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53)
105. 경계 (6)
젊은 시절, 무술계를 평정한 탁거산은 무서울 게 없었다.
어둠의 시대 같은 난세 속에서 무력은 어지간한 권력, 재력보다 더 강력한 힘이었다.
그런 탁거산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들이 셋 있었다.
첫째는 대영웅 무쇠팔 송만석.
둘째는 홍경복 화백.
남은 하나는 탁거산은 물론이고 송만석, 홍경복도 존경하고 따르던 성형우였다.
―거산아, 우리가 어둠의 시대를 끝내자.
당시 성형우는 아무도 맡고 싶어 하지 않았던 플레이어 협회의 한국 지부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잦은 전사로 몇 번이나 교체가 된 자리였기에 불길하다고 협회원들이 모두 외면한 자리였다.
그래서 아직 젊었던 성형우가 지부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성형우는 파격적인 인사 결과 지부장에 올랐으나 사람을 신뢰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어 금방 인망을 얻었다.
만약 그 시대에 성형우가 아닌 사람이 어둠의 시대를 끝낸다는 소리를 하면 터무니없는 꿈을 꾼다며 비웃음을 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형우가 저리 말하자 탁거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성형우가 저 소리를 처음 했을 때 탁거산은 막 성인이 된 애송이였고, 송만석은 막 이명이 생긴 신참 플레이어에 불과했는데도 말이다.
―지부장님? 공석도 아닌데 형이라고 불러라.
사석에서 누가 놀리듯 지부장 소리를 할 때마다 성형우는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성형우보다 나이가 좀 있는 이들은 대부분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어 은퇴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동생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탁거산을 비롯한 후배들은 성형우 지부장이라는 말보다는 ‘성 형’이라는 호칭이 입에 붙었다.
어둠의 시대를 지나 여명기를 맞이할 때까지 성형우는 플레이어들을 지원하고 도왔다.
대영웅 송만석이 이계 공략에 전념할 수 있던 것도 다 성형우의 공로 덕이었다.
이계와 에너미를 대비한 안전 철칙이 하나씩 완화되고, 일상을 되찾아 어둠의 시대가 종식을 맞이했을 때였다.
―우리가 끝낼 수 있다고 했잖아.
평화로운 시대에서 보낸 첫 술자리에서 취기가 오른 얼굴로 성형우가 그렇게 말했다.
저 말을 듣자 탁거산은 마음 한구석에 있던 불안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어둠의 시대는 막 끝났으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한 상태였다.
진족과 인간의 관계, 플레이어 양성 시스템의 안정, 협회 내부 규정과 플레이어 특별법 사이의 균형 확보, 위성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기기 개발 등등.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은데도 성형우가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탁거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형우의 부고를 듣게 되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형님이……!”
성형우가 세상을 떠나고 수십 년이 지났지만, 탁거산은 그때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장례식 내내 성형우가 자신보다 먼저 갔다는 게 믿기지 않았었다.
어둠의 시대가 이어질 때 수많은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냈어도 성형우만은 자신보다 나중에 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탁거산은 발인할 때 관을 들었는데, 태산 같았던 성형우가 가볍게 느껴져 그제야 눈물을 보였다.
탁거산은 성형우의 죽음을 여러 번 확인했고 관 안에 고인이 있던 것까지 똑똑히 봤다.
그렇게 어렵게 성형우를 보냈는데 가든의 바닥에서 발견된 유해를 보자 처참한 기분이 탁거산을 덮쳤다.
‘탁거산 선생님이 ‘성 형’이라고 칭하고, 성국언 의원님과 닮은 분.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되셨을 분이라 하면…….’
탁거산이 말을 잃은 사이, 주수혁은 조용히 죽은 자의 정체를 추리했다.
주수혁은 곧 관 속의 인물이 옛 한국 지부장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근현대사를 장식한 플레이어에 관해서라면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인물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기에 성형우에 관해서도 알고 있었다.
“성 형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건 나도 몰라.”
탁거산이 따지듯이 물었으나 흑마는 개의치 않으며 답했다.
흑마의 능력상 죽음을 마주할 일이 많아 흐트러진 인간을 자주 본 탓이었다.
흑마는 잠든 듯이 눈을 감고 있는 성형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자는 인간에게는 영웅이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원수일 수도 있어. 시신을 모욕해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짓은 인간도 하잖아?”
주수혁은 흑마의 말이 가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 국가의 위인전에 실린 위대한 영웅이 다른 국가의 역사 교과서에선 희대의 주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번 건은 단순히 원한 때문에 이리한 것 같지는 않았다.
‘욕보일 생각이라면 시신을 이렇게 온전한 상태로 둘 리가 없어. 부패하지 않도록 보존하는 데에도 힘이 소모되잖아.’
주수혁의 시선이 관에 닿았다.
흑마가 손을 써서 관에 작용하던 이능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관 표면에 새겨진 진, 지면 깊은 곳에 연결된 파이프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플레이어의 시체에 이능의 잔해가 남을 때가 있어. 그걸 이용하려고 했던 걸까?’
하지만 주수혁이 아는 사례를 생각하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사례에 의하면 이능의 잔해는 그리 강하지도 않았고, 제삼자가 그 잔해를 다루고 통제하는 게 불가능했다.
추가 피해가 없도록 이능을 제거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번 사건에는 이능의 새로운 활용법이 많이 엮여 있어. 그 활용법에 시신을 이용한 무언가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겠지.’
고인도 거리낌 없이 이용하는 선연한 악의와 힘을 향한 탐욕이 느껴졌다.
