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32화 (832/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32)

103. 헌화 (6)

은호가 조곤조곤 말을 마쳤다.

겉보기엔 존경받는 선생님과 모범적인 학생이 담소를 나누는 장면으로밖에 보이지 않 았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본 진검승부 못지않은 긴장감이 흘렀다.

'공청원은 은광한빛보육원 사건 때 폐공장에 혼자 쳐들어가서 용역 업체를 상대한 것도 그렇고, 보통 배짱이 아니네.'

공청원이 아주 뛰어난 플레이어이긴 하나 은호가 든 예시를 보면 혼자 해결해도 되는 건 가 싶을 정도의 사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렇게 따뜻한 미소를 짓고, 옥이 구르는 것 같은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교사가 했다 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과격한 행보였다.

공청원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산책 중에 일어난 일이니, 틀린 말은 아니에요."

"목격담을 종합해 보았을 때, 선생님은 목적지를 정해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사건을 찾 아 혼자 해결하기 위해 이동하신 게 아닌가요?"

"발 가는 대로 걷는 걸 좋아해요."

"그럼 저도 그 산책에 동행할게요. 단순 산책이면 학생이 곁에 있어도 아무 문제 없겠지 요."

은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인과 은호는 먼 과거에도 저런 식으로 의견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이상하게도 적호가 백호군에게 주먹을 날렸을 때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벌어지는 상냥 한 말싸움이 더 살벌해 보였다.

"우리 반 아이들이 선생님의 산책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언젠가 그 아이들도 발 가는 대로 걷다가 마주칠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마주치기 전에 산책로를 정비해 두어야겠어요."

공청원은 그 산책인지 순찰인지를 그만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런데 호족들과 협회가 놀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공청원이 저렇게 나서야 하는 건가.

은호도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이 점을 지적했다.

"은광구는 개천 신화에 기록된 신역이에요. 이 땅에 있는 진족이 나서겠지요."

"아무리 뛰어난 진족이라 해도 제시간에 맞추리라는 법은 없죠."

공청원이 저 말을 하자 온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은호의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속은 어떨지 모르겠다.

공청원의 말대로 신화시대 호족은 제시간을 맞추지 못해 동료를 많이 잃었으니까.

은호는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먼저 가장 위험한 것을 찾아 대처해 오셨죠."

은호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은호가 온화한 잔소리를 쏟아 낸 것도 다 신인을 생각해서 그랬다는 게 느껴졌다.

공청원은 천은하의 모습을 한 은호를 보며 눈을 몇 차례 깜빡였다.

조금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는데, 곧 웃으며 말을 돌렸다.

"과찬이에요. 제 감이 항상 맞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죠, 의신 학생?"

말을 돌리는 데에 내가 이용되었다.

감이 어쩌고 하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인사나 하기로 했다.

"인사가 늦어서 죄송해요."

"늘 예의가 바르네요. 대화가 길어져서 기다려 주신 거죠?"

"의신이 형, 안녕하세요."

그 이후엔 아주 자연스럽게 나도 둘 사이에 껴서 대화하게 되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공청원과 은호가 합심하여 내게 말을 쏟아붓고 있었다.

"의신이 형이 선생님의 과목을 수강해서 그런지 닮은 점이 많아요."

"어떤 부분이 닮았는지 궁금하네요."

"잘 아실 텐데요. 홀로 위험을 감수하는 점이요."

"의신 학생이 위험한 일을 했나요?"

"많이 했죠."

저 둘을 마주쳤을 때 그냥 대화하게 배려하고 자리를 비켰어야 했다.

신화시대부터 이어진 인연 아니랄까 봐 저 둘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공청원은 은호의 정체를 알지도 못하는데 왜 저렇게 합이 잘 맞는 걸까?

둘 사이에 껴서 실컷 잔소리를 듣다 보니 느낀 게 있었다.

'공청원의 말, 특히 호랑이들을 향한 태도를 보면 어딘가 신인다운 구석이 있어. 본인도 기시감을 느끼는 것 같아.'

공청원이 황지호, 은호와 대화하는 모습은 그동안 몇 번 봤다.

그때마다 공청원이 저 둘을 특별히 여긴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이는 달라. 한이는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어.'

