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52)
105. 경계 (5)
맹효돈이 무사하게 착지한 것을 확인한 후.
주수혁은 천리안으로 함근형이 주변에 있는지 확인했다.
가든에 서린 힘 탓에 눈의 피로감이 늘어났다.
이를 억누르며 주변을 넓게 살핀 결과, 맹효돈을 향해 달려가는 함근형을 발견했다.
‘함근형 선생님이 보여. 괜찮을 거야.’
주수혁은 이번 사건에 개입하기 위해 함근형의 뒤를 캤다.
조의신이 맹효돈을 지키기 위해 함근형을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함근형은 학생부장의 자리에 있어 선도부의 고문이었다.
그렇기에 선도부 소속의 주수혁은 함근형의 일부 공개된 스케줄을 확인할 수 있었고, 조사가 비교적 수월했다.
함근형이 싸울 준비를 하고 탄래중으로 향한 것을 알게 되어 주수혁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가든에 뛰어들 수 있었다.
‘함근형 선생님과 거리를 두고 있던 바람에 전이 후에 합류하지 못한 게 아쉬웠지.’
그래도 따로 움직인 덕에 이득을 본 것도 있었다.
가든을 움직이는 자가 주수혁 일행과 맹효돈을 갈라놓는 데에 힘을 썼으나 함근형의 존재는 파악하지 못했다.
“함근형 선생님이 효돈이 쪽으로 이동하고 있어요. 곧 만날 거예요.”
“효돈이네 담임이신 창천명궁 말하는 거지?”
“네. 그분도 효돈이를 돕기 위해 주변에 계셨어요.”
함근형의 이름이 나오자 맹효돈의 중학교 은사가 몹시 안도했다.
창천명궁의 위명은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듣고 있던 탁거산이 물었다.
“그 아이가 근형이를 부른 게냐?”
“그럴 거예요.”
주수혁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 아이란 조의신을 가리킨다는 걸 알았다.
주수혁은 맹효돈의 두 스승이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걸 확인하고 말했다.
“효돈이는 괜찮을 거예요. 이동하면서 가든을 공략하죠. 가든에 쌓인 힘을 소모시켜야 효돈이 쪽 부담이 덜할 거예요.”
“오냐, 얼른 가자꾸나.”
넷은 구름으로 가득한 가든 저편으로 나아갔다.
이동 중, 주수혁은 김철에게 은사를 경호하는 데에 전념하도록 지시하고 탁거산과 함께 싸우는 데에 전념했다.
주수혁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압도적으로 싸우니 사기가 점점 올랐다.
언뜻 보기에 주수혁은 시원시원하게 앞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든과 에너미를 분석하고 고찰하며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처음 싸웠던 플로어 마스터에 비해 약해. 우리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에너미를 내보내는 게 정상인데.’
주수혁 일행은 에너미와 몇 차례 교전했으나 막힘 없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 가든의 주요 등장 에너미는 전부 무형종이었기에 주수혁이 광림만 발동하면 초 단위로 토벌이 완료되었다.
워낙 빠르게 에너미를 처치했기에 광림 시간이 별로 낭비되지도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주수혁은 뭔가 마음에 걸렸다.
저쪽에서 전력을 다해 이쪽을 해치우려 한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던 탓이다.
‘우리를 순순히 보내 줄 리가 없지. 속셈이 있을 거야.’
주수혁이 생각한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첫째, 한 번에 힘을 모아 쓰러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둘째,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 힘을 쓰고 있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어. 다른 곳에 있는 누군가를 단숨에 쓰러뜨리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을 수도 있지.’
주수혁은 가든의 형태가 점점 변해 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주수혁은 전투를 마칠 때마다 천리안으로 한 번씩 맹효돈 쪽을 살폈다.
맹효돈은 함근형과 합류해 플로어 마스터를 쓰러뜨리고 이동하고 있었다.
서로 움직이고 있고,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구름과 안개가 짙어 천리안을 써도 상대의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가든의 전체적인 구조가 뒤틀리고 있어서 천리안을 사용하기 어려웠다.
스윽.
