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41)
104. 곁 (6)
며칠 전.
주수혁은 김철에게 환몽 게이트와 파이트 클럽에 관해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그냥 듣기엔 플레이어 관련 사건을 재조사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실상은 주수혁의 친구와 사건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정보 수집 과정이었다.
김철은 그러한 주수혁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움직였다.
그러나 유능한 김철이 휴식 시간도 버려 가며 철저하게 조사를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과는 그리 없었다.
보고서에는 빈 부분이 많았다.
‘철이 형의 힘이 부족했던 게 아니야. 비어 있는 보고서 자체가 단서야.’
사건이 막 터졌을 때, 주수혁은 막 광림을 깨우쳤을 때였다.
정식 플레이어가 되었으니 관련 사건에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기에 저 사건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봤다.
그때에 비해 시간이 흘렀으니 조사가 진척되고, 단서가 늘었어야 정상인데 실상은 달랐다.
연루된 범죄자들이 무슨 죄를 지어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에 관한 내용을 빼면 알려진 것들이 없었다.
특히 적벽괴도와 파이트 클럽을 습격한 자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형식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다 흐지부지 끝난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환몽 게이트와 파이트 클럽을 무너뜨린 자에 대한 정보를 지우고 있나 봐요.”
확보했던 기록 기기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고장.
목격자의 증언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배제.
반증의 등장으로 기존에 세운 가설들이 하나둘씩 지워져 전멸.
그저 흔히 있는 미제 사건이 미궁으로 빠져드는 과정처럼 보였지만, 주수혁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일련의 과정 뒤에는 긴 시간에 걸쳐 철저하고 집요하게 적벽괴도와 까마귀 가면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는 듯했다.
“적벽괴도와 까마귀 가면을 지키고 싶어 하는 자가 있는 거겠죠. 협회 간부 수준의 권한을 가진 자, 충분한 재력과 부릴 수 있는 부하를 가진 자, 플레이어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 여러 집단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네요.”
주수혁은 조사 결과에 만족했다.
이미 주수혁은 적벽괴도, 까마귀 가면이 조의신이라 여기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조의신이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 안심했다.
조의신은 맹효돈 외에도 많은 이들을 도왔고, 그들 또한 조의신을 도우려는 것 같았다.
‘은광고의 입학시험을 치를 때까지 의신이는 플레이어들과 관계없는 삶을 살았어. 지금 의신이를 돕는 자들은 다 입학 후에 생긴 인연일 거야. 아마 의신이가 누구를 도우면서 생긴 인연이겠지.’
13조 사건 당시, 조의신의 활약이 허무하게 묻힐 위기에 놓였다.
방관하던 황명 재단이 갑자기 입장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조의신은 친구의 공을 빼앗아 이명을 얻은 쓰레기 취급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조의신을 돕는 자들이 그때도 그를 도왔다면 곧바로 손민기 측에 압력을 가해 입을 다물게 하고, 언론에 자료를 풀어 여론을 바꾸었을 것이다.
만약 주수혁이 13조였는데 조의신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주오 그룹과 그의 지인들은 그보다 더 강경한 수단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컸다.
‘입학 전 의신이는 계속 혼자였어.’
게다가 조의신은 은광고 입학 전 상당히 열악한 환경에서 지냈다.
가족을 모두 잃은 중학생이 그런 환경에 처했는데, 도움의 손길을 내민 이가 한 명도 없었다는 건 정말로 조의신이 고립무원의 상태였다는 증거였다.
‘지호가 처음부터 의신이를 돕지 않은 건 확실해. 아마 황명 재단이 방관을 그만둔 시점부터 조금씩 입장을 바꾼 게 아닐까?’
주수혁은 옛날 황명 재단이 어떤 식으로 학생을 다루었는지 알고 있었다.
은광고에 입학하기 전,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이 주수혁에게 경고와 조언을 전했다.
