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34화 (834/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34)

103. 헌화 (8)

은광고 2학년 구역, 교무실.

오늘 교사진들의 잡담 주제는 제자들이 준비한 스승의 날 이벤트에 관한 것들이었다.

특히 화제가 된 건 비장의 영상이 공개된 공청원과 제갈재걸, 대결이 예고된 임연화였 다.

세 사람 다 2학년 구역 교무실에 없는데도 말이 나왔다.

"연구부장 선생님 오늘 몸 푼다고 밤샘 훈련 하신답니다. 졸업한 애들 온다고 최선을 다 한다네요."

"와, 내일 기환이랑 애들이 걸어서 집에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런 훈련 안 해도 이길 텐데, 참 강하고 성실하셔."

"교무부장 선생님은 이제 시 안 쓰시나 봐요?"

"옛날에 상도 많이 타셨다던데······ 이젠 교직에만 집중하시나 보네요."

제갈재걸의 사정을 모르는 교사들은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갔다.

사실 교사진들은 공청원 쪽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은광고의 교풍 탓에 근무한 기간이 길어질수록 듣는 것, 먹는 것에 까다로워지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현 은광고의 밴드부 고문 교사는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한데도 공청원의 가창력, 기타 연주 실력을 극찬했다고 한다.

"이제 밴드 활동은 안 하시나 봐요?"

"올해 처음 0반 애들을 맡은 것도 있고, 태호권 소모임도 있으니 어렵겠죠. 휴일엔 이계 공략이랑 봉사 활동도 하시던데요."

교사들이 한참 아쉬워하고 있을 때, 교무실 문이 열렸다.

김신록이 종이 가방을 여러 개 들고 교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기쁨, 어색함, 민망함 등이 뒤섞인 얼굴을 애써 가라앉히려 하는 걸 보니 졸업한 제자들 과 만나고 온 듯했다.

연차가 있는 교사들은 그걸 알아채고 김신록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올해도 고생 많으셨어요."

"그래도 졸업한 애들이 정도를 지켜서 오니 다행이에요."

김신록의 제자들 중 상당수가 졸업 후에도 모임을 갖는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모임에는 행동 강령이 존재했다.

갑자기 많은 인원이 몰려드는 바람에 김신록이 불편을 겪거나 놀라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도 행동 강령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 은광고를 방문한 졸업생은 다섯 명이었는데, 매우 치열한 추첨 과정을 거쳐 선정 된 이들이었다.

김신록은 그 과정에 관해선 잘 몰랐고, 그저 졸업생 대표로 왔다는 것만 들었다.

'제자들 시간을 안 뺏으려고 간단히 인사만 하려 했는데, 그 용이 나타나는 바람 에........'

김신록은 오늘 오후 수업이 없어 이를 이용해 제자들과 만났다.

오랜만에 졸업한 제자들을 봐 몹시 반갑고 기뻤지만, 인간의 시간은 아주 짧다는 것을 잘 알기에 김신록은 제자들의 시간을 아껴 주고자 했다.

찾아온 졸업생들은 귀한 시간을 김신록을 만나는 데에 쓰는 걸 아까워하긴커녕 기꺼워 했지만, 김신록은 그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졸업생들이 서운해하면서도 김신록을 방해할 수 없어 일찍 자리를 뜨려 했을 때, 부르 지도 않은 용제건이 나타났다.

용제건은 신나게 깐족거리며 얼마 남지 않은 김신록과 졸업생의 시간을 방해했다.

- 졸업한 애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난 걸 보니 벌써 가나 봐? 많이 바쁜가 보네. 김신록 선생님, 오늘 할 행정 업무 끝낸 걸로 아는데. 시간이 많으면 내 수업 자료나 만들래?

용제건은 졸업생들이 마음 한구석에 묻어 두었던 드래곤 슬레이어의 꿈을 자극했다.

졸업생들이 유희계 용족을 기습하는 상상을 하고 있자니 김신록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김신록은 험한 말이 나오려는 걸 참고 교사 흉내를 냈다.

- 용제건 선생님, 농담은 그만하세요. 오늘 부담임 맡고 있는 반에서 이벤트 있다면서 요. 일찍 가서 준비하세요.

- 응, 있긴 한데 나중에 가도 돼. 김신록 선생님, 심심하면 같이 우리 반에서 놀래?