주수혁이 천리안의 사용을 막 거두었을 때, 탁거산이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냈다.
멈추라는 신호로 보여 주수혁은 즉각 멈춰 서 주변을 경계했다.
탁거산이 눈알을 굴려 한구석을 응시했다.
주수혁은 탁거산이 주시한 곳을 천리안으로 살폈다.
넓어진 시야 속에서 누군가가 보였다.
주수혁이 그게 누구인지 가늠하기 전, 상대가 먼저 접근해 말을 걸었다.
“보지 말아 줄래? 관음증에 걸린 쥐새끼 생각이 나서 기분이 안 좋아지거든.”
천리안의 존재를 예민하게 감지한 존재가 짜증을 냈다.
진족이었다.
낯선 가든에서 진족을 만났다면 크게 경계했겠지만, 저 진족은 주수혁도 알고 탁거산도 아는 이였다.
주수혁이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고 천리안을 바로 거두자 진족이 기분을 조금 풀었다.
“마족(馬族)의 수장이로군. 오랜만에 뵙소.”
“그때 걔 옆에 있던 플레이어들이구나, 안녕.”
스리피스의 바지 정장 차림을 한 흑발의 진족, 흑마가 나타났다.
흑마는 홍천에서 본 탁거산, 주수혁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탁거산에 이어 주수혁의 인사도 받은 흑마가 말했다.
“이곳에 있는 인간은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렇네.”
지금 마주친 셋 중 둘은 흑마와 구면이었다.
그것도 마족(馬族)의 신수를 구한 맹효돈과 가까워 보이던 이들이었다.
남은 하나는 초면이지만, 이능이 없는 일반인이었으므로 흑마의 경계 대상이 아니었다.
흑마는 처음 보인 예민함이 거의 사라진 태도로 말했다.
“잘됐어. 따라와.”
한 진족의 수장과 같이 움직일 수 있다면 부담이 덜하겠지만,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주수혁은 흑마에 관해 생각했다.
‘왜 여기에 계시는 거지? 저분은 전에 효돈이에게 감사를 표하신 적이 있어. 그때 일로 은혜를 갚으려고 하시는 건가?’
주수혁은 흑마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짐작했지만, 어디로 무엇을 향해 가려는지는 알지 못했다.
흑마가 가리킨 방향은 맹효돈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적어도 흑마가 맹효돈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 중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답이 나오지 않아 주수혁이 직접적으로 물었다.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저희는 효돈이를 찾으러 가는 중이었어요.”
“창천명궁이 걔 옆에 있는데 굳이? 그것보다 시킬 게 있어.”
흑마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받아쳤다.
맹효돈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서 저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함근형의 실력을 높이 사서 저리 말하는 것 같았다.
‘이분과 마주친 곳은 홍천이. 홍천에 터를 잡고 계시겠지. 함근형 선생님은 홍천에서 큰 사건을 해결하셨고 그쪽으로 출장도 자주 가셔. 그러니 실력에 관해 잘 알고, 믿고 있는 걸까?’
주수혁은 흑마에 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알고 있는 정보를 조합해 그럴싸한 결론을 내렸다.
한편, 탁거산은 흑마를 따라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리 믿을 만한 인물이 곁에 있다고 해도 제자의 안전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게 스승의 마음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소만, 다른 곳에 눈 돌리고 있을 틈이 없소.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어떻소?”
탁거산은 정중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주수혁도 흑마의 심부름보다는 맹효돈과의 합류를 우선시하고 싶었다.
흑마가 또 예민한 반응을 보일까 봐 걱정했는데, 그녀는 조용히 탁거산의 얼굴을 관찰할 뿐이었다.
흑마는 세월이 묻어나는 탁거산의 얼굴을 잠시간 응시했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한 눈이야. 혹시 탁거산 선생님과 과거에 만난 적이 있던 걸까?’
탁거산에 비하면 흑마는 훨씬 젊은 외양을 하고 있었으나 실제 나이는 흑마 쪽이 비교도 하기 어려울 만큼 많을 것이다.
탁거산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먼 과거에 저 둘이 만났고, 흑마가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관찰을 마친 흑마가 입을 열었다.
