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65)
106. 혼 (3)
이 세계에는 용족이 존재하고, 용궁 또한 존재한다.
얼마 전 방문했기에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용궁과 이사라는 단어의 조합이 어색하게 느껴져 사고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멍한 머리로 생각하고 있자니 근본적인 의문이 치솟았다.
‘이사? 용궁은 이사할 수 있는 거였나?’
보통 이사라고 하면 살고 있던 사람이나 입주한 업체가 이동을 하는 것을 뜻한다.
장소 자체가 움직이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용궁은 바다 깊은 곳에 있지 않았나?
용궁으로 이동하기 위해 얼마나 까다로운 과정을 거쳤는지 새록새록 떠올랐다.
용궁으로 전이할 당시 청룡은 지력을 끌어다 쓰고, 무녀들은 오색 채운을 부려 전이에 힘썼다.
그만큼 용궁은 지상으로부터 먼 곳에 있기에 어떻게 이사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그래도 용제건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좀 더 잘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계 충돌 이후 발생한 현상들을 고려하면 불가능하지는 않아. 이계의 틈도 물리 법칙을 무시하고 있고…… 아니, 어떻게 이사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지.’
통증 때문에 사고가 잘 안 되는 걸까, 용제건의 괴상한 발언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운 탓일까.
본질을 놓칠 뻔했다.
먼저 용궁이 용족들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했어야 했다.
용궁은 용족의 힘의 상징이자 용왕신과 이어지는 매개이기도 했다.
이무기의 힘이 용궁을 짓눌렀을 때, 청룡과 황룡이 힘을 쓰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런 용궁을 옮겼다는 건 용족들의 생각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뜻일 거다.
“용궁은 인간계와 신의 경계 아닌가. 그 경계를 지키기 위해 고립을 택한 주제에 잘도 이사를 했군.”
“그건 황호 씨도 봐서 알잖아?”
황지호가 질린 얼굴로 말한 반면, 용제건은 실눈을 뜨며 웃었다.
용제건은 웃고 있기는 했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황지호도 봤다는 그건 분명 무녀들의 배신 건을 가리키는 듯했다.
“저번 사건으로 고립을 택하는 쪽이 더 위험하다는 걸 잘 알았거든.”
고립된 용궁 속, 무녀들은 폐쇄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사실 그들이 정말로 속세의 모든 것과 완벽히 멀어져 있어 흑막이 수를 둘 여지조차 없었다면 이런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녀들을 인간 중에서 선발하고, 지상에 있는 용족들과 용궁이 이어져 있는 한 아무리 멀리 있어도 용궁과 이 세계는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애초에 현대 사회에서 모든 것과 멀어져 고립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불완전한 고립은 부패로 이어져 용궁이 붕괴할 위기에 놓였었다.
어쩌면 완전한 고립을 하는 데에 성공했어도 다른 문제가 발생했을 수 있다.
윤여랑은 무녀의 배신에 관한 원인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무녀가 되면 이름을 버리고, 면사를 쓰잖아요. 용왕신님이 강요한 게 아닌데도 말이에요. 그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이름과 얼굴을 감추고, 닫힌 사회에서 지내면 나쁜 생각이 금방 옮기 쉬우니까요!
용왕신과 용족들은 윤여랑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닫힌 사회가 원인이라는 것을 파악했으니 그들은 용궁을 열고자 한 게 아닐까?
그 첫걸음으로 택한 게 용궁의 이사일 거다.
‘용족들은 또다시 용궁을 고립시키면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그래서 새로운 길을 택한 거겠지.’
삐잇!
에어 리무진 내부의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음을 알렸다.
용제건의 말대로 새로운 용궁은 정말 가까웠다.
용궁은 강력한 힘을 동원하고, 전이의 압력을 견뎌야 겨우 갈 수 있던 장소였으나 이젠 차를 타고 갈 수 있었다.
“와 본 적이 있다. 이계 충돌 이후 처음 용족이 터를 잡았던 곳이군. 결계를 작성하기 위해 방문한 이후로 처음이다.”
황지호가 창밖으로 보이는 서해안 연안을 보며 말했다.
