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23)
102. 대책 (6)
중앙 구역, 동아리회관 내부에 위치한 소형 체육관.
태호권 소모임에서 훈련장으로 자주 사용하는 이곳은 지금 비무를 앞두고 있다.
진정묵은 정파에 속한 무림인답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정정당당하게 비무를 청하므로 그의 비무에는 늘 구경꾼이 많았다.
싸움 구경 좋아하는 은광고 학생들이라면 놓치고 싶지 않은 자리겠지만,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진정묵이 하는 비무 구경을 좋아하는 애들도 있던데, 안 됐네.’
이번 비무는 진정묵이 도전한 게 아니라 중간고사 공부를 도와준 대가로 한이가 청한 거다.
한이와 진정묵이 조용히 대련 약속을 잡은 덕분에 소식이 별로 퍼지지 않은 듯하다.
그렇기에 인원수가 적었지만, 내가 예상한 이들은 이 자리에 있었다.
바로 자칭 한이의 친우들이었다.
“한이야, 잘 싸워! 보고 있을게!”
“하하하하! 이 몸의 친우가 어떤 싸움을 보여 줄지 기대되는군.”
독고미로와 황지호가 제일 좋은 자리를 잡고 대기 중이었다.
늙은 호랑이야 아무리 바빠도 분신을 굴리면 된다 쳐도 독고미로가 여기에 있어도 괜찮은 걸까?
‘아직 상세한 일정은 안 잡혔지만 신곡 발표를 앞뒀으니 할 게 많을 텐데. 그래도 계속 바빴을 테니 쉬어 가는 것도 좋겠지.’
중간고사가 끝난 지 얼마 안 됐으니 좀 쉬어도 누가 뭐라 하진 않을 거다.
우리 반 아이들은 그 외에도 더 있었다.
“두 분이 한이를 응원하시니까 저와 우람이는 정묵이를 응원할게요!”
“그러면 공평할 것 같습니다.”
동아리 모임이나 외부 활동, 등교 거부를 하지 않아 비교적 한가한 사월세음과 목우람이 진정묵 쪽에 앉아 있었다.
그러면 나와 김유리는 중립을 유지하는 게 좋겠다.
같은 생각인 건지 김유리가 두 사람을 응원했다.
“둘 다 잘해! 파이팅!”
한이와 진정묵이 우리 쪽을 향해 손을 흔들곤 자리에 섰다.
참고로 심판은 함근형 선생님이었다.
아마 함근형 선생님을 부른 건 진정묵일 거다.
하도 비무를 많이 하고 다니는 진정묵을 두고 골머리를 썩이던 함근형 선생님이 심판을 볼 테니 대련할 때마다 부를 것을 권고했고, 진정묵이 이를 받아들인 상태다.
“각자 제자리에.”
함근형 선생님이 선언하자 태호권 소모임 소속원들이 연습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봤다.
그중에는 공청훤도 있었다.
은광고의 유명한 비무광과 제자가 대련을 한다면 좀 걱정할 법도 한데 저렇게 평안한 얼굴을 한 걸 보니 과연 난세를 헤쳐 나온 신인이었던 자다웠다.
비무 시작 직전, 진정묵이 말했다.
“소생에 비해 실전 경험이 적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오. 강호 선배로서 삼초(三招)를 양보하겠소. 먼저 오시오.”
“……?”
고수는 상대가 세 번의 초식을 마칠 때까지 반격하지 않는다는 무림인들의 암묵적인 강호 법칙이 등장했다.
안타깝게도 한이는 무협물을 접한 경험이 없는 건지 진정묵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그럴 거다.
어쩌면 3초(秒) 동안 양보하겠다는 소리라고 짐작했을지도 모르겠다.
“잘됐다! 3초 내로 쓰러뜨려!”
“그 3초가 아닐 거다. 하나 3초 내로 쓰러뜨리는 건 괜찮은 생각이군.”
한이가 저쪽을 보는 중이 아니라 입 모양이 보이지 않을 텐데 자칭 친우들이 열심히 훈수를 뒀다.
한복판에서 그 광경을 보는 함근형 선생님은 심경이 복잡한 건지 험악한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런 와중에도 함근형 선생님은 심판의 의무를 수행하셨다.
“……시작!”
함근형 선생님은 한이가 알기 쉽게 이능파도 터뜨려 시작 신호를 줬다.
한이는 곧바로 도복 자락을 날리며 달려들었고, 진정묵은 허리춤에 찬 연검을 빼 들었다.