그에 반해 한이는 무덤덤하다.

한이가 아무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호족들을 보고도 딱히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 는 것 같았다.

황지호가 친우 소리를 해 대며 귀찮게 해도, 보육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청호의 제자 들과 엮여도, 우연을 가장해 다른 호족들이 접근해도 말이다.

'하지만 정말 한이에게 아무것도 없는 걸까?'

공청원이 호족을 보고 기시감을 느낀 것처럼, 한이에게도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진족이 인간이 된다는 거대한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그저 소원이 이루어지고 끝난 걸 까? 애초에 그 소원은 온전하게 이루어진 걸까?

'한이의 친부모를 찾으려고 했던 시도는 헛수고로 끝났다고 했지.'

황지호는 한때 한이의 친부모를 찾으려 했다.

한이를 보육원에 버린 그들이 괘씸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육신이 이어졌으니 가족 병력 등을 확인하고 차후 유산, 부양 등의 복잡한 문제가 없도록 미리 처리하기 위해서였 다.

그러나 호족과 황명 그룹, 협회의 연줄을 동원해도 한이의 부모를 찾지 못했다.

범위를 넓혀 부모 외에도 그냥 피가 이어진 자라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단서가 거의 없는 것도 있지만, 한이의 유전자 정보를 활용했는데도 혈육을 한 명도 찾지 못한 건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한이와 피가 이어진 자들이 전부 사회생활을 거의 하지 않은 채로 일찌감치 단명했다면 저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는 하는데, 뭔가 이상해.'

내가 느낀 위화감이 더 커지게 된 건 바로 안다인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다.

후예였던 안다인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호족 부부를 만나자마자 부모임을 알아봤다.

기다린다는 선택밖에 없던 안다인과 달리 청호는 직접 인간이 되는 길을 택했으니 차이 점이 있는 건 당연할 거다.

그래도 의문이 많이 남았다.

"의신 학생, 후배가 걱정해 주고 있는데 생각이 많아 보이네요."

반쯤은 현실 도피를 위해 이어 갔던 생각이 중단되었다.

따가운 시선 속에 순순히 사과했다.

"죄송해요."

"한이도 그렇고, 요즘 생각이 많아 보이는 제자가 많네요."

갑자기 한이 이름이 나와서 동요했다.

놀란 마음을 감추고 물었다.

"한이가요?"

"네."

공청원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처음부터 나를 붙잡은 것도 사실 한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 아닐까?

공청원은 나와 은호를 지그시 바라봤다.

"의신 학생은 한이의 친구고, 은하 학생은······ 믿음이 가요. 말해도 될 것 같군요."

공청원의 말을 들은 은호가 아주 기뻐했다.

티는 크게 안 났지만 평소보다 눈꼬리가 더 깊게 휘었다.

공청원은 작년에 나와 여러 사건을 겪으며 가까워질 기회가 있었지만, 은호와는 만난 시간이 짧다.

그런데도 한이 이야기를 할 정도로 신뢰하다니, 은호가 기뻐할 만했다.

"태호권 소모임 활동을 견학하며 한이 선배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제가 선배님을 도울 수 있다면 좋겠어요."

은호가 믿음직하게 저리 말하니 공청원의 신뢰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

공청원은 이능파를 실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언령이었다.

공청원의 말이 형태를 갖춰 주변을 감쌌다.

'언령을 사용해서 결계를 쳤어. 그 정도로 중요한 이야기를 할 생각인가?'

공청원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 같다.

공청원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한이의 꿈에 상위 존재가 나타났어요. 은광고에 입학한 후부터 계속요."

한이에게 느낀 위화감과 의문의 단서를 하나 얻은 것 같다.

한이의 꿈속에 등장할 만한 상위 존재라면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천신이 한이에게 계시를 내리려는 게 아닐까?'

만약 계시를 내리려 한다면 대체 무슨 내용을 전하려는 걸까.

공청원의 말이 계속되었다.

"상위 존재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지만, 한이에게 잘 전달이 안 되나 봐요. 그래서 생 각이 많은 듯해요."

"어떤 상위 존재인지 알고 계신가요?"

"아직 특정을 짓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 상위 존재가 한이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예 요."

