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20)
102. 대책 (3)
옛 한국 지부장은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다.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추측은 할 수 있다. 이 AI를 남긴 이유와 관계가 있겠지.]
아직 연산 오류의 여파가 남아 있는 건가 싶은 의심스러운 답변이었다.
옛 한국 지부장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시험하고자 일부러 답을 숨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확답을 못 하는 이유는 그것과 관련이 있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옛 한국 지부장은 자신의 삶 그 자체가 담긴 막대한 양의 정보를 넘겼다.
그 정보를 분석해 봤지만, 적이 옛 한국 지부장의 광림을 쓸 수 있을 거라는 단서는 없었다.
그런 중요하고 위험한 정보를 건네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답이 나왔다.
“의신이는 할아버지가 답을 못 하는 이유를 아나 봅니다.”
[들어 보지.]
성국언과 옛 한국 지부장의 말에 모든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무언으로 대답을 독촉당하여 내가 생각한 이유를 입에 담았다.
“사후, AI에 정보를 이식하는 과정 중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씀하셨죠.”
옛 한국 지부장의 대련에서 승리했을 때, 그는 AI의 탄생 과정에 관해 밝혔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혼이 묶여 있어서 단서를 남길 수 없었기에 그는 죽은 후에 일을 거행했다.
그래서 그런지 정보는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옛 한국 지부장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단단히 대비를 했는데도 정보 이식이 쉽지 않더군. 사후에 행해서 그런지 업로드 예정이었던 정보의 20%가량이 비어 있다.]
그 20%의 공백에 광림의 비밀이 있었다면 옛 한국 지부장의 AI는 성국언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할 것이다.
내 추측을 들은 이들이 탄식했다.
“할아버지, 그 계약에 관해 자세히 들어야겠습니다.”
[기록되어 있는 정보는 전부 밝히마. 어둠의 시대에 있던 일이다. 나와 계약을 맺은 진족은 마족이었으나, 마족이 아닌 진족도 있었다.]
천동하는 시험을 통과한 후에 바로 정보를 넘겨받는 대신 내게 연락을 했다.
그랬기에 지금 듣는 정보는 대부분 처음 듣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지부장의 말을 통해 동결형 이계와 관련된 사건이 전부 저 계약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챘다.
성국언도, 전무영도 마찬가지였다.
[계약의 대가로 살아 있을 때에는 혼을 묶고, 죽은 후에는 육신을 내주기로 했다. 나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 후, 그들이 내 육신을 회수하기 전에 시뮬레이터에 정보를 옮겼다.]
“강한 플레이어의 시신에 이능의 잔해가 남는다고는 하지만, 그런 정교한 작업을 해내다니…….”
[결국 중요한 정보가 누락되었으니 대단한 건 아니다.]
성국언은 할아버지의 죽음에 감춰진 비밀을 안 후에도 슬픔에 젖는 대신 조부의 활약에 감탄했다.
하지만 옛 한국 지부장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육신마저 빼앗겼는데 슬프지 않았을 리가 없다.
성국언은 그저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숨기는 중인 것 같다.
‘성국언을 위해서라도 비어 있는 정보의 정체를 떠올려야 해.’
흑막이 옛 한국 지부장의 육신을 거둬 갔다고 한다.
이전에는 그저 계약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풍백과 우사가 옛 한국 지부장의 능력을 사용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생각을 마치고 내가 한 추측을 입에 담았다.
“흑막에게는 대상의 의지와 관계없이 상대의 이능을 사용하는 수가 있어요. 가사 상태에 놓인 진족을 상대로 쓰는 걸 봤죠.”
무지기와 구갈안나가 그랬고, 운사도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그중에 먼 옛날에 죽은 인간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생겼다.
“어쩌면 죽은 인간을 상대로도 그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례가 없는 이야기라 받아들이기 어려울 텐데도 여기에 있는 이들 모두가 빠르게 이해했다.
[기억 속에서 손주를 공격한 그 힘은 진정 내 것이 맞나 보군.]
“같은 광림은 두 개 존재하지 않으니 그럴 가능성이 크죠. 사후에 같은 광림을 쓰는 플레이어가 다시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요.”
