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28화 : 헌화 (2)
103. 헌화 (2)
5월 8일 토요일.
오늘은 어버이날이자 2학년 1반의 담임 김신록의 생일이었다.
여태까지 김신록이 생일을 밝힌 적은 없었으나 안다인의 진정성 넘치는 설득에 감화되어 알려 주었다고 한다.
김신록은 어버이날이 주말이기도 하니 부모님과 보낼 것을 권했으나 학생들은 점심 식사와 특별히 주문 제작한 곶감 케이크를 같이 먹겠다고 버텼다.
그리하여 주수혁을 비롯한 2학년 1반 학생들은 김신록과 점심 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주수혁은 오전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은광구로 향하기로 했다.
“조사를 마쳤습니다. 디바이스를 확인해 주십시오.”
“철이 형, 감사합니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에어 스트레치드 리무진 안, 경호원 겸 비서인 김철이 보고서를 넘겼다.
보고서는 맹효돈에 관한 내용이었다.
주수혁도 서문 앞에 있었던 사건에 휘말릴 뻔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었으나 사실상 친구를 걱정하는 사심에서 비롯된 조사였다.
보고서를 읽을수록 주수혁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효돈이가 중학생 시절에 계속 대회에 출전하고, 은광고에 입학하고도 등교하지 않았던 이유가…….’
주수혁과 맹효돈은 청소년 스포츠 대회 예비 플레이어 부문 결승에서 수차례 우승을 두고 다툰 사이였다.
자주 마주치다 보니 자연스레 라이벌 취급을 받고, 그러다 주수혁이 먼저 말을 걸어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주수혁은 맹효돈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맹효돈은 세 끼를 만족스럽게 먹지 못할 정도로 불우한 처지에 있었고, 대회에서 번 상금은 다 아버지의 술값과 노름빚을 갚는 데에 쓰였다는 것.
은광고 합격과 동시에 파이트 클럽에 끌려갔다는 것.
작년 초, 최편득의 몰락과 은광구에서 야밤에 일어난 에너미 소동이 맹효돈의 탈출과 관계가 있다는 것도.
‘조금만 생각하고, 잘 알아봤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 텐데.’
주수혁은 중학교 시절의 맹효돈을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상한 일이 많았다.
대회 상금으로 웨어러블 디바이스나 스마트폰을 사고도 남을 텐데 연락처가 없던 것부터 이상했다.
특별 입학 전형 조건을 충족한 맹효돈이 은광고에서 보이지 않았을 때에도 뭔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주수혁이 움직이기 전에 맹효돈이 등교했고, 그대로 위화감을 잊고 살았다.
“지난 소동으로 인해 보석이 취소되어 구치소에 구금되었다고 합니다. 황명 재단 법무팀과 협회에서 대응하고 있으니 이쪽에서 개입할 여지는 없을 듯합니다.”
김철이 주수혁을 위로하듯 말했다.
하지만 주수혁의 귀에 그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맹효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열심히 먹을 것을 권하는 사월세음.
속상한 마음을 숨기고 애써 밝게 맹효돈의 교복을 털어 주던 김유리.
인상만으로 상대를 기절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흉악한 얼굴로 나타난 함근형.
죄책감 어린 얼굴로 양호실로 맹효돈을 이끌던 조의신.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모습이 주수혁의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저 중에서 맹효돈을 가장 오래 알고 지냈던 건 주수혁이었고, 막을 힘도 있었는데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운이 나빴다면 효돈이는 아직도 파이트 클럽에 있었을 거야. 그때 그 건물을 부순 자와 밤 중에 우연히 에너미를 발견하고 토벌한 함근형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주수혁은 위화감을 느꼈다.
과연 맹효돈이 탈출한 게 우연일까?
그 당시 적벽괴도가 환몽 게이트의 존재를 폭로했는데도 최편득과 파이트 클럽은 건재했다.
최편득 하면 은광고인들이 치를 떠는데도 은광구 정화 사건 전까지 그는 떵떵거리며 지냈다.
환몽 게이트 건으로 최편득이 몸을 사렸을 텐데도 우연히 어느 의인이 파이트 클럽을 발견해 부수고, 우연히 함근형이 한밤중에 맹효돈의 탈출을 도왔다는 건 이상했다.
