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42)
104. 곁 (7)
‘예상도 했고, 준비도 했는데.’
막상 이능으로 구현된 가짜 동생들과 눈이 마주치니 숨통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죽은 동생들의 마지막 모습은 헤아릴 수도 없이 떠올렸다.
그때마다 모순된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동생들이 일어났던 덕에 얼굴을 봐서 다행이라는 생각.
동생들이 계속 자고 있었더라면 모질게 굴지 않아도 됐을 거라는 생각.
지금은 아무 의미 없는 상념이었다.
그래서 중요한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에 속으면 안 돼. 이게 무슨 이능인지, 어떻게 파훼하는지 알고 있잖아.’
지금 적은 옛 한국 지부장이 생전에 사용했던 광림을 사용하는 중이다.
그의 이능은 과거와 후회, 미래와 공포를 자극해 상대의 정신을 장악해 버린다.
파훼법은 간단하다.
현재를 택하면 된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후회로 왜곡하여 인지하는 대신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가 주는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굳이 저런 이능에 당하지 않더라도 후회와 공포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
나는 말없이 동생들을 내려다보았다.
둘은 내가 선물한 잠옷을 입고 있었다.
동생들은 별 불만 없이 내 옷을 물려 입었는데, 그게 미안해서 생각날 때마다 새 옷을 선물하곤 했다.
성장기인 점을 고려해 넉넉한 사이즈의 잠옷을 샀는데도 이 시점에선 동생들의 몸에 딱 맞았다.
그땐 별생각이 없었지만, 몇 번이나 돌이켜 생각해 보다가 딱 맞는 잠옷을 떠올리곤 동생들이 성장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동생들은 나보다 한참 작았고, 앞으로도 계속 작은 채로 있을 거다.
“냉장고에 초콜릿도 있는데…….”
“오빠…….”
그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동생들이 저렇게 불안해하면서 나를 봤다.
별것도 아닌 일로 화가 난 나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경기를 앞두고 있어 몹시 예민해져 있었고, 서운한 감정이 쌓여 있다는 이유로 동생들과의 마지막을 이렇게 보내고 말았다.
‘다음부터 안 그러면 괜찮다, 잘 다녀오겠다, 졸릴 텐데 더 자라, 언제나 고맙다…… 그때도 그렇게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속에서 무언가가 혀를 타고 올라왔다.
억지로 삼키지 않으면 말이 되어 밖으로 흘러나올 것 같다.
주변에 이능파나 적의 기척을 감지했다면 냉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과거로 돌아온 것처럼 우리 가족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내가 과거에 돌아왔다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여기 있는 게 내 동생이 아님을 인식하기 위해 냉정하게 사고했다.
‘구형 시뮬레이터로 경험한 것보다 훨씬 퀄리티가 높아. 옛 한국 지부장의 이능에 운사의 힘이 더해져서 그런 건가?’
냉정을 가장해 봤지만, 나오는 건 가짜에 휘둘리는 나를 위한 변명이었다.
구형 시뮬레이터의 AI가 보여 주는 환상보다 현실의 이능이 더 강력할 것이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산발적으로 생각을 했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던 중, 리플레이를 하던 성국언은 사전 정보나 훈련 없이 이 이능을 파훼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플마고의 성국언 또한 그러했다.
‘플마고의 성국언이 과거의 후회를 마주했던 장면에서는 항상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지.’
단단한 정신을 지닌 성국언은 망설이지 않았다.
성국언은 자신이 정신을 공격하는 이능에 당했다는 것을 파악하기 전부터 같은 선택을 했다.
그리고 지금 그 성국언이 위기에 처했고, 나를 믿고 내 수를 따라 줬다.
내 과거와 후회가 성국언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생각에 정신이 들었다.
‘지금쯤이면 포모르 마족이 움직여서 성국언과 접촉했겠지. 류장과 약속한 대로라면 그쪽은 문제없어.’
성국언 외에도 이번 작전에 함께하는 이들이 떠올랐다.
그러자 과부하를 일으킬 것 같던 머리가 가라앉았다.
