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17화 (817/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17)

101. 흔적 (8)

1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

자리가 파한 후, 성국언은 의례적인 인사를 남기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김신록이 1층까지 배웅하려 했으나 성국언이 사양했다.

조의신이 운사에 관한 행방을 추측하고 나서 적호가 눈에 띄게 동요했고 덩달아 김신록도 상태가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의신이는 호족들에게 상당히 신뢰받고 있군. 아니, 그냥 신뢰받는 정도가 아니었다.’

호족들은 운사가 그런 처지에 놓였다는 걸 믿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워했으나 아무도 조의신의 추측을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심기를 크게 거스를 발언을 한 조의신에게 불편함을 표하는 호족이 없었다.

만약 호족과 관계없는 타인이 와서 운사를 두고 저런 소리를 했다면 정보를 캐내기 위해 살려는 둬도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입을 봉했을지도 모른다.

“자택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해야 하겠지만, 가시지 않을 것 같군요.”

“사무실로 간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많아. 너도 그렇지?”

“그렇긴 합니다.”

새벽이 지나 해가 뜨려 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긴 잠을 자고 일어났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쌓여 있었다.

그러나 쉬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의신이는 마지막 날에 네가 겪은 일에 관해 알고 싶어 했지. 나도 궁금하다. 좀 쉬고 괜찮아지면 들려줘.”

“괜찮다고 말씀드려도 믿어 주시지 않겠죠.”

“선생님도 그렇게 걱정시키고 괜찮다니.”

운사가 언급된 이후로는 정보 공유를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나중에 서면을 주고받기로 했다.

그때 조의신은 전무영이 마지막 날에 겪었던 일을 자세하게 서술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요청을 듣고 성국언은 전무영이 단순히 자신보다 일찍 죽어서 먼저 일어난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성국언도 리플레이 속 전무영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음에 걸렸다.

마음에 걸려도 상태가 안 좋은 전무영을 독촉할 마음은 없었다.

성국언은 전무영이 힘이 날 법한 말을 떠올리다가 말했다.

“아침은 좀 이르겠고, 점심은 시완이를 불러내서 같이 먹자.”

“……네!”

성국언의 제안에 전무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리플레이 속에서 전무영은 성시완을 보내고 부검소견서를 보는 걸 괴로워할 정도로 힘들어했다.

그러니 무사히 졸업하고, 대학생이 된 성시완의 건강한 모습을 보면 다소 기분이 나아질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성국언도 피로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시완이를 구한 건 의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야. 의신이는 분명 선생님을 시작으로 수많은 사람을 구했겠지.’

성국언이 기억하는 큰 분기점에는 항상 조의신이 있었다.

현실에서는 실기 시험에서도, 어린이날에도, 청소년 수련회에도, 크리스마스에도 조의신이 관련되어 있었다.

굳이 성국언과 전무영에게 리플레이를 시킨 걸 보면 직접 겪는 것만큼 자세히 알지는 못한 것 같지만, 조의신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했다.

은인을 생각하는 사이에 엘리베이터는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 순간, 화려한 색의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안녕, 얘들아.”

지하 주차장의 희미한 조명 아래, 용제건의 시안색 머리카락이 환하게 빛났다.

갑자기 튀어나온 유희계 용족이 국회의원과 비서를 ‘얘들아’라고 부르며 애 취급을 하니, 달변가인 성국언도 순간 말문이 막혔다.

용제건은 두 사람의 반응에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

“커피 마실래? 샌드위치도 있어.”

용제건의 손에는 컵 캐리어가 들려 있었는데, 막 포장해 온 건지 온기가 느껴졌다.

이어서 용제건은 다른 손에 샌드위치가 들어 있는 종이 가방을 들어 보였다.

척 봐도 혼자 먹을 만한 분량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나오는 타이밍을 재고 있다가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성국언이 학생 시절에 이런 짓을 당했다면 무시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하핫! 마침 시장했습니다. 제 지역사무소로 오시겠습니까? 같이 들죠.”

