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29화 : 헌화 (3)
103. 헌화 (3)
천사와 함께하는 최고로 행복한 산책길을 걷다 보니 호랑이 저택에 도착했다.
대문 앞에 서니 정말로 내가 김신록 생일 파티에 끼어들어도 되나 하는 의문이 솟아올랐는데, 백호군이 천사의 리드를 넘기는 바람에 생각이 멈췄다.
‘왕!’ 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본채에 도착해 있었다.
천사가 천재라서 순간 이동을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리가 짧게 느껴졌다.
“어서 와라. 기분은 어떻나? 흠, 괜찮아 보이는군.”
황지호는 음식을 하다가 나온 건지 교복 셔츠 소매를 접어 올렸고, 하프랩 앞치마를 착용하고 있었다.
기분이 어떻냐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는데 황지호는 혼자 관찰하다가 등을 돌렸다.
“앉아 있거라. 김신록은 아직 오지 않았다. 얼른 준비하지.”
“황호, 음식 가짓수를 다시 확인해야겠습니다. 곶감은 충분합니까?”
“하하하! 물론이다. 네 아들은 물론 백호가 먹을 몫도 충분하니 걱정 안 해도 된다.”
백호군이 황지호와 적호의 대화를 들으며 미간을 좁혔지만, 두 호랑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황지호에게서 달달한 향이 나던데 오늘은 김신록의 생일을 맞아 곶감 파티를 열 것 같다.
‘이렇게나 축하하고 싶었으면 작년에도 챙기지.’
작년 이맘때쯤의 김신록과 적호의 관계를 생각하면 생일 파티는 턱도 없긴 했다.
김신록의 생일 파티를 열기는커녕 적호와 얼굴을 봤을지도 의문이다.
작년 어버이날, 김신록은 은호의 후예들이 종이 카네이션을 만들도록 재료를 준비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김신록이 적호에게 카네이션을 건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휴, 완성했다!”
“생일 파티 전에 드릴 수 있겠다.”
“작년보다 잘 만든 것 같지 않아?”
거실 한구석, 은호의 후예들이 카네이션을 만들고 있었다.
작년과 다르게 올해는 종이가 아닌 펠트 소재로 카네이션을 만들었다.
‘여전히 엉성하네.’
은호의 후예들이 열심히 만들긴 했는데 어째 결과물은 미묘했다.
카네이션을 만들고 있다는 걸 몰랐다면 무엇을 만들려고 했는지 알기 어려웠을 거다.
그래도 색 배합을 보면 카네이션 느낌이 나긴 했다.
손재주가 좋은 은호가 도와줬다면 결과물이 많이 달라졌겠지만, 후예들이 만든 카네이션에는 개성과 정성이 느껴져 나쁘지 않았다.
“다 만들었나?”
“네! 황호 님, 백호 님! 꽃 받아 주세요!”
“의신이 형 몫도 있어요!”
작년에도 그렇고, 어버이날에 내가 후예들에게 꽃을 받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천사가 입에 펠트 카네이션을 물고 등장하자 감사와 찬사밖에 나오질 않았다.
“이건 도와준 산령 거!”
“나도?”
호랑이들이 꽃을 받는 사이 블록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던 산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 계속 이쪽 눈치를 보더니만 받고 싶었나 보다.
꽃 전달식은 간결하게 끝났다.
‘이건 은호의 후예들이 한 제안이라고 했지.’
김신록의 생일을 호랑이 저택에서 챙기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은호의 후예들은 메인 이벤트는 자신들의 꽃 전달식이 아닌 김신록의 생일 파티로 하고 싶다고 했다.
그 결과, 꽃 전달이 빠르게 끝났는데, 꽃을 받지 못한 호랑이가 하나 있었다.
‘적호는 은호의 후예들이 만든 꽃은 나중에 받겠다고 했지.’
적호가 누구한테 카네이션을 받고 싶은지는 뻔했다.
적호가 기다리던 이가 마침내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김신록 선생님을 바래다드리러 왔어요.”
“……안녕하십니까.”
웃고 있는 안다인과 다르게 김신록은 시들시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2학년 1반에서 김신록의 생일 파티를 하는 데에 성공했다는데 저 얼굴을 보니 무사히 축하를 받고 온 것 같다.
“잘 놀다 왔나 보군. 들렀다 가겠나?”
