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54화 (854/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54)

105. 경계 (7)

도철은 이상을 감지했다.

그 이상을 느낀 건 새로운 수를 준비해 실행했을 때부터였다.

수를 두기 전, 화로에 손을 올려 가든 안을 탐색하던 도철이 인상을 구겼다.

처음엔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으나 점점 위화감이 굳어졌다.

‘가든 안이 흐려졌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군. 구름이 짙어진 건가?’

처음에는 침입자를 경계하느라 가든이 멋대로 구름을 내보낸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든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 구름을 움직였을 때, 도철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가든이 흐리게 변한 것이 아니었다.

화로를 통해 가든을 살피기 어려워졌을 뿐이었다.

‘고장 난 건가? 대체 왜, 하필 이런 때에……! 설마 그 시선을 받은 탓인가?’

도철은 정신 공격 이능에 휘말린 성국언의 시선을 떠올렸다.

도철은 여전히 조의신이 사용한 시선이 성국언의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 눈이 ‘생사의 안광’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 시선을 받았을 때 마치 죽음과 삶의 경계에 내던져진 듯한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운사는 매개 역할을 했으므로 도철보다 더욱 크게 그 눈의 영향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그 눈이라면 운사를 고장 낼 만하지.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고쳐야겠군.’

도철은 운사가 망가졌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로 화로 속에서 타들어 가며 힘을 뽑히던 운사는 생사의 안광을 통해 자신이 살아 있음을 절절히 깨달았다.

운사가 고통 외의 감각을 느껴 작은 자아를 되찾게 되었다.

운사는 구름이 가득한 가든 안에서 옛 친우의 존재를 느꼈다.

바로 황호였다.

여전히 운사는 화로에 묶여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었고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도철로부터 친우를 보호하고자 했다.

‘유독 안 보이는 곳이 있군! 힘을 쥐어짜니 그래도 셋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화르륵!

도철이 운사를 제어하기 위해 화로의 출력을 올리는 바람에 고통이 커졌지만, 운사는 흔들리지 않았다.

도철은 운사가 필사적으로 저항 중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본래 남의 힘을 이용해 가든을 운용하다 보니 내부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어지간한 진족과 인간을 죽이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서 흑막 측은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여차하면 직접 보러 가면 그만이니 도철 또한 이를 큰 약점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 방심이 그들의 정원에 호랑이를 불렀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셋을 갈라놓는 대로 직접 보러 가야겠군. 하필 구름을 다루는 힘이라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운사는 그렇게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황호의 존재를 감추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게 고작이었다.

여전히 운사의 힘은 가든에 있는 자를 위협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1대1로 끌고 갈 수 있다면 누가 되었든 내가 질 리가 없다!’

파직!

도철이 이능파를 크게 흘리자 화로에 새겨진 인장 몇 개가 잿더미가 되어 흩어졌다.

화로에 새겨진 인장은 이제 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인장은 운사의 힘으로 운용되는 가든을 상징하기도 했고, 남은 생명력을 보여 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감히 나를 직접 노리는 놈들이 오는 길은 갈라놓고, 우선적으로 죽여야 하는 놈을 먼저 끌어내리고…….’

도철은 가든에 잠입한 자를 갈라놓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기존에 존재하던 가든의 구조를 바꾸고, 다른 가든을 덧붙여 함정을 만들고 습격을 감행하는 등 짧은 시간 동안 상대의 허를 찌를 수를 완성했다.

물론, 도철은 상대가 그 수를 파훼할 준비를 마치고 가든에 들어왔다는 걸 알지 못했다.

수를 둔 도철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움직이기로 했다.

‘운사를 어딘가에 숨겨야 하나? 아니지, 성국언은 주제도 모르고 나를 노렸으니 내가 화로에서 멀어지면 그만 아닌가.’

도철은 성국언이 운사를 찾으러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성국언과 운사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던 탓이었다.

오히려 성국언은 진족과는 거리를 두고 사는 인간이므로 걱정할 일이 없었다.

‘운사는 기껏해야 에너지원으로 보이겠지. 성국언이 찾고 싶은 건 친족의 시체일 텐데, 그놈은 그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성국언의 성정을 고려했을 때 아무리 진족을 경계한다 해도 저 정도로 고통받고 있는 운사를 발견하면 그냥 둘 리가 없었다.

그러나 도철은 성국언의 성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사실 오고 있는 자들이 성국언이 아니라는 것도 몰랐으며, 저들은 애초에 도철보다는 운사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모든 전제가 엉망인 상태에서 쌓아 올린 수는 아무리 강한 힘이 개입했다고 해도 몹시 허술하고 작은 변수에도 크게 흔들렸다.

가든을 조작한 도철은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로 화로의 곁을 떠나려 했다.

파아앗!

“……!”

도철은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것도, 운사의 것도 아닌 이질적인 힘이 화로 주변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를 파악한 도철이 인상을 구겼다.

‘이건 혼돈의 힘을 이용할 때 썼던 진(陣) 아닌가.’

작전의 초반, 도철은 은광구 쪽을 살피기 위해 혼돈의 감각을 빌렸다.

혼돈의 힘을 빌린 건 그때가 끝이었다.

도철이 그 뒤로는 자신의 힘만으로 이번 일을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여겼고, 공을 다른 사흉과 나눌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혼돈의 진이 도철을 부르듯이 빛나고 있었다.

