둘은 노련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이윽고 둘은 각자 한반도를 노리는 흑막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 그를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공유했다.

‘목적을 공유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아직 서로 완전히 정보를 공유하진 않았어. 첫 회동이니 어쩔 수 없나.’

흑막의 존재에 관해선 의견을 주고받았으나 성국언과 호족, 각각 서로 공개하지 않은 정보들이 있었다.

중간에 낀 나는 알고 있지만, 그걸 이 자리에서 내가 멋대로 공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건 불가능했다.

“서로의 뜻을 알았으니 제안하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그 제안은 조의신이 할 거다. 조의신, 말하도록.”

황지호의 말에 모든 시선이 쏠렸다.

성국언은 내 차례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가 보통 플레이어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호족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지 기대되는구나.”

호족 사이에서 뭔가를 하고 있지만, 성국언이 저렇게 말할 만한 역할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성국언과 전무영에게 악몽을 보여 주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

“성국언 선배님을 노리는 자가 있어요.”

“하핫! 정치를 하다 보면 적이 늘어난다. 정적이 생기는 건 어떤 정치인도 피할 수 없다.”

성국언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가볍게 말했다.

그저 성국언의 정적을 두고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나 보다.

“그자는 곧 암살 시도를 할 거예요. 사전에 아무 수도 두지 않으면 반드시 성공할 거예요.”

암살이 성공할 것이라고 단정 짓자 전무영은 경악하고, 성국언은 그저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성국언이 먼저 침묵을 깼다.

“의신이 네가 하는 말이니 허언은 아니겠지. 암살을 막기 위한 제안을 할 생각인가 보구나.”

“네.”

“어떤 수를 둘지 말해 봐라.”

‘당신은 곧 암살당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도 동요하거나 화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다니, 성국언은 역시 그릇이 컸다.

오히려 성국언보다 내가 긴장할 것 같아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저는 ‘리플레이’라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요. 조건을 만족하면, 꿈을 통해 특정 상황의 시뮬레이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어요.”

“그 리플레이를 통해 내가 암살당했을 때의 정황을 확인하려는 거구나.”

플마고에 관해서 구구절절 말할 수 없어 나는 여러 단어를 대체했다.

게임도 시뮬레이션의 일종이니 틀린 말은 아닐 거다.

꽤 추상적으로 설명했는데도 성국언은 정확하게 내 뜻을 알아듣고 반응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확신할 수 없지만, 주말이 끝나기 전에는 마무리될 거예요.”

나는 리플레이의 시간을 넉넉하게 잡았다.

리플레이의 기능 레벨이 올랐으니 적호 때에 비해 시간이 단축될 가능성이 있지만, 플마고 속 성국언은 적호보다 반년 정도 더 살았으니 얼마나 걸릴지 짐작이 안 갔다.

“리플레이의 대상이 되는 건 나 하나인가?”

“전무영 선배님도 같이 리플레이를 받았으면 해요. 두 분이 따로 행동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테니까요.”

“나만 당하는 게 아닌가 보구나. 알았다.”

마지막으로 리플레이를 사용한 상대는 용제건이다.

그때 리플레이의 기능은 3단계였다.

이후 윤회의 굴레에서 ‘생사(生死)의 안광’을 습득하고, 이능파 링크와 후예의 관계에 관해 고찰했을 때 각각 차원 이해도 레벨이 상승하며 리플레이의 단계가 올랐다.

즉, 리플레이의 기능은 마지막으로 사용했을 때보다 두 단계 더 상승했다.

단계가 오르며 리플레이를 한 번 할 때 선택할 수 있는 대상자가 늘어났다.

한 번에 악몽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대상이 늘어난 거다.

“그렇다면 그 리플레이 중에는 의원님과 저, 둘 다 잠들게 되는 것 아닙니까? 만약을 위해 한 명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받는 쪽이 시간이 반으로 준다.”

“그렇다면 비서를 더 부르는 게…….”

“호족이 지정한 건 나와 너다.”

설명을 듣던 전무영이 난색을 표했지만, 전무영은 리플레이를 같이 받을 마음인 것 같다.

성국언이 전무영을 설득했다.

“저 리플레이라는 기능은 예지나 예언에 가까운 수단이야. 쉽게 공개할 수 없는 수인데도 우리에게 보여 줬지. 상대가 보인 신뢰에 응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긴 합니다만…….”

“의신이나 선생님이 우리를 해칠 것 같나?”

“전혀 아닙니다.”

전무영은 그 뒤로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대체 김신록은 제자들을 어떻게 했길래 이리도 믿고 따르는 건가.

과연 안다인이 무한한 신뢰를 보일 정도의 교사다웠다.

“용제건 선생님도 계실 줄 알았습니다.”

“불러 주길 바라나? 용제건은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은광구에서 얼쩡거리는 중이다. 부르면 바로 오겠지.”

“굳이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용제건 선생님도 리플레이에 관해 알고 있나 보군요.”

“용제건은 직접 해 봤지. 일어나서 아주 재밌는 반응을 보였다.”

성국언이 리클라이너에 자리를 잡고 황지호가 향로를 준비하는 동안, 용제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리플레이 속에서 스승의 날을 두 번 맞이할 거예요. 첫 번째 스승의 날은 무사하겠지만, 두 번째 스승의 날에 두 분이 살해당하겠죠.”

“알았다. 잘 기억해 두마.”

기억하려고 애써도 악몽 속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다.

적호, 김신록, 용제건 모두 리플레이 중에는 모든 것을 잊고 그 세계 속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김신록은 두 번이나 리플레이를 했는데도 그랬다.

미리 말해도 어찌할 수 없는 걸 괜히 알려 줘 봤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니 애써 말을 삼켰다.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나는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전용 메뉴를 열어 두 사람을 선택한 후, 황지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황지호가 황금색의 향로를 들어 올렸다.

“시작하지.”

휘이이……!

황지호가 이능파를 흘리자 수면 향이 성국언과 전무영을 감쌌다.

제자들이 악몽 속으로 향하는 순간이 다가오자 김신록이 초조해했다.

성국언은 잠들기 직전, 김신록에게 말을 걸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선생님.”

성국언은 말하는 도중 잠이 든 바람에 그 목소리가 평소보다 힘없이 들렸다.

그 목소리가 끊기자 김신록이 눈을 질끈 감았다.

*    *    *

서른 중반이 지나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보통 ‘그때가 좋았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성인이 되면 가족과 학교의 보호 아래에 있었을 때에는 할 필요가 없던 고민,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감당해야 하니 과거를 그리워하곤 한다.

그러나 성국언은 성인이 되어 겪어야 할 일들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자신이 경험한 학창 시절을 미화하는 일 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성국언은 고교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다만 고교 시절의 얼마 안 되는 좋은 추억 속에 있던 선생님은 가끔 떠올리곤 했다.

성국언이 졸업하자마자 사망하는 바람에 스승의 은혜를 갚을 길이 완전히 사라졌기에 더욱 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의원님, 조문 다녀오겠습니다.”

전무영이 벌게진 눈으로 말했다.

전무영의 은사, 김신록이 은광고 입학 실기 시험 도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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