- 반 아이들의 부 활동이 끝나면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어요. 일정이 있습니다.

- 다른 변명을 못 대는 걸 보니 기다리는 동안은 할 일이 없나 봐.

김신록과 용제건의 대화를 지켜보는 졸업생들의 살기가 점점 짙어졌다.

은사의 휴식을 위해 자리를 비우려 했더니 웬 유희계 용이 저러고 있으니 화가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의 감정에 둔한 김신록이었지만, 자신들을 내버려 두고 용제건을 상대하느라 시 간을 낭비하는 걸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눈치챘다.

고민 끝에 김신록은 용제건을 쫓아내고 제자들과 함께하기로 했다.

- 차 대접을 해 주고 싶은데······ 시간 괜찮니?

- 네! 물론이죠.

- 선생님, 선물 중에 차 과자가 있는데 같이 먹을까요?

김신록이 준비한 차에는 용제건의 몫이 없었다.

용제건은 실실 웃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훌쩍 자리를 떴다.

용제건이 향한 방향은 2학년 0반 교실 쪽이었다.

용제건이 떠난 후, 평화로워진 분위기 속에서 김신록은 제자들과 차를 마셨다.

"그런데 졸업한 애들이 오늘 온 거예요? 사회인도 있을 텐데 그냥 주말에 보지."

"그러게요. 토요일이 스승의 날이잖아요. 사전에 연락해서 일정 조율하지 않았나요?"

김신록도 가능하면 졸업생들의 사정에 맞춰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일은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김신록이 어렵게 입을 열어 답했다.

"......약속이 있어서요."

매년 스승의 날 헌화하러 오던 제자와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

* * *

함근형 선생님의 납치는 쉽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창천명궁 아닌가.

은광고에서 최강의 교사를 꼽을 때, 강한 담임 임연화와 함께 늘 빠지지 않는 교사가 함 근형 선생님이었다.

플레이어 특목고에선 선도부장을 맡는 교사는 보통 최고의 무투파가 선정되고, 함근형 선생님은 선도부장에 걸맞은 무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약점이 없는 건 아니지.'

함근형 선생님의 주 무기는 활.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니 근접전에 약하다.

물론, 활로 공격하는 것에 비해 약하다는 거지 거대한 활의 시위를 당기는 근력이 있는 만큼 웬만한 에너미는 맨손으로 때려잡을 정도로 강하다.

그래도 세 발자국 정도 안에 들어가면 해볼 만하다.

함근형 선생님은 착한 우리 반 아이들을 경계하지 않으니 공연 등으로 주의를 끄는 동안 가까이 접근하여 기습하면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점이 있긴 했다.

바로 용제건의 존재였다.

- 용제건 선생님은 어떻게 하지? 종례할 때 같이 오실 텐데.

- 이참에 같이 공격하는 건 어때?

- 오····· 할 거면 내가 해도 되냐? 도인한테 써 보고 싶은 기술을 시험하고 싶은데.

독고미로와 맹효돈은 싸울 마음 만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용제건을 공격하는 건 반대하고 싶었다.

이제 용제건한텐 교원 계약도 없어서 싸우기에는 아주 성가신 상대가 되었다.

- 하하하! 유희계 용족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다. 기습을 감지하고 공간술로 벽을 치고 는 실실 웃으며 약 올리겠지.

- ......너는 기습 잘하던데.

- 흠, 이 몸이 진심으로 용제건을 상대하길 바라나? 친우가 부탁하면 못 할 것도 없지. 가능은 하다.

한이가 황지호한테 말을 건 이유는 용제건을 습격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가끔 황지호가 기척을 죽였다가 튀어나와서 속을 긁는 걸 비꼬았을 뿐이다.

- 아니, 애초에 납치를 왜 하냐고.

- 함근형 선생님이 안 다치면 괜찮을 것 같은데····· 대석이는 하기 싫어?

- 아니, 그린이 말대로 담임 선생님이 안 다치면 당연히 아무 문제 없지.

송대석이 뒤늦게 의문을 품었지만, 민그린의 말 한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 용쌤한테 납치를 도와달라고 부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 음, 나도 세음이 생각에 동의해.

- 그럽시다. 위험을 늘릴 필요는 없습니다.

사월세음, 권레나, 목우람을 시작으로 용제건 섭외파 쪽에 힘이 실렸다.