명치를 노렸던 주먹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빗나가자 한이는 유연하게 손을 움직여 손날로 목젖을 내리치려 했다.
카앙!
하지만 그 전에 진정묵의 연검의 면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보호대와 연검이 맞닿아 ‘기긱’ 하고 소리를 내며 대치 상태에 놓였다.
한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3초 지났어.”
“아직 세 초식을 견문하지 못했소.”
“……아.”
그제야 한이는 진정묵이 무림인이라는 걸 떠올린 것 같았다.
진정묵은 제가 한 말을 지켜 한이가 발차기 기술을 선보인 후에야 움직였다.
본격적으로 비무가 전개되자 반 아이들도 흥분했다.
“우와, 둘 다 엄청 빨라요! 잘 못 봤는데…… 방금 한이가 연검을 부러뜨리려고 유도한 게 맞나요?”
“비슷합니다. 연검을 바닥에 꽂히게 하려 했습니다.”
“연검의 움직임을 봉하려는 건 좋은 시도다. 하나 저리 움직이는 걸 땅에 박히게 만드는 건 어렵겠지.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겠군.”
“한이야, 그냥 검을 박살 내 버려!”
연검의 날과 보호대가 부딪치는 소리가 체육관을 채웠다.
어느덧 예의 연검의 장치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와 파우더블루색의 이능파와 섞였다.
진정묵이 이능파를 갈무리하고 싸우기 어려울 만큼 한이가 선전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비무의 전개가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한이를 과소평가했어. 진정묵은 초반을 제외하면 봐주고 있지도 않은데, 이 정도로 싸우다니. 1학년 때보다 훨씬 움직임이 빠르고 정교해.’
진정묵은 관종 콤비를 동시에 상대하고, 학생부회장 곽경구와 교사 노영미에게 승리에 가까운 무승부를 따낼 만큼 강하다.
1학년 때 한이와 함께한 실습, 대련 등으로 판단해 봤을 때, 한이는 진정묵보다 몇 수 아래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게다가 2학기부터는 성적도 떨어져 심적인 컨디션 난조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 비무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한이의 성적이 떨어졌던 건 필기시험보다 훈련을 우선시했던 탓이 아닐까?’
문득 한이와 독고미로의 대련이 떠올랐다.
한이는 독고미로에게 완패하고, 결과에 승복하여 다시는 옛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한이의 속마음은 알 수 없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냥 겉보기에 그럴 뿐, 한이는 재도전을 위해 힘을 기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이야……!”
“하하하하! 훌륭하다. 이제 연검의 이동 경로를 예측해서 대응하는군!”
독고미로는 한이의 선전에 기뻐하면서도 놀랐지만, 황지호는 그저 즐거워했다.
황지호가 놀라지 않는 꼴을 보니 한이가 힘을 키우고 있었다는 걸 알았나 보다.
둘은 매우 치열하게 싸웠으나 비무가 길어지자 형세가 기울었다.
한이가 연검의 움직임을 간파하는 것보다 빠르게 진정묵이 태호권의 초식을 파훼해 갔다.
게다가 비무가 길어지자 둘 다 체력이 처음보다 떨어졌는데, 실전 경험이 많은 진정묵이 더 노련하게 대처했다.
마침내 진정묵의 검날이 한이의 미간 앞까지 도달했다.
“그만!”
승패가 가려졌다고 판단한 함근형 선생님이 비무를 중단시켰다.
진정묵이 검을 멈추지 못할 때를 대비한 건지 함근형 선생님의 손에는 활과 화살이 들려 있었다.
또, 공청훤은 소리 없이 이동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준비를 마쳤다.
다행히 진정묵의 연검은 한이의 피부를 찢는 일 없이 거두어졌다.
“진정묵 승!”
진정묵이 구슬땀을 흘리며 포권지례를 취했다.
“좋은 비무였소. 학관에 이 정도로 뛰어난 권법을 구사하는 학우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소. 소생의 식견이 부족했소이다.”
검법에만 관심이 있던 진정묵이 저리 말할 정도라니.
한이는 진정묵이 사용하는 낯선 단어를 해석하는 데에 조금 걸린 듯하지만, 알아들은 것 같았다.
“……대련해 줘서 고마워.”
“다음에 또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소.”
두 사람의 비무는 후일을 기약하며 훈훈하게 끝났다.
반 아이들은 관중석에서 내려가 두 사람의 훌륭한 대련을 칭찬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대로 뒤풀이 겸 저녁 식사까지 할 분위기지만, 나와 김유리는 함께할 수 없었다.