황지호의 말대로 용족은 처음부터 붉은 사자 팀 빌딩에 살던 게 아니었다.
자세한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용족은 이계 충돌 이후 서해안 연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용족은 인간과 결혼한 후예를 위해 12지 결계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감수하고 붉은 사자 팀 빌딩으로 갔다.
이곳이 바로 용족이 붉은 사자 팀 빌딩으로 옮기기 전에 머물던 곳이었나 보다.
‘이 터는 여전히 용족이 소유하고 있을 테니 용궁을 이사시킬 수 있겠지.’
그 거대한 용궁을 대체 어떻게 옮겼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말이다.
멀리서는 용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곳이 유독 해무가 짙어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에어 리무진이 멈추기 직전, 나는 문득 느껴 본 적이 있던 기운을 감지했다.
‘용궁에서 느꼈던 힘이다.’
그저 바닷가 주변에 낀 안개처럼 보였던 해무가 가까이 다가가니 다르게 보였다.
오색 채운이 바닷가를 덮고 있었다.
바다와 맞닿은 땅 주변, 바다의 일부가 다섯 색의 구름으로 빛났다.
그중 유독 유황색의 구름이 반짝거렸다.
‘윤여랑의 힘이야. 윤여랑도 용궁 이사를 도운 건가?’
그야 용왕신의 무녀 중 가장 뛰어난 윤여랑이 이런 중요한 계획에서 빠질 리가 없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니 윤여랑의 말이나 보인 행적에 힌트가 있었다.
윤여랑은 용족과 협력해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했었다.
윤여랑에게 도와주겠다고 하자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다고 사양하기도 했다.
‘그게 용궁의 이사였구나! 역시 역대 무녀 중 가장 강력한 윤여랑다운 힘이야. 윤여랑이 도왔다면 용궁의 이사 정도는 가능하겠지.’
머릿속에 있던 의문이 깨끗하게 풀렸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용왕신이 협력했다면 용궁의 이사쯤은 얼마든지 가능했을 거다.
의문은 감탄으로 바뀌었다.
“오색 채운을 보더니 갑자기 표정이 좋아졌군.”
“용족의 은인은 무녀의 힘을 쓰잖아? 그것과 관계가 있을 거야.”
“호족의 은인은 호족의 힘도 다룰 수 있다.”
“용족의 은인이 내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거 알지?”
“그야 물론. 네놈의 모습을 했다가 용의 이빨에 몸을 꿰뚫리지 않았나. 모를 리가.”
용제건과 황지호가 하는 말이 다 맞는 소리긴 한데 왜 자꾸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의도치 않게 저 모든 대화를 바로 앞에서 듣게 된 전무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중인 것 같았다.
시끄러운 와중에 에어 리무진이 드디어 정차했다.
“앞장서라, 용제건.”
“그래, 안내할게.”
황지호가 용제건에게 안내를 맡기는 장면 같았으나 어쩐지 방패를 앞세우는 모습 같기도 했다.
용제건에 이어 전무영과 함께 에어 리무진 밖으로 내렸을 때,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사아아…….
오색 채운으로 잘 보이지 않던 앞이 훤히 열렸다.
누가 힘을 부려 채운을 움직인 것 같진 않은데, 저절로 구름이 움직인 것처럼 보였다.
“용궁의 주인이 돌아온 걸 느낀 거야. 잘 왔어.”
“적호가 없는 걸 감사히 여겨라. 네가 상대라 해도 쌍욕을 했을 거다.”
저 두 진족이 하는 소리는 잠시 무시하고 앞을 보았다.
오색 채운 사이로 해저에서 보았던 용궁이 보았다.
용왕신과 무녀의 힘을 동원해 공간을 왜곡시켜 용궁을 이사한 건지, 거대한 규모의 용궁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그때와 다른 것이라곤 이전 용궁이 심해 속에 있던 것과 달리 지금은 반 정도만 바닷물에 잠긴 상태라는 것 정도였다.
“정말로 용궁이 여기에 있다니……!”
용궁을 향해 걷는 동안 전무영이 나를 지지한 손에 힘을 주며 연신 감탄했다.