도철은 못 본 척하고 이대로 자리를 떠나야 할지, 확인해야 할지 고민했다.

고민은 짧았다.

‘혼돈은 그분과 가까운 존재다. 무시할 수 없어.’

도철은 혼돈의 진 위로 손을 뻗었다.

진에 손이 닿자 혼돈이 전하는 감각이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    *    *

은광구의 유일한 마천루, 황명 타워의 최상층.

용제건과 김신록은 황호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우선 침묵을 택했는데, 성국언이 대화의 물꼬를 텄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황지호의 모습을 한 황호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는 것인지 황호는 낮게 손을 들어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황호가 말했다.

“조의신이 왼눈을 잃었다. 방금 지혈을 마쳤다.”

황호의 말에 갑자기 공기가 몇 배는 무거워진 듯한 감각이 실내를 잠식했다.

김신록은 혈색이 사라진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고, 실눈을 뜨고 있던 용제건은 눈을 크게 떴다.

성국언은 표정을 무너뜨리지는 않았으나 보이지 않게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무엇을 하다가, 무엇을 위해서 다친 건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황호의 얼굴만 봐도 어떤 상황인지 대략적으로 짐작이 갔던 탓이었다.

그들이 관심 있는 건 사고의 원인이 아닌 조의신의 상태였다.

성국언이 황호에게 물었다.

“의신이는 괜찮습니까?”

“본인은 괜찮다고 한다.”

“왼눈을 다친 게 아니라 잃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두르고 있는 분위기에 비해 황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내용은 그리 담담하지 못했다.

“괜찮지 않은 건 그걸 보고 있는 내 쪽 같군.”

황호가 조의신을 데려오지 못하는 걸 보니 아직 가든 안에 있는 듯했다.

그리고 가든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된 것 같지도 않았다.

성국언은 속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조의신은 지금도 성국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러 사건이 얽혀 있긴 하나 조의신이 그 모습을 한 건 성국언의 암살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를 대신하다가 왼눈을 잃은 것이다.

‘후배의 눈을 희생해서 살아남다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성국언은 후배가 둔 수를 기특하게 여기고 응원했던 과거의 자신을 질책했다.

조의신은 성국언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모하고, 자신을 아낄 줄 몰랐다.

성국언은 자신의 왼눈을 빼 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왼눈을 잃은 상태로 운사를 찾고, 운사를 붙잡고 있는 상대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

성국언은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를 드러내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기에 말을 아꼈다.

그 이후로 김신록이 조의신의 상태를 물었는데, 시원치 않은 답변이 돌아왔다.

직접 보지 않아도 제 상태에 관해 입을 다무는 조의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줄곧 말을 아끼던 용제건은 조의신의 부상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선 표정을 바꾸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황호 씨가 곁에 있는데도 그런 일이 일어난 거야? 의신이가 용족의 은인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성국언이 놀랄 정도로 신랄한 태도였다.

용제건은 평소와 같은 말투를 썼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저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용제건의 말은 황호를 탓하는 것과 동시에 호족이 조의신을 보호할 수 없으면 용족에서 책임지겠다는 말로도 들렸다.

용제건이 유희계 용족이라고는 하나 허언을 뱉지는 않는다.

용제건이 호족의 수장에게 저리 말한다는 건 여차하면 용족 측에서 정말로 조의신을 맡겠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의신이가 용족의 은인이기도 하다고? 저 말을 해석하면 의신이는 호족의 은인이자 용족의 은인이라는 뜻이 된다.’

김신록은 용제건의 말에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긴 했으나 그 말을 부정하거나 끼어들어 말을 막지는 않았다.

황호는 물론이고 김신록까지 저 말을 받아들이는 걸 보니 조의신은 진정 용족의 은인인 듯했다.

성국언은 리플레이 속에서 본 용족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용족과 연관하여 리플레이와 달라진 점이 여럿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 후에도 용제건이 생존한 것 등 인과가 분명한 사항이었으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리플레이 속의 황룡은 어딘가 이상했어. 용궁으로 수혁이와 다인이를 초대한 게 이상했지.’

이후 마음에 걸려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용왕신의 무녀 계승식은 무사히 치러졌다고 한다.

무녀들의 대대적인 세대교체가 일어난 것 외에는 드러난 문제가 없었다.

그 외에도 리플레이에서는 일어난 불상사들이 현실에선 발생하지 않았다.

조의신이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한반도에서 높은 지명도를 가진 두 진족이 동시에 은인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느끼는 바가 있었다.

‘전부 의신이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구나.’

용제건의 태도에 성국언이 확신했다.

조의신이 용족의 은인 소리를 듣는 건 용궁 건과 연관이 있으리라.

자신의 모습으로 왼눈을 잃은 후배는 성국언의 생각보다 더 큰 일을 해내고 있는 듯했다.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 호족의 은인 건에 용족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용제건의 말에 황호가 단호히 답했다.

용제건이 더 뭐라고 하기 전에 이번엔 김신록이 말했다.

“재생 시술을 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

“황명은광병원에 수배해 뒀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황호가 말꼬리를 흐렸다.

“조의신의 왼눈이 있던 곳을 보았다. 구름이 얽혀 있는 걸 보니 운사의 힘에 당한 것 같더군.”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평범한 재생 시술로는 왼눈을 되찾을 수 없나 봐?”

용제건이 이어서 말했다.

용제건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웃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은인의 건에 용족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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