“중요한 인연이 제자만 있는 게 아니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오는 게 좋을걸?”
흑마는 탁거산을 지목하며 말했다.
지금 흑마의 용무는 탁거산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흑마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탁거산도 혼란스러워 보였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와 봐.”
흑마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냥 따라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었으나 주수혁이 제안했다.
“저분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적을 늘릴 수는 없죠. 효돈이의 안전은 확보된 상태니 합류는 잠시 미루는 게 어떨까요?”
“그렇더라도 길어지면 따로 행동하는 게 좋겠구나.”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하셨으니 괜찮을 거예요.”
흑마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그 주변은 다른 곳에 비해 무겁고 침침한 분위기였다.
가든이 만들어 낸 구름과 안개가 유독 짙게 깔려 있던 탓이었다.
“죽음의 힘이 도움을 주었으니 찾아내고, 꺼내는 건 어렵지 않아.”
흑마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이능파가 요동쳤다.
어두운 피부색의 손등을 중심으로 강한 힘이 모였다.
휘이이이…….
스산한 바람 소리가 흑마의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방금 흑마가 죽음의 힘에 관해 언급했는데, 지금 상황만 보면 흑마가 이곳에 죽음을 불러 모으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무심코 지나치고, 어쩌면 그 위를 밟고 갔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곳에 두다니. 이자를 여기에 심은 자는 참으로 악취미로구나.”
흑마가 손을 한 번 휘둘러 손등 위에 모인 힘을 손바닥으로 옮겼다.
무언가를 할 기세였다.
주수혁과 탁거산은 이능파로 몸을 감쌀 준비를 하고, 김철은 말없이 경호 대상의 앞에 섰다.
파아아앗!
흑마가 손바닥에 모인 힘을 아래로 쏟아 냈다.
흑마의 힘이 바닥을 얇게 덮은 안개를 삼키고 단단한 지면을 파헤쳤다.
흑마가 노린 지점이 유독 단단했기에 그 작업은 몇십 초는 걸렸다.
이윽고 흑마가 찾고 있던 것이 공기 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거대한 상자였다.
‘상자처럼 보여. 아니, 상자라기보다는 저건…….’
상자에는 아주 복잡한 진(陣)이 새겨져 있었다.
그 위로 진득한 이능파가 흐르는 걸 본 흑마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그 진을 훼손시켜 멈추게 했다.
이어서 상자와 연결된 파이프를 박살 내어 지면으로 끌어 올렸다.
‘관처럼 보여.’
상자의 모습이 온전하게 드러나자 주수혁의 감상이 확고해졌다.
주수혁의 눈에는 저것이 시체를 담기 위한 궤처럼 보였다.
디자인 때문이 아니라 저 상자가 두른 기운이 관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찾았다. 역시나 크네.”
큰 힘을 썼는데도 흑마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흑마가 조금 구겨진 재킷 소매를 가다듬는 동안 탁거산이 물었다.
“대체 무엇을 부탁할 생각인지 모르겠소. 지금 찾아낸 것과 관계가 있소?”
“운반을 맡길 생각이었어. 내가 직접 들고 가기 번거로웠거든.”
콰드득!
흑마의 힘으로 이음새가 약해진 탓에 굳게 봉인되어 있던 상자가 쉽게 열렸다.
상자가 열리고 내용물이 보였다.
그 안에는 사람이 누워 있었다.
김철의 뒤에서 은사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상자 안의 사람은 척 보기엔 그냥 눈을 감고 잠든 것처럼 보였지만, 피부가 새파랗게 질리고 가라앉은 공기를 두르고 있어 시체라는 걸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성국언 국회의원?’
관 속의 시체를 본 주수혁이 처음 떠올린 인물은 성국언이었다.
그 안의 사람은 성국언과 매우 닮아 있었다.
하지만 잘 보면 체격도 조금 달랐고, 얼굴에서도 다른 점이 발견되었다.
‘그럼 이분은 누구지?’
그 답은 탁거산이 알고 있었다.
“성 형…….”
탁거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관 속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