“그러면 좋겠지만, 사양할게. 이 좋은 날에 선생님의 시간을 더 빼앗기 미안한걸. 또, 엄마와 아빠가 기다리고 계셔.”
안다인이 황지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저 말에서 오늘 하루 스승과 부모님을 다 챙기겠다는 안다인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안다인이 김신록을 두고 현관을 떠나려 할 때였다.
“안녕, 나도 왔어. 초대해 줘서 고마워.”
등장할 타이밍을 재고 있던 용제건이 불쑥 나타났다.
일부러 기척을 죽이고 있던 걸 보니 상대를 놀라게 만들고 반응을 보려 했던 것 같았다.
안다인과 김신록은 용제건이 저리 가까이 있는 줄 몰랐던 건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본 용제건은 흡족해했다.
‘하나 있는 친구를 생일 파티에 안 부르는 것도 좀 그렇지.’
저런 식으로 의미 없는 장난질을 해도 말이다.
안다인은 철없는 용제건을 향해 희미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비웠다.
용제건보다 안다인이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다.
김신록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용제건을 한심해하며 바라보았다.
팡!
김신록이 거실에 들어왔을 때, 곳곳에서 폭죽이 터졌다.
특수 제작한 이능 아이템 폭죽이 터지자 붉은 비단색의 빛이 퍼지고, ‘생일 축하’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폭죽을 터뜨린 건 은호의 후예들과 산령 그리고 백호군이었다.
“아들아, 생일 축하한다!”
붉은 빛을 등진 적호가 곶감 떡 케이크를 들고 외쳤다.
김신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생일 파티를 하고 왔으면서 왜 이건 예상하지 못한 거지?’
호랑이들이 오늘 김신록을 불러낸 것도 그렇고, 용제건이 튀어나와서 초대 운운한 것도 그렇고, 다들 대놓고 생일 파티를 하겠다는 티를 냈다.
그런데도 김신록은 저런 반응을 보였다.
정말 아무 짐작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멍하니 있던 김신록이 어렵게 입을 떼었다.
김신록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행히 김신록은 히죽거리는 용제건과 눈이 마주치자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제자들과 식사를 하고 왔으니 아직 배가 부르겠군. 적게 먹어도 된다.”
“아닙니다.”
김신록은 호랑이들이 준비한 생일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잘 먹겠습니다.”
김신록은 미역국을 비롯해 모든 메뉴를 빠짐없이 맛보았다.
과연 배가 부른지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생일상을 준비한 호랑이들은 만족했다.
생일상에 지나치게 곶감이 많았기에 백호군은 괴로워했으나 그 점을 제외하면 참 단란한 식사 시간을 보냈다.
“아들아, 생일 선물이다.”
식사를 마친 후, 적호가 준비한 생일 선물을 건넸다.
붉은 포장지에 곱게 포장된 상자는 한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김신록은 바로 선물을 받지 않고 난감해했다.
“선물이라니, 축하해 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다. 네가 받아 주지 않으면 처분해야 한다.”
적호가 말은 저렇게 해도 김신록이 선물을 받지 않으면 앞에 드러누워서라도 억지로 받게 만들 것 같았다.
다행히 적호가 드러눕기 전에 용제건이 끼어들었다.
“신록아, 안 받을 거면 내가 가져도 돼? 적호 씨가 무슨 선물 줬을지 궁금한데.”
“……받겠습니다.”
용제건은 하나밖에 없는 친우답게 김신록을 움직이는 솜씨가 남달랐다.
순식간에 설득당한 김신록이 적호의 선물을 받았다.
‘그런데 적호가 저걸 봐주네.’
예전의 적호라면 ‘당신이 뭔데 내 아들의 선물을 쌔비려 합니까? 좋은 날 망치지 말고 꺼지십시오.’라고 했겠지만, 관대하게 넘어갔다.
오히려 아들이 순순히 선물을 받게 유도한 걸 감사해하는 눈치였다.
적호의 요청에 따라 김신록은 선물을 그 자리에서 개봉했다.
선물의 내용물은 홍옥을 깎아 만든 만년필과 붉은 잉크였다.
만년필에는 ‘제호(緹虎)’라고 새겨져 있었다.