잠시 말이 없던 성국언이 입을 열었다.
“해야 할 일이 늘었군요. 할아버지의 시신을 되찾아오겠습니다.”
성국언이 믿음직스럽게 선언했다.
아직 시신의 위치와 그들이 사용한 수단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는데도 성국언이 하겠다고 하니 신뢰감이 무럭무럭 차올랐다.
전무영은 성국언의 결정에 따를 생각인지 반대를 표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말할 것도 없이 나도 성국언을 도울 생각이었다.
“저도 도울게요.”
성국언을 위해서, 흑막과 적대할 선한 플레이어들을 위해서라도 그 시신을 되찾아야 했다.
은광고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우수한 플레이어인 성시완과 천동하를 그토록 고전하고, 피폐하게 만든 이능이 아니던가.
성국언은 리플레이 속에서도 자력으로 파훼했지만, 그 정도로 성숙하고 단단한 정신을 가진 플레이어가 흔히 있는 건 아니다.
‘쉽진 않겠지.’
시신을 되찾을 기회는 성국언의 목숨이 위험해질 때 올 것이다.
상당한 리스크를 동반하겠지만, 수가 없는 건 아니다.
‘천동하가 협력을 거절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면 반드시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겠어.’
나는 염치 불고하고 천동하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천동하 선배님도 도와주셨으면 해요.”
“부탁하지 않아도 도왔을 거야. 저분이 사용하는 힘이 악용되게 내버려 둘 수 없어. 한반도를 위해 헌신하셨던 분의 시신이 그런 대접을 받는 것도 화가 나.”
천동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일에 끌어들여 미안하면서도 선배들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 * *
귀가하는 길, 에어 세단 안.
자동 운전 모드를 사용할 때에도 습격으로 기능이 망가지는 경우를 대비해 늘 운전석에 전무영이 앉으나 지금은 달랐다.
운전석에 앉은 성국언을 보다가 전무영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시험 전에 그분의 능력을 알고 있었으니 후배들에 비해 훨씬 유리한 입장이었죠. 그런데도 이런 꼴이라니, 면목 없습니다.”
대화가 일단락된 후, 전무영은 옛 한국 지부장의 시험에 응했다.
천신만고 끝에 통과하긴 했으나 눈에 띄게 피폐해졌다.
잠시 쉬었다가 이동했는데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무영아, 이능에는 상성이 있는 법이다. 신경 쓰지 마라.”
전무영은 이능 상성이 아니라 정신력 문제를 들고 싶었지만, 자학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입을 다물었다.
성국언은 이를 두고 길게 말할 생각이 없는지 금세 화제를 돌렸다.
“몰랐던 게 많군. 그렇지 않나? 할아버지의 유지를 이런 식으로 이을 줄이야.”
성국언은 오늘 얻은 정보를 두고 이야기를 꺼냈다.
혈연이었던 존재가 엮여서 그런지 평소보다 감상적이었지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조의신이 건넨 데이터 칩에 어떤 정보가 들어 있을지, 후배들이 어떤 활약을 할지를 두고 기대하는 마음이 커 보였다.
성국언을 관찰하던 전무영이 평했다.
“할아버님의 비밀보다 용제건 선생님의 진의에 더 놀라셨던 것 같습니다.”
“하핫! 오늘 안 비밀은 내가 예상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선택한 최후도 그분다웠지. 하지만 용제건 선생님은…….”
호쾌하게 웃던 성국언이 착잡해하며 미소 지었다.
리플레이 후, 성국언은 용제건과 긴 대화를 나눴다.
그 대화에는 용제건의 리플레이 속 행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성국언이 아는 것과 현실의 상황을 고려하면 모순점이 없었다.
“그 유희계 용족이 선생님을 살리기 위해 소원을 빌고 있었고, 선생님이 응하지 않았다니. 리플레이 속의 나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다.”
용제건은 성국언과 전무영의 반응을 즐기며 자신이 겪은 것들을 털어놓았다.
가볍게 할 수 없는 이야기도 포함되었지만, 용제건은 거침없었다.
‘더 이상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기에 쉽게 말하는 듯했지.’
