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56)
105. 경계 (9)
가든 내부의 광원은 매우 약했는데, 저 화로만큼은 달랐다.
화로 속의 불꽃은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빛을 뿜었다.
그때마다 화로와 이어진 바닥에서 힘이 물결치듯 가든으로 퍼져 나갔다.
‘가든의 힘이 저 화로와 연결되어 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내 왼눈에 보였던 운사가 있는 화로임이 틀림없었다.
생사의 안광으로 화로에 불이 들어와 있는 건 봤지만, 실제로 보니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흑막은 형체가 없는 구름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열기를 택한 듯하다.
‘무지기를 물의 기운과 쇠사슬로 억누른 것과 같은 이치겠지.’
무지기는 저것만으로도 부족해 도시후의 광림을 사용하고 나서야 억누를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저 화로는 저것들을 합친 것과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힘을 지니지 않았을까?
평범한 불꽃으로 신화에 이름을 남긴 진족을 오래도록 붙잡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 저런 화로가 필요했을 거다.
“……저 화로 안에 있나?”
황지호의 황금색 눈에 화로의 불꽃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을 텐데도 확인이 필요할 만큼 믿기 어려운가 보다.
내가 긍정하자 황지호가 화로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왔다, 운사.”
화르륵.
화로 속 불꽃이 마치 대답하는 것처럼 타올랐다.
불꽃은 계속 절규하는 것처럼 제멋대로 타올랐다가 잦아들기를 반복하는 중이었기에 그냥 우연일지도 모른다.
근거는 전혀 없지만, 정말 저 둘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금방 가겠다.”
황지호가 그렇게 말하자 화로의 불꽃이 눈에 띄게 안정되었다.
진정 저곳에 운사가 있는지, 의사소통이 가능한 건지 회의적인 듯한 반응을 보이던 전무영이 탄식했다.
운사는 타들어 가는 신체와 정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황지호의 말을 듣고 기다리기로 한 거다.
‘황지호가 앞뒤 가리지 않고 화로 쪽에 접근하면 새로운 수를 뒀어야 했을 텐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네.’
황지호는 곧바로 달려드는 대신, 운사를 다독이고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을 택했다.
황지호가 운사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온기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있다는 걸 안다.”
운사가 아닌 다른 자한테 하는 말이었다.
황지호의 시선이 화로 주변의 먹구름으로 향해 있었다.
겉보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파아아앗!
황지호의 몸 주변에서 황금빛 입자가 떠올랐다.
황지호는 황금색의 이능파를 마력으로 변환하고 주변에 퍼뜨려 언제든 원하는 형태의 결계를 작성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능파의 양, 방대한 힘을 처리할 만한 집중력, 마력을 다루는 지식, 자신의 수를 드러내도 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몸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기습은 무의미하다.”
갈림길에서 나뉘어 움직이게 되었을 때, 적은 다수인 쪽에 함정을 준비하거나 기습을 시도할 것이라 예상했다.
적은 여전히 이 가든을 지배하며 운사를 인질로 잡고 있으니 이를 활용할 수는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니 적은 구름 속에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듯했다.
황지호가 도발해도 적은 조용했다.
그사이에도 황지호 주변에는 황금빛 입자의 양이 늘었다.
‘온다.’
황지호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한 걸까, 적이 기습을 시도했다.
나보다 먼저 이를 알아챈 듯한 황지호가 조소했다.
“무의미하다고 하지 않았나.”
콰드드득!
방금 전까지 황지호가 서 있던 자리에 결계술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잔해 사이로 구름에 휩싸인 덩어리가 순식간에 벽으로 녹아드는 게 보였다.
황지호는 단숨에 마력을 다뤄 결계를 만들고, 자신은 이탈하였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적과 황지호가 공방을 주고받은 것이다.
거기에 더해 황지호는 결계에 돌진하는 적을 관찰하고, 정체를 간파하기 위한 수를 두었다.