“……잘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신록은 적호가 선물한 만년필이 마음에 드는지 한참 동안 케이스를 열고 들여다보았다.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황지호가 끼어들었다.
“김신록, 적호가 준비한 선물은 하나가 아니다.”
“네?”
“그 선물들은 이미 네가 은영관(銀影館)에서 잘 쓰고 있는 것 같다만. 안 그렇나, 적호?”
은영관은 은광고 연구동 구역에 위치한 광림 연구 4관을 가리킨다.
그곳은 적호의 공간인데, 그중 일부를 김신록에게 내주었다고 들었다.
황지호의 말을 듣자 하니, 적호는 그동안 주지 못한 생일 선물들을 다 거기에 뒀던 모양이다.
적호는 붉은 형틀에서 풀려난 후부터 계속 혼자 아들의 생일 선물을 준비한 게 아닐까?
“설마 그곳에 있는 문구들이 다…….”
김신록은 그곳에 있는 것들을 단순 비품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김신록이 허둥지둥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감사 인사도 한 번 하지 않고…….”
“감사 인사를 할 필요가 없는데 어째서 사과하느냐, 아들아. 나야말로 그동안 제대로 된 축하 인사를 하지 못해 미안하다.”
적호가 다정히 말하니 김신록이 더욱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담소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 해가 졌다.
용제건이 귀가할 때를 노려 나도 기숙사로 갈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신록아, 적호 씨한테 그거 안 줄 거야? 열심히 만들었잖아. 지금 호족들을 보니까 적호 씨만 그게 없는 걸 보니 기다리는 것 같은데?”
용제건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제건이 말하는 ‘그거’는 카네이션일 거다.
김신록이 계속 고민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지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놓고 말해 버리다니.
용제건은 자신이 귀가하기 전에 김신록이 적호에게 꽃을 건네는 장면을 보고 싶었나 보다.
“……카네이션입니다.”
김신록이 품에서 카네이션을 꺼냈다.
펠트로 만든 것이었는데, 멀리서 보면 생화인가 싶을 정도로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은호의 후예들이 보고선 ‘와!’ 하고 환성을 터뜨릴 정도였다.
저렇게 만들려면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할까?
김신록이 카네이션을 건네기 전에 용제건을 한 대 칠 줄 알았으나 용궁 건 이후로 많이 참는 중인 건지 그저 무시만 했다.
‘저 정도로 기뻐할 거면서 왜 그리 망설인 걸까.’
꽃과 선물을 주고받은 적호 부자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 훈훈한 광경에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에 용제건은 돌아가 버렸고, 나와 김신록은 호랑이 저택에 묵게 되었다.
‘갑자기 묵고 가게 돼서 미안하지만, 내일 이야기하기 좋겠지.’
오늘은 김신록의 생일, 어버이날인 점을 고려해 쉬기로 했지만 내일은 쉴 수 없었다.
객실에서 내일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일정을 확인할 겸 디바이스를 여니, 메시지가 도착한 게 보였다.
[맹효돈] 오늘 고마웠다.
[맹효돈] 주수혁하고 마주쳤는데 네 얘기 했다.
주수혁이 내 걱정도 해 준 걸까?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물었는데, 맹효돈으로부터는 ‘나는 별말 안 했다’라는 의문의 답변이 돌아왔다.
이번 주에 있던 일 때문에 충격을 받아 돌머리에 금이 간 건가 싶어 걱정이 되었다.
* * *
주말이 지나 월요일.
기숙사에 있는 아이들하고는 약속을 하지도 않았는데, 등굣길에 만나서 다 같이 등교하게 되었다.
대놓고 말은 안 했으나 다들 맹효돈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일찍 왔는데도 교실이 떠들썩하네.’
2학년 0반 아이들은 모두 이르게 등교했다.
이르게 등교한 이유 중 하나는 맹효돈이겠지만, 다른 하나는 이번 주에 있는 큰 이벤트 때문일 거다.
“미로야, 이건 어때? 스텐실 장식 정도면 보육원 애들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도안 제작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괜찮을까? 요새 연습 시간을 줄일 수가 없어서…….”
“도안 내가 만들까?”
김유리, 독고미로, 민그린이 홀로그램을 띄우고 대화를 하고 있었다.
홀로그램은 ‘스승의 날 이벤트’라는 키워드의 검색 결과가 나와 있었다.
스승의 날이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