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12화 (812/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12)

101. 흔적 (3)

황명 타워 최상층.

해가 저물어 창밖으로 밤하늘이 보이는 와중, 성국언과 전무영은 계속 잠들어 있었다.

호랑이들은 리플레이하는 광경을 여러 번 봤고, 이번에는 교류가 적은 두 사람을 상대로 했기에 매우 평안해 보였다.

물론, 그중 김신록은 예외였다.

“김신록, 저 둘의 이능파 상태는 정상이다. 너도 적호도 무사히 눈을 뜨지 않았느냐. 너무 심려 말도록.”

“아들아, 네가 가르친 아이들은 이 정도 꿈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와서 곶감이나 먹거라.”

“하지만…….”

김신록은 곱게 썬 곶감에 잠시 시선을 주긴 했지만, 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악몽 속을 헤매는 제자를 두고 곶감을 먹을 수 없나 보다.

지켜보던 백호군이 갑자기 1인용 소파를 번쩍 들어 올렸다.

무게가 상당할 텐데 빈 종이 박스를 나르는 것처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백호군은 김신록의 바로 뒤에 소파를 내려놓았다.

“앉거라.”

김신록은 주춤거리다가 자리에 앉았다.

스승이라서 그런가, 백호군이 호랑이들 중에선 김신록을 제일 잘 다루는 것 같다.

뒤이어 적호와 황지호도 김신록 주변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가구들이 재배치되었고, 덩달아 나도 새로 배치된 소파에 앉았다.

조금 떨어져 있을 때에는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전무영의 표정은 다소 무너져 있었다.

‘그에 반해 성국언은 처음 잠들었을 때와 다를 바가 없네.’

성국언은 잠들 때에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나 보다.

어쨌든, 두 사람의 표정만으로는 어디까지 왔는지 분간이 안 가는 상태다.

적호 때를 생각하면 1년 정도는 흘러 슬슬 크리스마스를 맞이했을 거라고 추측할 따름이었다.

‘크리스마스에는 지익회가 전멸해. 성국언이 세웠던 자치 기구가 사라지고, 가깝게 지내던 사촌 동생이…….’

멋진 사촌 형이라면서 성국언을 자랑하며 웃던 성시완이 떠올랐다.

성시완의 말을 들으며 평온하게 웃던 성국언의 모습도 생각났다.

리플레이에서 불필요한 내용은 스킵할 수 있는 기능이 있으면 좋을 텐데, 단계가 올라도 그런 기능은 추가되지 않았다.

“성국언 학생은 재학 중에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티를 내지 않았습니다. 혼자 다 짊어져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김신록은 복잡한 표정으로 성국언을 보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러자 호랑이들은 기특한 것을 보듯 흐뭇해하며 김신록을 바라봤다.

김신록이 뒤늦게 시선을 알아채고 당황스러워했다.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해 되짚어 보았으나 뭐가 문제인지 깨닫지 못한 듯했다.

“……왜 그러십니까?”

예전의 김신록이라면 묻지도 못하고 속으로 계속 고민했을 텐데.

이능파 링크 건 이후로 김신록이 정말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그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있을 호랑이들은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굳이 지적하고 있지 않았다만, 네가 매번 성국언을 어떻게 부르는지 아나?”

“네? 그야…….”

그제야 김신록은 뭐가 문제인지 깨달은 듯했다.

꽤 예전부터 성국언을 학생이라 불렀는데 의식하지 못했던 걸까?

“성국언은 학생이 아니게 된 지 꽤 됐는데 꼬박꼬박 학생이라고 부르는구나.”

“성국언 군이라고 부릅니다만, 접촉할 기회가 느니 학생이라고 굳어지더군요.”

“그게, 아…….”

성국언은 한참 전에 졸업하고 저렇게 훌륭하게 제 몫을 하는 성인이 되었는데도 김신록 눈에는 학생으로 보이나 보다.

호랑이들의 지적에 당황스러워하던 김신록은 다시 두 제자를 보다 걱정하기 시작했다.

제자를 그렇게 대하니 제자들이 졸업 후에도 김신록을 스승으로 따르는 거다.