그 결과 용제건도 납치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용제건이 직접 뭔가를 하는 건 아니었다.

용제건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납치 계획이 완성되었다.

종례에 맞춰 나타난 관종들의 온 힘을 다한 시선 끌기와 근접 전투에 능한 아이들의 활 약, 용제건의 방관 속에서 납치는 성공했다.

우리가 납치 장소로 택한 곳은 황명 타워로, 공간 대여 업체를 통해 빌린 파티 룸이었 다.

"......그냥 말했으면 따라왔을 거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진정묵이 포박을 풀어 주자 함근형 선생님이 말했다.

함근형 선생님은 처음엔 갑작스러운 습격에 반사적으로 대응하려 하셨지만, 도망치는 게 불가능하고 안 다치게 제압하는 것도 어렵다고 판단하자 순순히 납치를 당해 주셨다.

저 질문엔 납치 계획을 짠 내가 답했다.

"반 애들이 선생님 납치를 해 보고 싶다고 해서요."

"조의신 네가......."

내 대답에 함근형 선생님이 아주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짓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이렇게 솔선수범해 장난질을 치는 게 의외였나 보다.

우리가 꾸민 파티 룸에 마련된 선생님 자리 중 하나를 잽싸게 차지한 용제건이 불길할 정도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의신이가 어떻게 인원을 배치할지 신경 쓰였는데, 기대 이상이야. 반 아이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지. 실제로 아이들의 이능을 이용해 싸워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

그야 플마고를 통해 조작해 본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포함되어 있고, 아닌 아이들도 싸 우는 걸 몇 번 봤으니까 안다.

용제건은 내 광림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텐데도 굳이 저런 말을 해 댔다.

플레이어의 궤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이능 중, 우리 반 아이들의 힘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 알고 싶은 걸까?

"이번 퍼포먼스는 큰 의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로라 카네이션을 모티브로 한 의상을 입은 옹길동이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느라 학생과 시간을 못 보내는 교사들의 실상을 규탄하기 위함이 라고!"

일단 아무 이유 없이 납치할 수는 없으므로 저런 핑계를 대긴 했다.

교사진들이 과중한 업무를 짊어지게 된 원인은 작년에 있던 수많은 사건들과 쌓였던 업 보들의 탓이 크다.

그리고 황지호가 그 업보의 지분을 아주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옹길동의 말에 나와 용제건이 황지호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냥 괴도짓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상대를 납치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건, 넓게 보 면 괴이한 도둑이 할 만한 짓이 아닌가."

구슬비가 뚱한 어조로 반문하자 옹길동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두 사람이 떠드는 동안, 함근형 선생님과 반 아이들은 자리를 잡았다.

파티 룸은 14등분 되어 제각각으로 꾸며져 있었다.

반 아이들이 구역을 정해 각자 하고 싶은 대로 꾸민 탓이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김유리, 우아하고 세련되게 장식한 황지호, 대충 파티 룸 기본 옵션 대로 꾸민 맹효돈, 무림인이 쓰는 공간처럼 정리한 진정묵 등등 통일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파티 룸은 개성과 성의가 넘쳤다.

그중 가장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진 공간 쪽에 선 관종들이 말했다.

"먼저 우리가 준비한 선물을 공개하지. 자!"

"이건 보통 선물이 아니야. 등교하지 않은 애랑 같이 만든 거니까!"

등교 거부자랑 선물을 같이 만들 정도로 친해졌나?

좋은 선물을 가져올 거라고 자신만만하더니만 이유가 있었구나.

관종들이 상자에서 꺼낸 물건은 조금 생소한 물건이었는데, 의외로 맹효돈이 반응했다.

"어, 저거 어디서 본 건데."

선물의 내용물은 드림캐처, 악몽을 쫓는다는 도구였다.

'예전에 흑마가 맹효돈에게 선물했었지.'

맹효돈은 예전에 마족(馬族)의 신수를 구한 건으로 흑마에게 보답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흑마는 유니콘의 꼬리털로 만든 드림캐처를 건넸는데, 맹효돈이 그걸 기억하고 있 는 듯했다.

맹효돈의 성격을 생각하면 어디에 뒀는지 기억도 못 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봐, 이 아이템은 카드화도 된다!"

구슬비가 자랑하듯이 말했는데, 그 순간 저건 선물할 수 없게 되었다.