가짜 동생들을 앞에 둔 탓에 속은 타고 있는데,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그 덕에 과거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입을 다물고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오빠…….”
“형…….”
내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동생들이 울상을 지었다.
그때에도 동생들이 슬퍼하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왜 계속 나는 입을 다물었던 걸까.
식은 머리로 과거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와중에도 동생의 시선이 닿은 곳이 칼로 찔린 것처럼 아팠다.
“형 비행기 타야 돼서 간식 안 먹나 보다.”
부모님이 부드럽게 동생들을 달랬다.
당시의 나는 저 모습에도 서운함을 느꼈다.
동생들이 내 몫의 간식을 가져가도 부모님은 야단치는 대신 내게 양보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보다 동생들을 더 아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고,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저 모습을 보고도 그런 철없는 생각을 하다니.’
부모님은 잠이 부족한 건지 눈가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게다가 동생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에 힘이 없어 지친 티가 났다.
시간을 고려하면 두 분 다 출근할 시각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내 아침 식사를 챙겨 주고, 캐리어에 빠진 내용물이 없나 확인하고, 나와 인사하기 위해 이 자리에 계셨다.
맞벌이를 하며 아이를 셋이나 키우는 것, 특히 그중 하나가 언론의 관심을 받는 스포츠 선수라면 몹시 힘들 텐데도 두 분은 늘 다정했다.
두 분은 부모로서 당연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셨겠지만,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긴 쉽지 않았을 거다.
‘……이제 가야 해.’
과거의 내가 그랬듯, 끝까지 입을 다문 채로 자리를 비울 시간이 되었다.
대회고 뭐고 가족과 같이 있었다면 어떨까?
동생들은 기뻐했을 거고 부모님은 난색을 표하면서도 내 걱정을 하시며 받아들였을 거다.
그런 충동이 들었지만, 이성이 나를 붙잡았다.
여기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지면 곧바로 내 정신이 여기에 묶이게 된다.
지금 나는 여기에 머물기는커녕 다녀오겠다는 인사도 해선 안 됐다.
“조심해서 다녀와. 코치님 말씀 잘 듣고, 무슨 일 있으면 시차 안 맞아도 전화해.”
“……잘 다녀와!”
동생들은 끝까지 열심히 내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예전에는 이렇게 착한 애들을 상대로 계속 매운 태도를 취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제는 상대가 연하라면, 특히 어린아이라면 동생 생각을 하면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마음을 넓게 쓰려 했기에 더더욱 과거의 내가 이해 가지 않았다.
“…….”
나는 가족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렸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혼자가 되었다.
가족들의 모습을 눈에 담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는데, 막상 보이지 않으니 속이 텅 비는 기분이 들어 괴로웠다.
텅 빈 속을 사고로 채우려 애썼다.
‘아직 내 후회는 끝나지 않았어.’
현관문을 나서도 이 환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가족과의 작별을 재현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나의 후회가 완성되지 않았기에 이능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코치와 합류해 출국하고, 현지에 파견된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경기를 준비했다.
그사이에 나는 어느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아직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어. 가짜 가족들이 살아 있어. 지금이라도 연락하거나 돌아간다면, 과거와 다른 광경을 보여 주겠지.’
그런 짓을 한다면 환상 속에서 대회는 엉망이 되어도 가족들은 살아서 내 곁에 있게 된다.
내 정신과 기억, 이능이 뒤얽혀서 행복한 환상을 계속 보여 줄 것이고 나는 이 이능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플레이어라면 한 번 실수하더라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뒤늦게 정신계 이능에 당했음을 자각하고 이능파를 통해 이 환상을 리셋할 수는 있다.
다만, 리셋 후 처음부터 다시 과거와 후회 속에서 선택하며 이능을 파훼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의신아, 잠깐만. 이거 입고 가.”
이윽고 세계 주니어 체스 선수권 대회의 파이널 라운드,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다다랐다.
코치가 교복 차림의 내게 스폰서 패치가 붙은 선수복을 내밀었다.