실컷 이야기하며 반응을 관찰한 후, 용제건은 이번엔 두 사람의 리플레이에 관해 들려 달라며 청했다.
용제건은 리플레이 속에서 자신이 죽은 이후의 상황을 몹시 궁금해했다.
참담한 미래에 관해 묻는 건 악취미로 보였으나 이해는 갔다.
성국언도 궁금한 게 있었다.
“가든 속이라고 하나 죽기 전 단서를 남겼다. 내가 남긴 단서가 잘 전해졌을지 모르겠구나.”
성국언은 늘 진족을 경계했으므로, 진족이 인식하지 못하도록 특별한 이능을 사용해 단서를 숨겼다.
그 단서가 어떻게 됐을지 신경 쓰였다.
조의신은 알고 있겠지만, 직접 묻는 건 꺼려졌다.
‘리플레이에 관해 말할 때마다 괴로워 보였다. 악몽에 밀어 넣었다고 자책할 필요가 없는데.’
그래서 오늘 감사 인사와 칭찬을 퍼부었는데 효과가 미미한 것 같았다.
성국언은 조만간 구실을 잡아 후배에게 고마움을 표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은 일찍 쉬지. 법률 세미나에 필요한 자료는 출발 전에 읽어도 충분하다.”
어느덧 에어 세단이 자택에 도착했다.
세단에서 내리기 전, 성국언이 전무영에게 당부했다.
“그러니 의신이가 네게 남긴 숙제는 오늘 하지 말고 미뤄 둬라.”
* * *
여전히 벚꽃이 만개한 가운데, 은광고 학생들은 중간고사를 치렀다.
몇몇 반 아이들은 시험을 보기 위해 등교 거부생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역시나 오지 않았다.
구슬비와 옹길동도 내내 결석했다.
‘관심을 열심히 주면 시험 기간에는 등교하겠지만, 괜히 그랬다가 페이스가 무너져서 성적이 떨어질 수도 있어. 내버려 두자.’
그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봄 소풍 때에는 반드시 부르기로 했다.
가을 소풍 때 제 몫의 단체 의상이 없다고 착각한 바람에 크게 서운해하지 않았던가.
안 부르면 생난리를 부릴 게 분명했다.
저렇게 학업에 연연하지 않는 관종들이 있는 반면, 중간고사에 매우 진지하게 임한 학생들도 있었다.
[염준열] 스승님, 3학년에는 꼭 수석을 차지할게요.
[염준열] (스탬프)
염준열이 보낸 스탬프에는 벚꽃 아래에서 공부하는 홍룡이 그려져 있었다.
중간고사를 맞이한 염준열을 응원하기 위해 용족의 디자이너가 만든 듯했다.
천동하가 옛 한국 지부장의 시험에 응하느라 시간을 소모한 걸 고려하면 염준열이 유리해 보였다.
하지만 염준열도 여러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고, 천동하는 평소보다 수석 사수를 위해 더욱 힘썼다.
‘동생 천은하가 수석을 할 테니 자신도 수석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지.’
천동하는 워낙 뛰어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계속 2등 했다고 미쳐 버린 우기환처럼 성적에 목을 매는 타입이 아니다.
그런 천동하에게 강력한 동기가 생겼으니 3학년의 성적 경쟁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2학년은 주수혁과 안다인이 당연히 전과목 만점으로 공동 수석을 할 거고, 1학년은…….’
수석 타도를 외치며 열심히 공부하는 은서호와 은이호에게는 미안하지만, 은호가 1등을 놓칠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1학년에는 차석원도 있지 않은가.
두 후예가 은호와 차석원의 벽을 넘어서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이런 예상을 입에 담아 둘의 사기를 꺾는 짓은 하지 않았다.
열심히 하는 후배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게 선배의 의무 아닌가.
“의신이 형 덕분에 반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했어요. 1학년 반 평균 1등을 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중간고사 당일, 기숙사 식당에서 마주친 은호가 말했다.
저 말은 과장된 것 같긴 하지만, 후배들이 첫 시험을 열심히 준비했다니 참 반가운 소식이었다.
중간고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