오색 채운의 틈을 통과했을 즈음, 헛소리를 주고받던 황지호와 용제건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시선은 전무영이 나를 지지한 손에 꽂혀 있다가 내 안대 위로 향했다.
스르륵.
때마침 오색 채운의 틈이 닫혔다.
그 둘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조의신, 이제 본 모습으로 돌아와라. 아무리 먼 곳을 살피는 힘이 있어도 이 너머는 보지 못할 거다.”
“응, 용궁의 힘이 있으니까 이제 국언이 흉내는 그만 내도 돼.”
저 둘은 리무진에서 내린 후, 헛소리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입가를 가리거나 입술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입 모양을 읽혀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누출되지 않도록 조심한 것 같았다.
먼 곳에서 강력한 이능으로 포착될 가능성을 고려해 배려한 거다.
그런 배려를 하느니 그냥 헛소리를 안 했으면 좋았을 것 같긴 하다.
‘어쨌든, 둘의 말대로 이제 플레이어의 궤적을 해제해도 돼.’
내 뒤로 오색 채운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하고 광림을 해제했다.
나는 한순간에 조의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성국언과 체격 차가 있는 탓에 옷이 헐렁해지고, 덩달아 안대도 조금 느슨해졌다.
잘못 움직이면 바로 안대가 흘러내릴 것 같았다.
다시 고정하고 싶은데, 황지호가 결계의 힘으로 모양을 다듬은 안대라 그냥 손힘으로 정리가 될지 모르겠다.
“…….”
주변이 조용했다.
셋이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저렇게 보고 있으니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그렇게 많이 흐른 것도 아닌데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다행히 안에서 마중이 나왔다.
휘익!
황룡의 권속, 운룡이 작은 구름을 타고 빠르게 날아왔다.
급히 온 건지 구름 조각이 여기저기 날리고 운룡의 꼬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나를 발견한 운룡이 반가워하다가 왼눈을 보고 깜짝 놀라 그 자리에 굳었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이런 꼴이라니, 다른 곳에서 수습을 하고 왔어야 했다.
황룡이 마중을 여럿 보낸 건지 뒤이어 운룡들이 더 왔고, 처음 도착한 운룡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오늘 유독 구름 볼 일이 많군. 어서 안내나 해라.”
우르르 나타난 운룡을 보며 황지호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말했다.
오늘 가든에서 구름을 많이 보긴 했다.
운룡은 황지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건지 손짓하며 길 안내를 시작했다.
멀리서 본 용궁은 내가 기억하는 대로였지만, 세세한 길은 황룡이 재구성했는지 길이 달라져 있었다.
‘용궁의 정보가 흑막에게 새어 나갔으니 길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겠지.’
운룡은 다섯 개의 궁 중 가운데에 있는 황룡궁 안으로 향했다.
구체적인 행선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걷는 동안 황룡궁의 풍경에 감탄했다.
이사한 용궁에 손님이 올 것을 대비한 건지 조경에 더욱 신경 쓴 것 같았다.
황운호 주변에 저번에는 보지 못한 누각이 하나 있었는데, 흑단과 진주로 치장된 외관이 매우 아름다워 눈을 떼기 어려웠다.
한 눈으로 보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황룡이 엄청 아쉬워하고 슬퍼했어. 원래는 직접 용족의 은인을 안내하면서 이 길을 걷고, 저 누각을 구경시켜 주려 했거든.”
내가 누각을 보고 있자 용제건이 어딘가 뾰족하게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황룡은 손님에게 이 장소를 공개하는 순간을 고대한 모양이었는데, 내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계획이 어그러진 듯하다.
황룡에게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자니 황지호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이윽고 운룡의 안내에 따라 황룡궁의 지하에 도달했다.
운룡은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섰는데, 문 너머로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대규모의 의식을 준비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끼이이…….
문이 열리자 오색 채운 사이로 다섯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넷은 윤여랑을 비롯한 용왕신의 무녀들이었고, 남은 하나는 황룡이었다.
구름을 제어하던 황룡이 손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왔구나, 기다렸단다.”
황룡의 얼굴에는 근심과 슬픔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