‘저리 걱정해 주는 선생님이 곁에 있으니 제자들도 무사히 돌아오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사실 나도 걱정되었다.

처음부터 표정이 무너져 있던 전무영과 달리 성국언은 계속 담담한 얼굴로 악몽을 헤맸다.

속으로 감정을 삼키고 있을 성국언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    *    *

크리스마스.

결계를 정상화하고 은광고 안으로 들어간 건 자정이 지나 크리스마스 당일이 되었을 때부터였다.

외부에서는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내부에서는 체감상 며칠이 지났다고 한다.

긴 기간 내부에서 심각한 디버프를 끌어안고 항전해야 했던 학생들 다수가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살아남은 학생들은 아주 운이 좋았거나 선배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저학년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국언이 형, 시완이가…….”

디바이스를 확인한 전무영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말했다.

국회의원이 된 후부터는 사석에서도 형 소리를 잘 하지 않던 전무영이 크게 흐트러져 있었다.

은광고에서 벌어진 사건을 들은 후부터 성시완의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성국언은 묵묵히 받아들였다.

성시완이 생존에 전념했다면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시완은 이런 사건이 터지면 자신의 안전을 가장 뒤로 미룰 인물이었다.

“현장으로 가자.”

성국언이 전무영의 등을 ‘팡!’ 하고 두드렸다.

눈시울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눈물을 참고 있던 전무영이 고개를 들었다.

“보통 사건이 아니다. 어쩌면 은광고에서 시작되는 침략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복잡한 진상을 감추기 위해 증거를 지우고 있겠지. 단서가 더 사라지기 전에 내 눈으로 봐 둬야겠다.”

슬픔과 분노를 가슴 속에 억누르고 성국언이 말했다.

전무영보다 더 괴로울 성국언이 냉정하게 행동하고 있으니, 힘들어할 수 없었다.

성국언의 말이 이어질수록 전무영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갔다.

“정부, 협회, 학교에서 책임 회피를 위해 유가족의 입을 막고 압력을 가하려 들겠지. 그전에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전무영의 불안이 가라앉자 성국언이 나갈 채비를 마치고 말했다.

성국언은 서울 시내에 다발한 이계에 대응하기 위해 막 이계 공략을 마치고 나온 후인데도 힘이 넘쳐 보였다.

그 모습이 믿음직스러워 보여 전무영도 힘을 얻었다.

“조의를 표하는 건 우리가 할 일을 마친 후에 해도 늦지 않아. 시완이나 다른 아이들이 기다려 줄 거다. 그렇지 않나?”

“네, 의원님.”

은광고로 향할 즈음에는 둘 다 평상심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은광고 앞에 도착해 성국언이 세단에서 내리자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성국언이 전사한 사촌 동생을 두고 동요하고 탄식하는 모습을 찍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성국언은 침묵으로 조의를 표할 뿐, 어떤 불안한 모습도 겉으로 내보이지 않았다.

발인이 끝나고 협회와 정부에서 ‘단순 이계의 이상 발생과 마족의 개입’으로 크리스마스 사건을 적당히 마무리 지으려 할 때까지도 흔들리지 않았다.

“은광고 내부에서 에너미만 발생한 것 같지 않습니다. 마족의 개입에 관해 증언한 학생도 있습니다만, 시완이가 당한 건 마족의 수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절흑풍림 측에서 확인해 주었나?”

“네. 마족이 거주 구역 쪽에 개입한 흔적이 없다고 합니다.”

“마족 외의 진족을 목격한 학생은 전부 살해되었나 보군.”

크리스마스 사건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우선 성시완은 에너미에게 당한 것 같지 않았다.

부검 결과, 근육 손실도와 체내 잔류 이능파의 양을 미루어 보았을 때, 성시완은 체력이나 이능파가 다해 죽은 게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다른 사람을 감싸기 위해 앞으로 나서긴 했지만, 기습당한 이를 대신해 당한 것도 아닌 듯했다.

그저 압도적인 힘 앞에 무너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은광고 내부에서 출몰한 에너미의 희귀도를 고려해 봤을 때, 에너미의 소행이라고 볼 수 없다. 시완이를 이렇게 쉽게 제압할 정도라면 최상위급의 플레이어나 강력한 진족일 거다.’