카드화가 될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아이템이라면 담임 교사한테 선물할 수 없다.

드림캐처는 처음 만들어 보는 걸 텐데,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아니랄까 봐 참 훌륭했다.

선물할 수 없어 아쉽게 되었지만, 아직 만나 보지 못한 등교 거부자와 관종들의 능력은 참 뛰어나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그린이 그림이랑 같이 교실에 같이 걸어 두죠!"

"배치할 자리는 내가 정하고 싶군. 교실 미화를 고려해서 조명도 조정하고 싶은 데......."

"교실이 지나치게 밝아지는 건 반대하오. 어디에든 어둠이 있어야 하는 법."

"뭐라는 거야."

받을 수 없는 선물인데도 함근형 선생님은 기뻐해 주셨다.

"고맙구나. 기왕이면 등교도 자주 해 다오."

귀한 아이템을 척척 바치던 관종들은 그 말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등교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함근형 선생님 납치에 성공한 2학년 0반은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의외로 시간이 많이 소모되고, 아이들이 좋아한 건 파티 룸의 여러 공간을 활용한 기념 사진 찍기였다.

동양화의 한 폭 같은 민그린의 공간은 대호평을 받았다.

옹길동이 민그린의 공간을 두고 듣기만 해도 낯 간지러운 찬사를 줄줄 울는 바람에 구슬 비와 송대석의 기분이 바닥을 쳤다.

또, 권레나가 연주하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공간에선 목우람이 기절할 뻔했다.

"그냥 스승의 은혜를 연주한 건데............"

"'그냥'으로 치부할 수 없는 수준의 연주였습니다. 선생님을 존경하는 레나의 마음이 느 껴져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렇게 말하는 목우람은 쓸데없이 수가 많은 괴상한 장식품으로 공간을 채워 뒀다.

호구의 주머니 사정을 잘 아는 함근형 선생님과 반 아이들은 또 강매당한 것이라 판단하 고 환불 절차를 알아봤다.

기념사진을 찍은 후에는 올해 봄 소풍 때 하지 못했던 아날로그한 파티용 보드게임을 했 다.

반 아이들의 수가 늘었는데도, 함근형 선생님의 보드게임 실력을 앞지를 수 있는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봄 소풍 때도 그랬지? 함근형 선생님 보드게임 진짜 잘하신다········· "

"롤을 완전히 파악하신 후에는 좀 봐주신 것 같은데도 무조건 상위권이더라."

"스승의 날 후기에 자랑으로 꼭 쓰죠. 우리 담임 선생님 보드게임 잘한다고요!"

"그러자!"

우리 반 아이들도 담임 자랑을 하고 싶은 걸까?

함근형 선생님은 뛰어난 플레이어이자 좋은 선생님이자 보드게임 고수이므로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아주 잘 이해가 갔다.

담임 자랑할 마음에 들뜬 아이들이 있는 반면, 순수하게 분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최근에 등교한 이들이 그러했다.

관종들은 의외로 보드게임을 못했고, 진정묵은 그냥 생각대로 못했다.

"크윽, 어째서 1등을 할 수 없는 거지!"

"재미없어······ 그래도 이길 때까지 할래······."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오. 정진할 뿐이오."

"다시! 재경기를 요청한다!"

저들은 보드게임을 한 경험이 그다지 없어서 룰도 잘 모르는 데다 운도 없었기에 연패를 갱신했다.

하지만 승부욕은 보통이 아니라서 몇 번을 져도 계속 재도전했다.

나중엔 애들이 대놓고 봐줬는데, 눈치 없이 송대석이 이겨 버리는 바람에 또 재경기를 했다.

'저번엔 황지호가 제일 못했는데.'

작년 봄 소풍 때, 황지호의 보드게임 실력은 정말 형편없었다.

시험 때 40점을 맞는 것처럼 보드게임에서도 일부러 지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 황지호의 승률은 중간 정도로 올라왔다.

물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게임에 이길 수 없다.

혼자서 하는 게임이 아니므로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또 상대의 생각을 읽는 중인 이가 어떻게 행동할지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그때보다 아이들을 더 이해하고, 생각을 더 잘 읽게 된 걸까?'

황지호는 마치 뽐내듯이 말했다.

"어떠냐, 조의신. 이 몸의 실력이 일취월장하지 않았나? 너처럼 승률을 중간 정도로 유 지하게 되었지."