‘그날 의신이는 왜 자기 탓인 것처럼 굴었을까? 나처럼 예전부터 효돈이랑 알고 지낸 것도 아닌데.’
맹효돈이 친부에게 습격당했을 때, 조의신의 모습은 단순히 책임을 느끼는 부반장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수상했다.
조의신은 반장인 김유리나 담임인 함근형보다 더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조의신이 보이는 수상함과 위화감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여 왔다.
조의신은 은광고 수석이자 이계 공략을 활발하게 하는 주수혁과 안다인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지만, 굉장한 수준의 플레이어였다.
주수혁의 그런 추측이 확신으로 굳어진 건 크리스마스였다.
크리스마스를 떠올린 주수혁이 눈을 크게 떴다.
‘크리스마스 날, 의신이는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었어. 그리고 보고서에 나온 파이트 클럽에 나타난 자도……!’
크리스마스에 은광고를 덮은 검은 눈을 뒤로하고 명계로 향하던 조의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의신은 그날 까마귀 가면을 썼다.
또한 구갈안나의 힘을 사용하던 우마왕을 상대했다.
조의신은 우마왕이 준비한 비장의 수를 신보 루의 창으로 격파했는데, 이는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대응이었다.
‘그런 거대한 계획을 알고 있을 정도로 의신이의 정보력이 뛰어나다면, 파이트 클럽을 무너뜨렸다 해도 이상하지 않아. 의신이가 부탁하면 함근형 선생님도 움직였을 거고.’
주수혁의 머릿속에선 이미 까마귀 가면을 쓰고 파이트 클럽을 무너뜨린 자가 조의신으로 여겨졌다.
환몽 게이트에 연루된 최편득이 운영하던 파이트 클럽 하니 자연스레 적벽괴도도 떠올랐다.
“어쩌면 의신이가…….”
“……도련님?”
김철이 부르자 주수혁이 혼잣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부탁을 하나 했다.
“철이 형, 환몽 게이트와 파이트 클럽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조사해 주세요. 언론에 공개된 사항 외에도 주오 그룹 측에서 확보하고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조사가 완료되면 보고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그 이후로 주수혁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김철은 묵묵히 운전하며 생각했다.
‘도련님은 맹효돈을 구한 게 조의신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군.’
고작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그런 일을 벌였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지만, 그게 조의신이라면 납득이 갔다.
조의신은 입학 전부터 이명을 받았고, 크리스마스에 대활약을 하지 않았던가.
다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있었다.
주수혁과 조의신이 같이 휘말린 사건에서 유일하게 조의신의 활약이 없다시피 했을 때가 있었다.
바로 키모폴레이아호 사건이었다.
‘그 정도로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생각이 깊은 아이가 위기를 앞두고 아무것도 안 했을까?’
키모폴레이아호에서 조의신이 이계 공략에 참가하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배가 넓다 보니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어린 학생이다 보니 배 위에서 싸우는 건 무서워서 발을 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당장 도시후만 해도 뱃멀미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다른 학생 하나가 싸우지 못했다 해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까마귀 가면이 조의신이라면, 검은 눈을 내린 조의신이라면 아무것도 못 했다는 쪽이 말이 안 됐다.
‘도련님과 친구들은 그 시각에 조의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김철은 예의 그 ‘의문의 휘파람을 분 자’를 찾기 위해 선내의 모든 플레이어들의 타임라인을 확인했다.
자연 이능파 방출에 대응하던 때, 행방을 확인할 수 없던 플레이어가 몇 명 있었고 그중 하나가 조의신이었다.
‘사관학교 교류전 개막식의 경기장에도 조의신이 있었지!’
김현구와 박승현이 개막식에서 그 휘파람을 들었다고 증언하였기에 김철은 그날 경기장 상황에 관해 조사했다.
김철의 기억대로라면 조의신은 신문부 소속 기자로서 여러 곳을 취재했다.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조의신이 작성한 기사도 읽어 보았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김철이 운전대를 꽉 움켜쥐었다.
오래도록 찾고 있었던 은인의 정체를 알아낸 것 같았다.
* * *
5월 8일, 어버이날.
주말이었지만 교복을 입고 기숙사를 나섰다.
나 혼자가 아니라 맹효돈도 함께였다.
맹효돈은 그날과 달리 깨끗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봉안당 근처에 꽃집이 있어. 거기에서 카네이션 사자.”