파앗!
황지호가 손가락을 한 번 휘두르자 부수어진 결계의 잔해가 재조립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저 정도의 공격에는 박살 나지 않도록 단단한 결계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일부러 내구도를 낮추었을 것이다.
무언가의 본을 뜰 때는 무른 소재를 이용할 필요가 있으므로 황지호가 결계의 수준을 조정한 듯했다.
산산조각 났던 잔해는 결계를 공격한 무언가의 형태를 재현했다.
그것은 송곳니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한 눈으로 본 거라 잘못 봤을 가능성도 생각했는데, 제대로 봤네. 구름 사이로 이빨이 보였어. 호랑이 송곳니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
적에게 그럭저럭 괜찮은 힘이 있는 건 분명했다.
한반도에서 호랑이와 연관된 기원은 강력한 힘을 지니므로 저런 송곳니를 지니고 있다면 어디서든 힘자랑을 할 만했다.
하필 그 상대가 호랑이의 우두머리인 황지호였기에 큰 의미는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형태를 봤기에 적의 정체를 추측할 단서를 더 얻었다.
‘다수와의 싸움을 꺼리고, 호랑이의 송곳니를 가지고, 먹는 것과 관련이 된 전승을 가진 진족.’
세 번째 단서 또한 황지호의 결계술을 통해 얻었다.
결계의 일부는 뜯어 먹혀 있었다.
적이 기습을 시도해 황지호와 공방을 주고받을 때 내가 언뜻 본 광경에선 구름 사이의 이빨이 결계를 씹어서 삼키려 했었다.
‘저런 조건을 가졌으며 흑막을 따를 만한 자.’
여기까지 생각하니 답이 나왔다.
황지호가 이쪽을 흘끗 보다 말했다.
내가 답을 찾았다는 걸 안 건지, 황지호가 말했다.
“답을 알았나 보군.”
이만한 힌트가 있으니 그야 답을 낼 때가 됐다.
내가 입을 열려 하자 전무영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내 뒤를 지켰다.
내가 답을 맞추면 표적이 황지호에서 나로 바뀔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나는 이 공간에서 숨을 죽이고 나를 지켜보고 있을 그 존재에게 말을 걸듯 답했다.
“먼 옛날, 중국 신화에 저런 형태의 송곳니를 가진 괴물이 있었습니다. 그 괴물은 악한 자를 따르며 강자에게 약하며 약자에게 강했습니다. 또한, 식욕이 상당해 뭐든지 먹어 치우려 했죠. 방금 결계를 씹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말을 아직 다 마치지 못했는데, 사라진 왼쪽 눈이 시리게 느껴질 만큼 강한 살기가 쏟아졌다.
저런 기운이 나를 노리는 걸 보면 내가 정답을 말하는 중인가 보다.
“그 괴물은 무리 짓는 이들을 피한다고 합니다. 다수를 상대할 만한 용기와 힘이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고오오오……!
상대를 자극하는 말을 골라서 하자 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나를 겨냥하던 살기가 주변에도 새어 나가 전무영이 긴장한 얼굴을 했다.
황지호는 무심한 눈으로 마력을 다시 운용했다.
그러자 넓게 퍼져 있던 황금빛의 입자가 그물의 형태로 엮이기 시작했다.
‘흑막의 수하가 될 만한 진족에 관해선 이 세계에 오기 전부터 계속 생각해 왔어. 악한 자에게 복종하며 선한 자를 증오하는 진족의 수는 생각보다 적지 않았지.’
신화, 전설 속에서는 선하고 위대한 존재가 주역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 반대의 사례도 만만치 않게 많다.
지옥과 악마를 묘사한 서사시, 시대를 뒤흔든 악수(惡獸)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수많은 후보 중에 이 조건에 맞는 괴물은 하나였다.
나는 그 괴물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사흉(四凶) 중 가장 약한 그 괴물은 굽어 있는 뿔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직접 보면 확실할 겁니다. 내 말이 틀립니까? 도철.”