의도하고 승률을 반반 정도로 조정한 건가?

계속 이기는 것보다 까다로울 텐데, 황지호가 정말 인간에 관한 이해가 늘어난 것 같다.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마음 같아서는 불금에 이어 주말까지 같이 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함근형 선생님을 비롯해 주말에 일정이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내일 탄래중에 방문할 예정인 맹효돈이 그랬다.

"카네이션은 샀어?"

"어······ 샀다."

"갈 거지?"

"도인이랑 같이 가기로 했다."

맹효돈은 저번 습격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맹효돈을 지옥에서 구해 낸 함근형 선생님과 시간을 보낸 게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저번 사건 때문에 맹효돈의 가정사를 어느 정도 알게 된 아이들이 굳이 사건을 헤집지 않고 평상시와 똑같이 대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주변에 다 좋은 아이들만 있어서 다행이다.'

우리 가족이 사고를 당한 후, 학교에 처음으로 등교했을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진심 어린 위로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호기심과 장난기 섞인 악의를 담아 상처를 헤집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 사이에서 나를 평소처럼 대해 주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대한 이유가 배려하기 위함인지, 무관심 탓인지 구분할 수 없었으나 몹시 고마 웠다.

'그렇게 대해 주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었다면 더 많이 힘들었겠지.'

내일은 토요일이지만, 맹효돈의 은사는 출근할 예정이라고 한다.

탄래중의 은사는 오전 근무라 점심 식사를 같이 할 생각인 듯했다.

"그래, 잘 다녀와. 수학 질문할 거 있으면 하고 오고."

"에이씨, 거기까지 가서 수학을 왜 해."

맹효돈은 수학이라고 하니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수학 얘기를 꺼내면 은사가 기뻐할 것 같은데.

수학을 배울 필요가 없는 맹효돈이 돌머리를 깎아 가며 공부하는 이유는 오로지 그 은사 때문 아닌가.

"기숙사 애들은 지익회관에서 더 놀 거라는데, 너도 오냐?"

"아니, 약속이 있어서 오늘 기숙사엔 못 들어가."

오늘은 호랑이 저택에 갈 예정이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황지호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보고 맹효돈은 내가 오늘 밤에 어디로 갈지 알아챈 것 같았다.

"......또 뭐 해?"

"괜찮을 거야."

"정말로 무슨 짓 하나 보네."

맹효돈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도 강해질 거다."

"어?"

"주수혁도 강해질 거라고 했어."

맹효돈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주수혁이 전에 진정묵과의 대련을 마치고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있긴 한데, 왜 그 얘기가 지금 나오는지 모르겠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맹효돈이 주수혁과 더불어 강해지겠다고 마음먹는 건 좋 은 일이니 응원하기로 했다.

대충 그런 요지의 말을 했는데 맹효돈은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어째 시원치 않 은 표정을 지었다.

"알아 두고 있으라고."

맹효돈은 결연해 보이는 얼굴로 돌아섰다.

통학하는 아이들이 모두 에어 택시에 탄 것을 확인한 후, 나는 황지호와 호랑이 저택으 로 향했다.

호랑이 저택에 도착하자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건지 현관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은 호의 후예들이 반겨 줬다.

"의신이 형, 반 애들이랑 색종이로 엄청 큰 카네이션을 만들었어요. 저는 잘 만들었는데 요, 옆에 앉은 제 친구는 핑킹가위를 잘 못 써서 제가 도와줬어요."

은재호의 초등학교에서는 스승의 날을 앞두고 대형 카네이션을 만들었다고 한다.

어버이날을 앞두었을 때에는 집에 가져갈 용도로 작게 만들었는데, 오늘 만든 건 교실 에 장식하기 위해 크게 만들었다고 한다.

은재호는 초등학생인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많이 친해졌는지 몇 번이나 그 아이에 관 해 이야기를 했다.

"조의신, 이 몸이 손댄 부분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고 싶 나?"

"응, 보여 줘."

"하하하! 정말로 보여 달라고 할 줄이야. 자, 사진으로 찍어 왔다."

그야 착한 황유호가 완벽한 카네이션을 만들었다는데 보고 싶은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야식을 만들기 위해 자리를 비운 황지호와 황유호가 같은 호랑이인 건 알지만, 어쨌든 황유호는 어리고 착하고 카네이션을 잘 만드는 아이였다.