막 학생회장에 취임했던 도원우는 무슨 일이 있으면 교사진보다 먼저 자신에게 상담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말을 듣긴 했지만, 주수혁은 은광고에 좋은 교사진이 없는 건 아니니 자신이 올바른 학교생활을 하면 문제가 없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최편득과 그 일당이 벌인 짓들을 보며 그 생각이 크게 흔들리고, 황명 재단의 방관에 관해 알게 되었다.
‘지호는 보통 존재가 아니야. 황명 재단이 변한 건 지호가 변했기 때문일 수도 있어. 그리고 그 변화의 원인은 의신이겠지.’
주수혁은 조의신의 행보를 되짚어 보며 거의 진실에 가까운 추측을 하는 데에 성공했다.
주수혁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조의신과 황호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기회가 많았기에 추측의 진위를 판단할 재료는 넘쳐 났다.
황명 재단의 학교 운영 방침의 변화 과정, 맹효돈이 등교한 시기, 그 외의 0반 학생들이 등교했던 때와 그즈음에 발생한 사건들 등등.
그 모든 것을 조의신과 그 주변을 기준으로 되짚어 보니 진실이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앞으로 조의신이 무슨 일을 벌일지도 짐작이 갔다.
“효돈이를 지켜보죠. 보석 건도 그렇고, 그 사건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요. 의신이가 또 효돈이를 구하기 위해 움직일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주수혁은 맹효돈을 주시했다.
이를 두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본래 맹효돈과는 친하게 지냈고, 친부 건이 있는데도 주수혁이 맹효돈을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면 도리어 이상하게 여기는 이가 있었을 거다.
“탁거산 선생님이 안 계실 때마다 경호원이 효돈이를 따라다니고 있었죠. 누가 보낸 건지 확인해 보셨나요?”
“확인했습니다. 전부 황명 재단 측에서 보낸 이들입니다. 플레이어 협회나 프로 플레이어 팀 소속원은 없었습니다.”
모처럼 김철이 빠릿하게 일 처리를 했는데, 주수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주수혁은 김철의 보고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한 후에 입을 열었다.
“황명 재단에서 보낸 분들의 신원 파악이 이렇게 빨리 되다니 이상해요. 황명 재단은 진족을 움직일 수 있잖아요. 신원 파악은 물론, 경호가 붙었는지도 모르게 이쪽의 눈을 속일 수 있었을 텐데…….”
주수혁의 말을 듣고 다니 눈이 뜨이는 기분이 들었다.
김철도 지나치게 조사가 수월하게 진행되어 뭔가 석연치 않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주수혁이 말을 이을수록 모호했던 위화감이 점점 실체를 갖추는 기분이 들었다.
“의신이가 효돈이를 지키기 위해 둔 수인데 이렇게 허술할 리가 없어요. 진짜 노림수는 따로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맹효돈 대신 조의신을 관찰하는 것은 어떤가.
김철이 그런 요지를 담아 제안했지만, 주수혁이 반대했다.
“의신이를 감시하고 뒤를 밟는 건 어려울걸요? 적벽괴도의 흔적을 그렇게 철저하게 지우는 분들이 의신이를 돕고 있잖아요. 의신이를 직접 캐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거예요.”
주수혁이 단언했다.
김철은 그런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주수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적벽괴도 건을 묻어 버린 누군가들이 김철도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조의신을 보호하고 그 주변을 경계하고 있을 것 같았다.
“의신이나 효돈이를 통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는 어렵겠어요. 그러니 의신이의 협력자 쪽을 보죠.”
“협력자라면 황명 재단 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마 그렇겠지만, 황명 재단 전체를 감시하는 건 불가능하니 범위를 좁혀 볼까요.”
조의신이 맹효돈을 구하기 위해 보낼 협력자가 누구일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탁거산이었지만, 어쩐지 그쪽은 미끼일 것 같았다.
탁거산은 제자를 지키겠다며 곁에 붙어 다니는 중이니 맹효돈을 노리는 적이 대처법을 마련해 뒀을 것이다.