콰드드득!
도철의 이름을 언급하자 눈앞이 번쩍하고 빛났다.
오른쪽 눈앞은 황금의 결계로 막혀 있었고, 결계에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긁고 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도철이 내 남은 눈 하나를 노리고 덤벼들었고, 황지호가 이를 예측해 막은 듯했다.
저리 흥분한 걸 보니 정답이 확실한가 보다.
‘공연히 동요한 척하여 정체를 감추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살기는 그냥 꾸며 낸 것 같지는 않아. 방금은 황지호한테 잡힐 뻔하기도 했고.’
황지호는 결계를 다시 펼치고 있었다.
도철이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간 건지,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번에 포획하려고 했건만 제법 빠르군. 그렇게 약이 오르면 직접 모습을 드러내 싸우면 편할 것을.”
상대의 정체를 알아내자 황지호는 더욱 과감하게 움직였다.
“도철, 이 몸이 너를 구름 밖으로 끌어내 주마.”
파아아앗!
황지호가 크게 손을 젓자 거대한 그물이 이 공간 전체를 감쌌다.
멀리서 보면 마치 황금으로 된 공간 안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물망 같은 결계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순도 높은 마력이 정밀한 형태로 배치되어 있어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카앙! 카아앙!
황금의 결계 그물망 한쪽에서 격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철이 그물망에 끌려 나오지 않기 위해 저항하며 구름 뒤로 숨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플로어 마스터들의 저항이 제법 심하군. 동시에 싸우는 건 힘 조절이 까다로운데.”
도철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포착하자 전세는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던 도철은 이제 죽지 않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공격을 위해 사용하던 송곳니는 어느덧 생존을 위한 방패가 되었다.
황지호와 도철의 역량 차이는 확연했다.
황지호는 지력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운사의 힘을 등에 업은 도철을 가지고 놀았다.
“힘을 잘못 조절하면 죽여 버릴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겠군.”
황지호는 도철을 죽일 마음이 없었다.
운사가 당한 일을 생각하면 끔찍한 고통을 주고 죽이고 싶겠지만, 친우를 생각해서 참고 있었다.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던 풍백, 우사, 운사에게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했기에 살아 있는 흑막의 부하를 포획해야 했다.
‘생포하기 곤란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힘 차이가 나면 어렵지 않을 거야.’
황지호의 힘이라면 충분히 도철을 생포하는 게 가능했는데, 지금 당장 그러지 못하는 건 황지호가 여러 분신을 동시에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플로어 마스터의 토벌이 거의 완료된 건지, 황지호가 힘을 점점 정교하게 다루고 있었다.
구름 벽 너머에서 처음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할 말이 있다!]
“그 말은 호족의 나락에서 듣겠다.”
황지호가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황금의 결계가 구름을 갈라내며 틈을 만들어 무언가를 끄집어내었다.
완전히 꺼내지는 못했지만, 결계와 구름이 만들어 낸 틈 사이로 굽어 있는 뿔과 멧돼지 같은 머리가 보였다.
도철이 다급하게 외쳤다.
“혼돈의 힘을 빌려 이 가든에 발을 들인 것들을 파악했다. 네놈들을 포함해 세 집단이더군!”
세 집단이라고?
내 계획대로라면 맹효돈 일행과 함근형 선생님, 흑마가 합류했어야 한다.
대체 그들이 어떻게 갈렸는지 알 수 없지만, 가장 집요하게 노려지던 맹효돈이나 그의 은사가 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리는 것을 마쳤을 때, 도철이 말했다.
“셋 중 가장 수가 적은 자들 쪽으로 사흉 중 하나가 가고 있다.”
굴욕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도철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고작 인간 둘이서 나보다 강한 사흉을 당해 낼 수 있겠나?”
도철은 인질을 잡고 거래를 청할 생각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