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66)
106. 혼 (4)
황룡을 보고 인사하자 안대로 가려지지 않은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이런 때에도 예의 바르구나.”
“바쁜 시기일 텐데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이사 때문에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용궁은 궁의 주인을 따르는 법이지. 용왕신께서 윤허하시고, 나와 청룡이 마음을 굳히고, 의신이가 지상에 있으니 이사는 어렵지 않았단다.”
뭔가 좋은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은데, 내용이 이상했다.
아주 당연한 듯이 나를 황룡, 청룡과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있었다.
농담처럼 들리던 용궁의 주인 소리에 점점 무게가 실렸다.
황지호는 심드렁한 얼굴로 황룡의 말에 트집을 잡았다.
“조의신의 의사는 전혀 없었던 듯하다만.”
“바쁘고 겸허한 아이이니 우리가 노력해야지. 의신아, 편히 있으렴. 모처럼 네 궁에 돌아오지 않았느냐.”
“호족의 은인이 용궁에 돌아왔다? 황룡, 이사 스트레스로 말이 막 나오는 건가.”
“나는 황호 또한 환영한다. 같이 온 인간들도.”
황지호가 뭐라고 하긴 했지만, 황룡은 부드럽게 받아넘기며 상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말이 있었다.
‘방금 인간들이라고 했지. 전무영에게 하는 말 같은데…… 나를 포함해서 하는 말인가? 아니면 누가 더 있나?’
여기에 또 올 사람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주변에서 산만하게 떠다니던 운룡들이 황룡에게 날아가 손짓과 발짓을 해 댔다.
황룡이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속삭이자 운룡들이 안도한 얼굴로 구름 위에 축 늘어졌다.
서둘러서 마중 오느라 지친 것 같은데 운룡들을 좀 쉬게 해 줬으면 좋겠다.
“황룡, 준비는 멀었어? 빨리 안 되면 내가 소원의 힘을 쓸까?”
“곧 될 거다. 무녀들도 준비를 마친 것 같구나.”
용제건이 재촉하자 황룡이 달랬다.
여기저기서 황룡을 찌르는데도 중심을 잘 잡고 있어 과연 오래 용궁을 관리한 진족다웠다.
황룡의 말대로 무녀들의 준비가 끝났는지, 오색 채운을 다루는 데에 열중하던 무녀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무녀는 아직 네 명이야. 여전히 녹의 무녀 자리가 공석이구나.’
유황의 무녀 자리에 오른 윤여랑이 녹색의 채운도 다루고 있었다.
워낙 뛰어난 무녀다 보니 두 개의 채운을 다루는 건 아무렇지 않은 듯 유황색, 녹색의 구름이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다른 채운도 윤여랑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밝게 빛났다.
자색의 구름은 귀가 밝은 무녀가, 벽색의 구름은 눈이 좋은 무녀가 맡고 있었다.
홍색의 구름에 눈을 돌린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때 본 그 용궁의 막내 무녀였던 분이지? 인상이 많이 변했네.’
용왕신을 강림시킬 때, 배신자일 가능성을 지우기 위해 면사를 벗어 달라 요청한 분이라 그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기억하는 대로였으나 표정이나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전에 봤을 때에는 사건의 영향 때문인지 마치 출퇴근 중인 직장인 같은 지친 인상이 컸는데, 지금은 그런 느낌이 없었다.
큰 힘을 사용한 직후인데도 편안해 보일 정도였다.
블랙 기업의 퇴사는 만병통치약이라는데, 저분은 탈주 효과를 톡톡히 본 것 같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표정이 딱딱해졌다.
무녀들을 놀라게 한 것 같다.
“의신이 오빠? 아니, 어쩌다 그렇게 다치셨어요! 오빠 눈이…….”
유황색의 무녀 의상을 입은 윤여랑이 나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내내 웃는 얼굴만 봤는데, 윤여랑이 저런 얼굴을 하게 해서 미안했다.
안심시켜 줄 만한 말을 골라 답하기 전에 윤여랑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랑 무녀 언니들이랑 황룡 님이랑 용왕신님이 금방 치료할 거예요! 이쪽으로 오세요!”
“여랑이의 의욕이 넘치는구나. 이리로 이동해 다오.”
황룡이 가리키는 곳은 이 방에 펼쳐진 마법진의 중앙이었다.
황색으로 꾸며진 황룡궁 안이라 그런지 마법진 주변으로 위치에 맞춰 장식된 오방색의 용들이 눈에 띄었다.
용족과 함께 향후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불렀을 거라는 가능성도 생각했었다.
설마 했지만, 나를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 데려왔나 보다.
괜찮다고 사양할 틈도 없이 전무영이 움직였다.
“이쯤이면 되겠습니까?”
“조금 더 안쪽으로 가는 게 좋겠구나.”
전무영은 황룡과 초면인데도 척척 말을 주고받으며 나를 정중앙으로 데려갔다.
가까이 갈수록 힘의 압력이 커졌다.