코치가 부모님의 유언 대로 가족의 사고를 숨기려고 했던 시점에 벌어진 일이었다.
코치의 태도는 평소와는 달랐다.
그 위화감을 파고들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고, 장례식에 참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는 교복 입을 때가 집중이 가장 잘 돼요. 아시잖아요.”
“그건 아는데 파이널 라운드에서 꼭 입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저는 그런 말 못 들었어요.”
선수복을 내미는 걸 무시하고 나아가는 중에도 뒤에서 ‘의신아!’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족에게도 야박하게 굴었는데, 코치를 모르는 척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직 내 후회가 완성된 상태가 아니니 반드시 체스를 두게 하겠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내 약점이 체스인 걸 상대도 느꼈을 텐데, 이용하려 하는 게 당연해.’
내 예상대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제 내가 끝까지 경기를 마쳐야 후회가 완성되나 보다.
그렇게 매정하게 헤어져서 이 자리에 온 주제에 가족이 무슨 일을 겪은 줄도 모르고 나는 체스나 둬야 한다.
체스 피스를 움직이는 손이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예전에는 춥지 않아도 손이 식는다는 게 어떤 감각인지 몰랐는데.’
가족을 잃기 전까지는 달랐다.
손이 따뜻한 편이라 날이 추우면 동생들이 한 손씩 옆에서 잡고 안 놔주곤 했다.
이제 손을 잡아 줄 동생들이 없어서 차게 변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손이 얼어붙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체스는 어떻게 두는 거였더라. 어떻게 체스 피스를 움직여야 했지?’
그날 뒀던 기보를 전부 외우고 있는데도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위기가 닥치자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릿속으로 기억을 헤집었다.
그러다가 은광고에 입학하고 나서 한 대국들이 머리를 스쳤다.
마진승, 김가람, 염준열, 박승현, 천동하 그리고 백호군까지.
은광고에 와서 한 대국 수가 적지 않은데, 왜 바로 떠올리지 못한 걸까.
그리고 이어서 아주 중요한 걸 떠올렸다.
‘그날 반 아이들이 왔었지. 응원이 없었다면 졌을 거야.’
체스를 다시 시작한 첫날, 나는 2차전에서 몇 수 두지 못한 채로 무너질 뻔했다.
그러다가 운명력 스킬이 발동해 고개를 든 순간, 나를 응원하러 온 반 아이들을 발견했다.
그 응원을 본 나는 다음 수를 둘 수 있게 되었다.
반 아이들을 시작으로 이 세계에서 만난 이들이 생각났다.
그 생각이 이어지자 손이 더는 차가워지지 않았다.
“체크.”
내가 기억하고 있던 기보대로 경기를 마쳤다.
그 순간, 공간의 일부가 허물어졌다.
거의 완벽에 가깝게 과거를 재현하고 있던 이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과거와 후회 속에서 정해진 선택지를 고르는 건 이제 끝났다.
이제 플레이어로서 이능과 싸울 때가 되었다.
“이상하겠지. 정신적으로 그렇게 흔들렸는데도 끝까지 수를 뒀으니까.”
쩌적……!
체스대회장 전체에 거대한 금이 갔다.
금을 주변으로 공간이 뒤틀려 변하려 했다.
“한 번 둔 수는 무를 수 없다는 걸 잘 알아. 복기를 하고, 아쉬워하더라도 수를 무르는 일은 없을 거야.”
쩌저적……!
내가 부정의 말을 할수록 환상은 더욱 크게 부서져 내리고, 균열 사이로 구름이 피어올랐다.
죽어 있는 옛 한국 지부장의 광림이 분쇄되고, 살아 있는 운사의 힘이 개입해 환상은 더욱 크게 어그러졌다.
상대는 다음 수를 준비하는 듯했다.
“내 미래와 공포까지 엿보게 하진 않을 거야.”
어떻게 자신의 수를 알았냐고 되묻는 것처럼 순간 구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때를 노려 곧바로 이능을 발동했다.
〈스킬 ‘생사(生死)의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삶과 죽음을 가리는 눈이 흐린 환상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