“어…….”
맹효돈의 친부가 유골을 가지고 협박한 건 때문에 모셔 두는 곳을 옮기기로 했다.
황지호는 은광구 내에 있는 봉안당, 내 가족의 가짜 유해가 있는 곳으로 옮길 것을 권했고, 맹효돈이 이에 동의했다.
‘아무 반항도 못 하고 맞기만 할 정도로 어머니의 유골을 걱정했어. 어버이날이기도 하니 직접 가 보는 게 좋을 거야.’
맹효돈은 작년 어버이날에 생각이 많아 보였는데, 올해는 그 고뇌가 더욱 무거워진 것 같았다.
플로리스트가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골라 줄 때에도 맹효돈은 내내 말이 없었다.
“우리 가족 근처로 모신다고 들었어. 이쪽이야.”
봉안당의 복도를 걷던 맹효돈의 발걸음이 멈췄다.
낡은 사진을 디바이스로 스캔한 듯, 화질이 떨어지는 홀로그램 앞이었다.
묻지 않아도 맹효돈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맹효돈은 어머니 얼굴을 보고 나니 안심이 된 건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힘이 빠지는 바람에 맹효돈이 카네이션 바구니를 떨어뜨릴 뻔한 걸 내가 붙잡았다.
맹효돈이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는 사이, 나는 우리 가족의 자리를 살폈다.
‘관리가 잘되어 있어. 계절에 맞는 조화도 장식되어 있고…….’
다른 자리에는 조화가 없는 걸 보니 봉안당 측에서 해 준 건 아닌 듯했다.
호족이 신경 써 준 걸까?
저번에 우리 가족에게 헌화해 준 호족들을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엄마, 얘가 나 구해 준 우리 반 부반장이야.”
한참 동안 말없이 사진을 보던 맹효돈이 나를 소개했다.
맹효돈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서 일부러 그쪽을 보지 않고 인사를 대신해 꽃을 올렸다.
“……부반장, 고맙다.”
맹효돈은 우리 가족에게도 헌화한 후에 입을 열었다.
“너도 우리 가족한테 헌화했잖아.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아, 그거 말고. 헌화한 것도 고맙긴 한데…….”
맹효돈은 말이 잘 안 나오는지 ‘에이씨’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잠시간 입을 다문 맹효돈이 다시 말했다.
“……나가기 전에 너한테 상담할걸. 미안.”
맹효돈이 자진해서 그날 일을 꺼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헌화한 게 맹효돈이 마음의 안정을 찾도록 도운 것 같다.
“아니야. 가족이 걸린 문제니까 당황했겠지. 대신 다음부터는 상담해 줘. 말하기 곤란한 상황이거나 시간이 없으면 단서를 남겨.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 대응할게.”
“어어…….”
이참에 맹효돈에게 당부의 말을 쏟았다.
맹효돈은 머리가 아파 보이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봉안당을 나섰을 때였다.
“나도 인사드려도 되겠느냐?”
봉안당 앞에 탁거산이 와 있었다.
탁거산은 맹효돈의 친부와 플레이어 일당을 흠씬 두들겨 팬 건으로 조사를 받느라 바빴는데, 여기에 온 걸 보니 잘 풀린 것 같다.
맹효돈은 탁거산을 보자 반가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날 보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밝은 얼굴이었다.
“……네!”
“허허, 대답이 시원하니 좋구만. 안내해 다오.”
맹효돈이 씩씩하게 대답하며 앞장서자 탁거산이 뒤를 따랐다.
탁거산이 왔으니 안전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두 사제가 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기로 했다.
‘맹효돈 덕분에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드렸네.’
작년에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내년에도 챙겨 드리는 게 좋겠다.
기숙사로 향할 때였다.
[황지호] 조의신, 생일 파티를 열 예정이다.
평소라면 그래서 뭐 어쩌란 건가 하고 넘어갔겠지만, 이번엔 무시할 수 없었다.
호족이 선물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화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던 탓이다.
[황지호] 저택으로 와라. 마중을 보냈다.
황지호는 처음부터 봉안당 앞에 호족을 대기시킨 듯했다.
에어 리무진을 보냈나 해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천사와 내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보였다.
“…….”
왕!
마중 나온 건 백호군과 천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