만약 그 자리에 성시완만 있던 게 아니라 강한 교사들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이브라 이벤트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교사들은 자리를 비웠고, 부장급 교사들은 해외 출장 중이었다.

또한, 은광고의 숨겨진 전력인 진족 이사장은 부재중이었다고 한다.

교사들이 대거 자리를 비운 상황을 보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연일까? 이게 호족의 계획이었을 가능성은 없나?’

이 모든 걸 황명호 이사장이라는 신분을 쓰는 호족이 획책했다면 앞뒤가 맞았다.

그자가 판을 짰다면 결계의 이상도, 자리를 비운 교사도, 학생을 단숨에 제압할 진족을 대기시키는 것도 가능해졌을 테니까.

의심은 점점 커졌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도 있었다.

‘황명호 이사장은 태만한 주제에 오만하고 미의식이 강했다. 그자가 사람을 죽이고자 한다면, 자신의 뜰을 더럽히지 않는 수단을 택했을 거다.’

호족을 향한 성국언의 의심을 막은 단서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용제건의 죽음을 두고 보인 용족의 태도였다.

용제건을 보낸 용족들은 몹시 비통해했다.

청룡과 염방열이 직접 나서서 용제건이 고작 마족 몇 명과 에너미에게 당했을 리가 없다며 강한 태도로 조사를 촉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호족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상하군. 물밑에서 용족과 호족이 대립할 가능성도 생각했는데, 이상할 정도로 용족이 호족을 신뢰하고 있다.’

용족이 호족을 의심하지 않는 이유는 적호의 죽음 때문이었다.

청룡은 황호가 적호를 저버릴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고, 황호를 아는 용족들도 그러했다.

게다가 크리스마스 때에 죽은 호족은 적호만 있는 게 아니었다.

황명 재단 직원으로서 일하는 호족 중 그날 교내에 남은 이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들은 전원 사망했다.

그리고 호족의 수석 주술사 죽호 역시 얼어붙고 부서진 죽림 속에서 전사했다.

이 사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고 엄중히 은폐되었기에 성국언은 알지 못했다.

‘용제건의 최후를 목격한 학생들의 증언과 용족의 반응도 신경 쓰이는군.’

살아남은 학생들 몇몇이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용제건의 빈소를 지켰다.

그 생존자들은 용제건과 행동해 목숨을 건졌다고 증언했다.

“통찰계 이능으로 봤는데요, 용제건 선생님은 처음부터 이능파가 거의 없었어요. 크리스마스이브 전에 누군가에게 공격당했을지도 몰라요.”

“맞아요. 언론에서 여의보주가 광림을 아끼다가 사태가 커졌다고 헛소리하는데 아니에요. 누가 먼저 손을 쓴 걸 거예요!”

이 증언은 용족도 같이 들었는데, 증언을 들은 용족이 그건 아닐 것이라고 정정해 주었다.

용제건은 어떤 이유로 이능파를 크게 소모한 상태였다고 한다.

용족은 그 이유에 관해서는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의혹이 여럿 남은 가운데, 진족보다 인간이 더 의심스러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용족과 저 인간들 중 누가 더 인류의 적에 가까운지 고른다면, 누구나 후자를 고르겠지.’

희생된 학생을 두고도 제 잇속과 안위만 챙기는 인간들이 많았다.

사건의 진상 규명이 유야무야되고 얼른 잊히고 묻히도록 유도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의 눈에는 진실을 원하고 슬퍼하는 이들이 눈엣가시였다.

최편득의 측근 교사 하나는 유족 비하 발언을 했다가 성국언에게 고발당하기도 했다.

사촌 동생이 죽었다고 감정적으로 대응한다며 교사가 적반하장으로 성국언을 비난하다 비웃음을 샀다.

성국언이라면 자신의 가족 중에 희생자가 없더라도 저렇게 나왔을 거라고 누구나 믿었기 때문이다.

성국언의 친지 중에 피해자가 없었던 어린이날 사건, 청소년 수련회 때의 행보가 대중에게 믿음을 주었다.

여전히 혼란한 가운데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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