공청원은 내 질문에 답하지 못했지만, 확신을 갖고 말했다.

"태호권 소모임 합숙을 할 때, 한이가 꿈을 꾸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나쁜 느낌은 조금 도 들지 않았죠."

어떤 상위 존재인지 알지도 못하지만 믿고, 확신을 하다니.

공청원이 무해하다고 바로 단정 지을 만한 상위 존재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개천 신화에서 신인의 아버지였던 존재, 천신이 그러했다.

"그 상위 존재는 해가 없지만, 그 상위 존재와 적대하는 다른 이들이 한이를 해할 수도 있겠죠. 저는 그 점을 걱정하고 있어요."

공청원이 고민을 털어놓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늘 공청원이 한이 곁에 있을 수 없으니, 조금이라도 더 지켜보는 눈을 늘리고 싶었나 보 다.

공청원의 마음을 배려하여 상위 존재를 염두에 두고 한이를 잘 살피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공청원이 안심하며 웃었다.

"의신 학생, 고마워요. 자주 결석하는 걸 보고 불량한 학생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 데, 기우였네요."

그 말에 찔리는 게 많았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워낙 공청원의 수업을 많이 빠졌으니까.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수업을 성실하게 듣겠다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공청원이 자리를 비우자 은호가 말했다.

"의신이 형, 제가 꾸었던 꿈에 관해서 기억하세요?"

천성헌 시절에 늘 같은 꿈을 꾼다고 했던 것, 은호가 된 후에 그 꿈에 관해 언급한 것도 전부 기억하고 있다.

은호는 그 꿈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 꿈을 통해 천신께서 다른 세계에 있는 제게 오셨어요. 모든 세계에는 경계선이 존재 하지만, 꿈은 이어져 있으니까요.

-의신이 형, 기억하고 계세요? 제가 늘 같은 꿈만 꿨다고 했잖아요. 그 꿈에 나오는 게 천신이셨어요.

은호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은호의 꿈에서 나타난 천신은 그를 도우려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 한이의 꿈에 나타난 천신도 돕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도움을 주려면 호랑이 저택에 있는 호족들에게 전해도 되지 않나? 황지호한테 계시를 내리면 두말없이 한이를 도울 텐데.'

하지만 천신은 그러지 않았다.

은호도 천신의 꿈을 꾼 건 천성헌 시절이지, 은호로서 자각을 얻은 후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상위 존재의 사고방식은 알기 어려워. 천신이 한이의 꿈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는 건지, 그저 변덕인 건지 모르겠다.'

용왕신이 무녀들을 향해 사랑을 베푸는 방식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 는 천신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호족들도 천신의 행보를 두고 그저 받아들이기만 할 뿐, 이해하려 하는 것 같지는 않았 다.

은호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천신께서 청호 님을 살피고 계시다니, 기쁜 소식이네요. 무엇을 전하려 하시는 건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은호는 아주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천신은 실제로 천성헌 시절의 은호를 도우려 했으니 저렇게 생각하는 건 당연할 거다.

1학년 기숙사 건물로 은호를 바래다준 후, 조금 마음에 걸렸던 것을 물었다.

"공청원 선생님의 산책 건은 괜찮아? 내가 끼어드는 바람에 이야기를 다 못한 것 같은 데."

"괜찮아요."

은호는 부드럽게 말했다.

"말씀은 저리 하셨어도 학생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아셨으니 신중하게 행동하실 거에 요. 이 땅을 지키고 있는 진족 얘기도 해 두었으니 호족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생각하겠 지요. 현명하신 분이니까요."

공청원은 순순히 자신이 위험한 일을 하고 있음을 인정하지는 않아도, 조언을 받고 신 중하게 행동할 줄은 아나 보다.

은호는 단순히 주의를 주려는 게 아니라 공청원의 그런 점을 이용해 행동 방향을 바꾸려 한 건가.

여기까지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 은호는 갑자기 화살을 나에게 돌렸다.

"또, 그분은 위험을 자처하는 의신이 형에게 주의를 주면서 무언가를 느끼셨겠죠. 의신 이 형과 다르게요."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은호가 단정 지었다.

변명을 하려 했지만, 스승의 날이 코앞에 다가온 시점이라 그런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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