"의신이 오빠, 공청원 선생님 노래하는 거 보셨죠? 진짜 잘 부르지 않아요?"

"언젠가 라이브 공연으로 보고 싶어요·····!"

"은하도 담임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쉬는 시간에 공연 영상을 보더라고요."

"맞아요. 평소에는 체스 기보 같은 걸 보던데."

은서호와 은이호도 스승의 날 건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지 계속 말을 걸었다.

은호가 쉬는 시간에 그 영상을 보고 있었다니.

전에 은호가 공청원을 걱정하던 대화 내용도 그렇고, 정말 신인을 잘 따르나 보다.

그런데 전에 봤다는 체스 기보는 누구 걸까?

높은 확률로 천동하의 기보일 것 같다.

"공청원 선생님은 신인이시니까 우리 저택에 모시면 좋을 텐데......."

은서호가 혼잣말하듯 한 말에 누구도 답을 하지 못했다.

호랑이들이 얼마나 신인을 모시고 싶겠는가.

공청원이 호랑이들을 상대로 무언가를 느끼고 있고, 서서히 호족들과의 연을 늘려 가고 있긴 하다.

그러나 먼 옛날 호족이 신인을 모셨던 것처럼 관계를 맺는 건 쉽지 않을 거다.

"공청원은 교직원 사택에서 잘 대접하고 있다. 걱정 말도록."

황지호가 뒤늦게 저리 말하긴 했지만, 은호의 후예들은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았 다.

은호의 후예들을 잘 달래서 재운 후, 호랑이들과 나는 응접실에 모였다.

상석에 앉은 황지호가 작전의 개요가 정리된 홀로그램을 띄우며 말했다.

"자리에 앉도록."

늦은 시각, 스승의 날을 앞둔 마지막 작전 회의가 시작되었다.

* * *

5월 15일 토요일, 스승의 날.

성국언은 프로 보노 봉사 활동 행사에 참석했다.

라틴어 'pro bono publico' '공익을 위하여'라는 말에서 유래된 프로 보노는 일종의 재능 기부를 의미했다.

특히, 전문직 종사자들이 법률, 회계, 의료, 통번역 등의 지식과 서비스를 기부하는 것 을 프로 보노라고 부른다.

성국언은 어린이들을 상대로 플레이어로서 이계와 에너미에 관한 교육 봉사 활동을 할 예정이었다.

"변재익 변호사님, 잘 들었습니다."

"아이고, 성국언 의원님이 벌써 오셨습니까. 일찍 오신 줄 알았다면 인사드릴 걸 그랬습 니다."

오늘 프로 보노 봉사 활동 행사에는 법률 사무소 변월의 대표 변호사, 변재익도 참석했 다.

변재익은 성국언보다 앞서서 생활 법률 상식에 관한 교육을 진행하던 참이었다.

둘은 반갑게 환담을 나누었으나 사실 성국언과 변재익이 말을 튼 건 극히 최근의 일이었 다.

성국언은 리플레이 이후에 있었던 법률 세미나에서 변재익에게 접근했다.

'리플레이에서 얻었던 몇 안 되는 좋은 인연이다. 놓칠 수 없지.'

성국언이 좋은 인연이라고 표현하긴 했으나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플레이어라고는 하나 변재익은 영세한 법률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변호사이므로 가 까워 봤자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그저 성국언은 리플레이 속에서 나눴던 변재익과의 짧은 대화를 통해 그의 성품을 높이 샀고,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성국언의 그러한 진심이 전해진 건지, 변재익과는 몇 년을 알고 지낸 것처럼 금방 가까 워졌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 아쉽군요. 다음에는 술이라도 한잔합시다."

"하하, 빈말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핫! 제가 빈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입니까?"

"물론 아니지요. 의원님과 하는 술자리를 기대하겠습니다."

일정을 마친 후, 변재익이 웃는 낯으로 성국언에게 작별을 고했다.

사실 변재익은 성국언과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잡을 생 각을 하지 못했다.

성국언이 어디로 향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국언이 매년 스승의 날마다 헌화를 위해 은광고를 찾는다는 건 그의 지지자들은 다 아 는 사실이었다.

"가자, 무영아. 선생님께 꽃을 드려야지."

"네."

성국언과 전무영이 스승을 만나기 위해 은광고로 향했다.

두 사람은 카네이션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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