마침 리플레이를 경험했다던 용제건에게 듣고 싶은 게 있었다.

성국언의 제안에 용제건이 황홀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성국언이 자리를 비운 지 한참 된 후에도 호랑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성국언과 전무영의 몸 걱정도 됐지만, 솔직히 두 사람보다는 호랑이들의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감금되어 있고, 고문을 받고 있을 것 정도는 상정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흑막에게 힘을 이용당하고 있으리란 건 생각하기 어려웠을 거야.’

적호가 한참 동안 바닥을 응시하다가 황지호에게 물었다.

“……풍백과 우사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대로다. 우리 손에 붙잡힐 때를 대비해 뒀더군.”

황지호의 말대로 풍백과 우사는 줄곧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흑막은 그 둘이 적진에서 쓰러지면 눈을 뜨지 못하도록 수를 쓴 듯했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전원이 꺼진 전자 기기가 손에 들어왔는데, 어떻게 켜야 할지, 다른 곳에 연결하여 정보를 빼낼 방법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호족이 마음만 먹으면 그 둘을 죽일 수도 있는데 무방비하게 내버려 두다니.’

물론, 운사의 행방이 걸려 있으니 황지호가 그 둘을 죽일 리는 없었다.

호랑이들은 서로 이야기하며 점차 충격에서 벗어났다.

백호군은 하는 말을 듣기만 했으나 침착한 얼굴로 경청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다른 호랑이들이 진정하는 것 같았다.

슬픔과 고통은 나누면 줄어든다는데 그 말대로였다.

여전히 대화의 주제는 풍백과 우사와 관련되어 있었지만, 점차 호랑이들은 과거가 아닌 미래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리플레이 속에서 성국언을 죽인 게 풍백과 운사지만, 그들은 현재 우리의 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암살이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적호는 나름 근거를 세워 말했다.

암살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에 김신록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적호는 아들이 안심할 만한 말을 떠올릴 만큼 진정한 듯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흑막은 둘을 대신할 자를 구했을 거예요.”

“풍백과 우사가 어린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힘은 만만치 않습니다. 쉽게 대체할 자를 구하긴 어려울 텐데…….”

적호의 말대로 개천 신화 속에 등장한 관리들을 대체할 만한 존재를 찾긴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 존재에 관해선 짐작 가는 바가 있다.

그 단서는 황지호도 같이 들었다.

“용궁에서 나비령이 했던 말이 있어요.”

나비령은 용궁에서 권속을 통해 정보를 전했다.

황지호와 황룡과 함께 들었던 말이다.

―[그분께서는 계약을 빌미로 마족을 굴복시켰지. 덕분에 마계에 파견한 그분의 심복이 돌아왔어.]

그 말을 상기시키고 내 생각을 전했다.

“리플레이와 달리 마족은 계약을 이행하지 못했죠. 그 결과 흑막이 마계에 해 둔 안배를 거둘 수 있게 됐어요. 마계에 파견될 정도면 풍백과 우사를 대체할 만하겠죠.”

마계에 보낼 만큼 신뢰하고 강력한 심복들이 성국언 암살 계획을 주도할 것이다.

또한, TC 연구소에서는 인간들이 무지기의 힘을 다뤘으니, 풍백과 우사가 아닌 자들도 운사의 힘을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흑막은 리플레이와 달리 지력을 이용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암살은 거행될 가능성이 컸다.

“리플레이 속에서 풍백과 우사는 성국언 선배님을 정신적으로 공격하는 데에 힘을 낭비했어요. 역으로 따지면 정신 공격계 이능을 쓰지 않으면 힘이 남는다는 뜻이겠죠.”

여전히 흑막에게는 성국언과 전무영을 흔적도 없이 살해할 만한 힘이 남아 있었다.