“의신아, 우리 지각하기 직전이야!”
“서두르자.”
학생회관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지만, 정시에 도착하기 위해 스킬을 써야 했다.
김유리는 스프린터 스킬을 사용하고, 나는 광림을 발동해 민그린의 다릿심을 빌렸다.
간신히 시간에 맞춰서 도착했더니 금찬솔과 왕찬솔이 개난리를 쳤다.
“아, 너네는 왜 지금 와!”
“아니, 학년 올랐다고 너희도 이제 마지막 입장을 노림?”
어수선한 대회의실 분위기를 보니 매번 그렇듯 선배놈들이 사고를 친 듯하다.
또 마지막 등장에 집착하다가 저 꼴이 난 듯한데, 이야기를 듣자 하니 나나 김유리가 없어도 금찬왕찬의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을 듯했다.
“의신이 형, 유리 누나! 저랑 은하가 선배님들을 찾았어요. 어딘가 숨어 계실 것 같았거든요. 저는 못 찾았는데 은하가 바닥 마감재가 새것인 부분을 찾아서…….”
1학년 0반 대표로 온 은서호가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금찬왕찬은 이번에 바닥에 숨어 있다가 은호한테 걸린 모양이다.
은호는 이능을 쓰지도 않고 선배놈들을 찾아냈다고 한다.
은서호는 이 이야기를 하는 내내 천은하의 이름을 몇 번이나 입에 담았는데, 은호는 자리에 앉아 부드럽게 웃으며 지켜볼 뿐 이쪽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 대신 은호는 금찬왕찬이 복수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천동하에게 자신은 괜찮다고 안심시켜 주었다.
‘은서호와 은호는 묘하게 거리가 있어 보이네.’
은서호는 천동하와 이야기하는 은호를 곁눈질하다가 눈꼬리를 내렸다.
서운해하는 것 같아서 대신 나와 김유리가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러던 중, 염준열이 단상 위에 올라왔다.
“선배님 올라오셨다. 서호야, 그럼 다음에 얘기하자.”
“네, 유리 누나!”
김유리는 죽호의 제자, 안다인의 절친으로서 호랑이 저택에 드나들다 보니 은서호와 많이 친해진 것 같다.
조금 기운을 차린 은서호가 은호 옆에 앉는 걸 보고 이동했다.
‘2학년 줄에 앉으니 뭔가 어색하네.’
2학년 쪽 좌석으로 이동하던 중, 갑자기 눈앞이 밝아졌다.
2학년 1반의 반장과 부반장으로서 주수혁과 안다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학급 운영 자료를 검토하며 이야기 중이었는데, 그 모습이 몹시 단란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조의신, 자리에 안 앉고 뭐 하냐.”
2학년 4반 부반장으로서 참석한 유상훈이 시큰둥한 얼굴로 내 감상을 방해했다.
저놈은 작년에도 학급 임원을 하기 싫어하더니만 올해 또 하게 됐나 보다.
‘저대로 가다간 유상훈이 농구부 주장도 하게 될 것 같은데.’
유상훈이 알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유상훈이 PlayerZ의 OBT 트레일러에 출연할 정도로 게임에 빠져 있긴 하지만, 여전히 농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 마음과 실력을 높이 사 농구부에선 유상훈을 차기 주장으로 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꼭 그 귀찮은 자리를 유상훈이 맡길 바란다.
“지금부터 1/4분기 학생 대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염준열의 개회 선언과 함께 1/4분기 학생 대표 회의가 시작되었다.
3학년이 된 염준열은 작년보다 더 매끄럽게 회의를 진행했다.
각 자치 기구의 정기 보고, 학급 임원 보고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0반에서 사고를 쳤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이 예상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다음으로 기획 중인 일정 등에 대한 발표와 설명이 이어졌다.
“이어서 한중일 청소년 교류전 일정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 대략적인 일정이었지만, 청소년 교류전은 여름방학에 진행된다고 한다.
세 국가의 참가자가 일정을 조정하려면 방학 기간에 맞추는 게 편할 거다.
“참가자 후보 명단은 작년에 작성되었습니다만, 1학년 학생들에게도 참가할 기회를 주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 의견을 수렴하여 예선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기존에 추천받은 후보자분들을 대상으로도 예선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물 흐르듯 기획안을 발표하던 염준열이 문득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만 본 게 아니라 내 뒤에 앉은 주수혁, 안다인도 본 것 같았다.
“특히 은광고 학생 홍보 대사 여러분들은 필히 참가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