주수혁은 진저리치고 싶은 걸 참으며 탁거산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지나치게 흥분해 흑마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말릴 생각이었다.
흑마의 말이 계속되었다.
“나는 인간들에게 그리 관심이 없지만, 홍천 출신의 영웅은 달라. 백마들이 다섯 영웅의 집결을 고대하고 있으니까. 그 영웅 중 하나였을 이자에게 관심을 가졌었지. 그러니 이자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
흑마는 성형우를 천천히 살폈다.
수의 차림의 성형우를 보는 흑마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자는 분명 죽은 후의 일도 생각하고 있었을 거다. 누군가가 자신의 시신을 이용할 계획을 품고 있었는데, 진정 몰랐을까?”
“……성 형이 알고 있었을 거란 말이오?”
“그건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탁거산은 석연치 않았던 성형우의 죽음에 관해 떠올랐다.
성형우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처럼 보였다.
성형우가 정치계에 입문할 정도로 지지를 받아서 누군가가 제거한 거란 설도 있었고, 진족에게 밉보여 당했다는 말도 있었으며 그가 정비한 협회 규정 때문에 불이익을 본 플레이어들의 소행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그가 정말로 살해당한 건지, 자살을 택한 건지도 확실히 결론지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하나 있었다.
“누가 성 형을 죽이고, 죽음을 이용하려 했다면 성 형이 몰랐을 리가 없지. 또, 아무것도 안 한 채로 죽음을 맞이했을 리도 없소!”
흑마도 탁거산의 생각에 동의하는지 저 말을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이번 건을 부탁한 애 말로는 뭐가 더 있을 거래.”
조의신의 말에 의하면, 옛 한국 지부장이 순순히 죽음을 맞이했을 리가 없다고 했다.
어쩌면 옛 한국 지부장의 시신에는 그의 마지막 수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 * *
오른눈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으나 황지호는 바로 이해했다.
이 너머에 운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황지호가 문 앞에 섰다.
옛 친우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바로 문을 열 줄 알았는데, 그 전에 황지호가 나를 돌아봤다.
“괜찮나?”
문을 열어도 괜찮냐고 묻는 건가?
적의 함정에 관해 묻고 있는 것 같았으나 바로 답할 수 없었다.
생사의 안광으로 봤던 순간에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다른 수를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방금 탐지계 스킬로 다시 확인해 봤을 때는 뚜렷한 위협은 없었으나 탐지가 가능한 레벨을 넘어선 수를 준비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런 요지의 말을 전했더니 황지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뒤에 뭐가 있든 내가 해결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나는 네가 괜찮은 건지 물었다.”
“괜찮습니다만.”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바로 전투를 할 가능성이 있으니 그 전에 네 몸 상태를 확인해야겠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면 왜 굳이 물어본 걸까?
황지호는 더 묻지 않고 황금색 이능파가 어린 눈으로 나를 살폈다.
“피는 멎었지만 통증은 그렇지 않나…… 여전히 아픈가 보군.”
혹시 이능파 상태가 불안정한 건가.
안대로 가린 덕에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줄 알았는데, 황지호가 사용하는 수준의 안광으로 보면 또 다른가 보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황지호가 혀를 차고는 앞으로 나섰다.
“내가 열겠다. 물러나 있도록.”
황지호는 문에 직접 손을 올리는 대신 이능파를 이용했다.
쾅!
이능파가 황금빛 마력으로 변해 실체를 갖추고, 문을 열어젖혔다.
문이 열리자 내가 봤던 것과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내가 본 대로라면 저 문 너머엔 넓은 공간이 있었고, 그 중심에 운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화로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 갈래로 나뉘는 갈림길이 보였다.
‘운사가 있는 화로는 쉽게 옮길 수 있는 게 아니야. 화로를 옮기는 대신 그 사이의 길을 복잡하게 만든 건가.’
시간을 길게 끌면 불리했다.
운사가 있는 화로는 쉽게 옮길 수는 없었지만, 옮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시간을 들이면 운사를 어디론가 보낼지도 모른다.
가든을 포기하고 운사와 함께 적이 달아날 가능성도 있다.
그때처럼 운사의 힘을 정면으로 느끼지 못하는 한, 생사의 안광으로 다시 추적하는 것도 어렵다.
지금은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게 최선이다.
“적의 술수가 훤히 보인다. 우습군. 아무리 강한 힘을 지녔다 해도 짧은 시간 내에 이런 잔재주를 부리는 건 수고로울 텐데, 한 명씩 상대하고 싶은 이유가 있겠지.”
황지호가 실소했다.
나도 황지호와 같은 생각이었다.
‘흑막을 따를 정도로 악하고, 일행을 갈라놓는 데에 집착하는 존재. 짐작 가는 진족이 있어.’
게다가 하필 세 갈래 길이라니.
여기에 있는 일행 셋을 찢어 놓고 싶었나 보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셋이라는 건 알아도 그게 누구인 건지는 모르는 건가?’
만약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을 거다.
운사를 되찾지 못할 각오를 하고 셋이서 한 길로 나아가는 것.
혹은 셋이 각각 길을 택해 나아가는 것.
어느 쪽이든 그리 내키지 않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범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는 황지호가 있었다.
“나는 오래전, 소원을 빌었다.”
먼 옛날, 개천 신화 속 호족은 열린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에게 소원을 빌었다.
백호군은 어디에도 갈 수 있는 것, 청호는 항상 신인을 모시는 것을 소원했다.
그리고 황지호가 바란 것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기를.”
황지호가 신화 속에서 빈 소원을 입에 담은 순간, 영롱한 빛이 주변에 일렁였다.
그러자 황지호의 그림자가 셋으로 나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