처음엔 플마고 속에서 성국언과 전무영은 실종된 것으로 처리된다.

그동안 성국언을 노린 정치적인 공작이 많았다는 것, 성시완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먼저 죽은 것 등을 이유로 그가 자의로 종적을 감추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성국언의 지지자는 이를 믿지 않았다.

성국언이 은광고를 나온 직후의 영상이 담긴 기록 기기들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는데, 이걸 성국언이 망가뜨린 건지 타인에 의해 망가진 건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제일 먼저 단서를 찾은 게 은광고의 패왕이었던가.’

독고미로는 성국언이 절대 자의로 사라진 게 아니라고 믿고 추적했다.

그 결과 낡은 상가에서 비싼 기록 기기 대신 구형 스마트폰에 앱을 깔아 CCTV로 삼던 걸 찾아냈고, 그 영상에서 아주 작게 찍힌 성국언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영상에는 성국언과 전무영이 에어 세단을 급히 탈출했지만, 무언가에 삼켜지는 장면이 흐리게 찍혀 있었다.

독고미로는 익명으로 성국언의 지지자들과 국내외 언론사에게 그 영상을 제공하고 동영상 사이트에 퍼뜨렸다.

이를 두고 조작 영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긴 검증 기간 끝에 사실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성국언이 사라지고, 증거를 찾고, 검증하는 사이에도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져 성국언은 관심 밖의 존재가 되어 큰 의미는 갖지 못했다.

‘수사를 한다고는 했지만, 끝까지 미제 사건으로 남았지.’

국회의원이 납치된 건 큰일이었지만, 한반도에서는 그 사건을 묻어 버릴 만큼 큰일이 자주 발생했으니까.

분위기가 무거워진 가운데, 내 디바이스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알람을 아예 꺼 둘걸 하고 후회했다.

메시지는 용제건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용제건] (사진)

[용제건] ^^

메시지에는 사진과 이모티콘만이 포함되었다.

사진에는 테이블이 찍혀 있었고 그 위에는 샌드위치와 포장용 커피컵이 놓여 있었다.

양을 보니 3인분이었는데, 문제는 저것들이 찍힌 장소였다.

‘여긴 성국언의 지역사무소잖아. 기다리다가 기어코 같이 갔나 보네.’

뒤에 방문객들이 남긴 포스트잇으로 가득한 벽이 보였다.

포스트잇에는 ‘성국언 파이팅!’ 같은 문구가 잔뜩 적혀 있었다.

저 벽을 보면 누구나 저곳이 성국언의 사무실이라는 걸 알 거다.

“저 용이…….”

용제건은 김신록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나 보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김신록의 속을 긁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용제건다웠다.

“……용제건이 제자들을 챙기는군. 이만 일어나지. 이 몸도 너희의 아침을 준비해 주겠다.”

황지호가 용제건에게 경쟁심이라도 느낀 건지 아침밥을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바로 기숙사로 돌아갈까 했지만, 식사를 함께하며 리플레이에 관해 좀 더 대화를 해 두는 게 낫다고 판단하여 호랑이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황지호가 나를 보며 말했다.

“표정을 보니 수를 준비해 뒀나 보군.”

그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위험한데, 아무 수도 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    *    *

성국언과 전무영의 암살 시나리오를 앞둔 현재, 나는 또 다른 거대한 위기와 마주쳤다.

사월세음이 나를 보자마자 다급한 얼굴로 환영했다.

“의신아, 잘 왔어요! 의신이가 없는 동안 힘든 싸움을 해야 했어요.”

사월세음이 나를 지익회관 스터디룸으로 안내했다.

스터디룸에 들어가자마자 핏기 없는 얼굴의 권레나와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는 목우람이 보였다.

스터디룸 한구석으로 시선을 돌리니 타다 남은 돌멩이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잘 보니 수학과의 싸움에서 지쳐 쓰러진 맹효돈이었다.

중간고사가 곧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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