‘탁거산 선생님도, 황명 재단이 파견했다는 경호원도 아니면서 의신이가 믿고 효돈이를 맡길 만한 누군가…….’
그다음으로 떠오른 건 2학년 0반의 아이들이었다.
다들 학생이긴 하지만, 강자들이 많아 의지할 만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닐 것 같았다.
‘친구들을 위험에 끌어들이려 하지 않겠지.’
검은 눈이 내리던 때, 조의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떠올렸다.
우마왕 앞에 나선 주수혁, 맹효돈, 유상훈을 발견한 조의신은 정말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상훈이 광림, ‘복수하는 바람’을 발동해 우마왕의 혼철곤을 막자 조의신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날 처음부터 천익산에서 의신이랑 같이 싸우던 지호라면 모를까, 다른 애들은 부르지 않을 거야.’
하지만 황호의 뒤를 캐는 건 조의신을 감시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소거법으로 하나하나 후보를 지우던 주수혁이 결론을 내렸다.
“철이 형, 한 분의 일정을 확인해 주세요.”
“한 명이면 됩니까?”
“네, 아마도요.”
감시하기 만만치 않은 상대였지만, 황호나 조의신보다는 낫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마침 그 인물은 스케줄의 일부를 공개하고 있었기에 일이 수월했다.
그 인물의 움직임과 주변 사정을 종합한 결과, 주수혁은 스승의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다.
‘효돈이는 그런 사건을 겪어 마음이 좋지 않은 상태야. 게다가 작년에 효돈이네 선생님은 나랑 의신이를 보고 아주 기뻐하셨어. 의신이 성격이라면 일정을 전부 조정해서 스승의 날을 비우려 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건…….’
스승의 날, 주수혁과 김철은 탄래중 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철이 형, 언제든지 싸울 수 있게 준비해 주세요. 아, 무작정 싸울 생각은 아니에요. 제가 친구들의 위험을 덜 수 있다고 판단할 때 개입할 거예요.”
주수혁은 김철이 반대할 때를 대비해 그를 설득할 구실을 생각해 뒀다.
하지만 김철은 시원하게 승낙했다.
“알겠습니다.”
의외였기에 주수혁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김철은 덤덤한 말투로 덧붙였다.
“제가 도련님의 친구분께 빚이 있어서요.”
* * *
어둠이 지나고 새벽이 찾아왔다.
나는 소리를 죽여 조용히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걷는 동안 생각에 잠겼다.
‘전무영은 괜찮겠지? 숙제를 잘 해 왔으니까. 연습이 아닌 상황에서 써먹는 건 처음이니 힘들겠지만, 전무영은 실전에 강한 타입이니 괜찮을 거야.’
적은 내 예상대로 이쪽을 노렸다.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해 성국언의 모습을 빌린 나와 전무영을 전이시켰다.
이쪽은 내 수대로 진행이 됐으나 다른 쪽이 걱정되었다.
‘탄래중 쪽은 변수가 많아 걱정되네. 하지만 지금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다소 문제가 발생해도 탁 도인과 맹효돈이 쉽게 당할 리가 없으니 잠깐은 버텨 주겠지. 시간을 끌면 그사이에 준비한 수가…….’
평소에 비해 사고가 매끄럽지 못했으나 쉬지 않고 생각을 이으려 했다.
현실에 관해 계속 생각하지 않으면 과거에 숨통이 틀어막힐 것만 같았다.
자칫하다간 그냥 과거도 아니고 가짜 과거에 삼켜질지도 모른다.
타박타박.
아직 잠이 덜 깬듯한 아이 둘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형, 올 때 선물 사 와.”
“오빠, 그때 오빠 간식 먹은 거 때문에 아직 화났어? 미안해.”
“이거 먹을래?”
자다 일어난 내 동생들이 내게 간식거리를 내밀었다.
이곳은 출국하기 직전의 우리 집이었고, 나는 중학생이었다.
살아 있는 가족과 만난 마지막 때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