정말 이런 힘을 써도 되는 걸까?
하지만 거절하거나 도망갈 기력이 없었고, 너무 늦은 것 같았다.
나중에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게 낫겠다.
펑!
목적지에 도착하자 황룡이 구름을 부려 의자를 만들었다.
그냥 구름을 뭉쳐 만들면 볼품없어 보여야 할 텐데, 의자의 형태와 구름 끝의 곡선이 우아했다.
내가 구름 의자에 앉자 전무영이 내 어깨를 아주 가볍게 토닥이고 걸어 나갔다.
전무영이 완전히 밖으로 빠져나간 후, 구름 의자에 몸을 맡겼다.
‘시선이 따가워.’
황룡궁 지하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려 있었다.
시선이 따갑고 무겁게 느껴져 덩달아 마음도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감사 인사용으로 줄 선물 후보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용왕신님, 저희의 노래를 듣고 의신이 오빠를 치료해 주세요!”
윤여랑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자 마치 용왕신이 바로 그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오색의 채운이 빛을 뿜었다.
이어서 윤여랑의 노래를 시작으로 다른 세 무녀들이 연창했다.
오색 채운 속에서 맑은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자 청명한 기운을 띤 이능파가 나를 감쌌다.
아직 노래는 몇 소절 부르지 않았는데 사고가 뚝뚝 끊길 정도의 통증이 가라앉고, 신체에 힘이 돌아왔다.
‘예전에 배신자들에게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지. 그때와는 비할 수준이 안 될 만큼 힘의 차이가 커.’
노래의 중심에 있었기에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현재 무녀들은 계승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다섯 무녀 중 한 자리가 공석인데도 그때 무녀들보다 큰 힘을 다루고 있었다.
윤여랑이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다른 무녀들 또한 전 무녀들에 비해서 강한 것 같았다.
치유의 노랫소리는 어느덧 눈 쪽으로 향했다.
“용족의 은인의 눈을 앗아 간 건 구름의 힘이다. 노래를 멈추지 말고 채운을 다뤄야 한다.”
황룡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룡의 조언을 받아들인 이들이 노랫소리에 맞춰 오색 채운을 움직였다.
지나치게 강력한 힘을 다루는 바람에 오색 채운이 노랫소리에 밀려나 움직이려 했는데, 황룡이 무녀들의 오색 채운이 마법진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도왔다.
가락에 맞춰서 빙글빙글 움직이던 오색 채운은 이윽고 눈 크기 정도로 압축되어 내 눈앞에 멈췄다.
휘이이……!
오색 채운의 힘에 밀려 황지호가 만든 안대가 눈가에서 흘러내렸다.
이능파의 흐름 속에서 혹시 어디론가로 날아갈까 봐 안대를 급히 손에 움켜쥐었다.
그러자 곧바로 왼눈이 있었던 자리에 오색 채운이 멈추며 노랫소리에 담긴 힘을 내게 전했다.
통증이 멎었던 그 자리에 온기가 느껴졌다.
그 온기에서 용왕신의 힘이 전해졌다.
‘용왕신의 기운이야. 지금 무녀들이 용왕신과 이어져 있구나. 그런데도 저렇게 고생할 정도라니…….’
노래를 하는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윤여랑을 필두로 무녀들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용왕신의 무녀들이 용궁에서 신의 힘을 대행하고 있는데, 안구 하나를 재생하는 데에 저렇게 고생할 것 같진 않았다.
왼눈을 잃었던 순간, 생사의 안광을 사용하던 중이었던 게 문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생사의 안광을 쓰고 있는데도 공격을 당했지. 도철은 운사를 이용해 그보다 강한 힘으로 눈을 없앴으니 그만큼 재생에도 힘이 드는 거야.’
나는 지금이라도 멈추는 게 어떻냐고 제안하고 싶었다.
윤여랑을 비롯한 무녀들을 고생시키기 위해 이 세계에 온 게 아니다.
한 눈으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고, 지나치게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그때 수를 고안해도 될 거다.
그렇게 생각해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황룡의 목소리가 들렸다.
“청룡, 준비한 걸 가져왔나?”
“물론이다.”
이 자리에 청룡이 있다고?
무녀들이 노래를 부르는 사이에 청룡이 온 건가.
황룡궁이 넓다고 하나 누가 오고 가는지 모를 만큼 내 감각이 둔해졌나 보다.
청룡이 용 모양의 장식이 된 상자를 열어 오색의 진주를 꺼냈다.
청룡은 푸른 이능파를 움직여 수십 개의 진주를 마법진 위로 흩뿌렸다.
촤르륵!
오색 채운에 진주가 녹아들었다.
저 진주들은 보통의 보석이 아닌 듯했다.
전에 선물 받은 흑진주만큼은 아니어도 제각각 힘을 품고 있는 게, 용궁에서 만들어진 귀한 진주인 듯했다.
저것들을 눈 하나 고치자고 써도 되는 걸까?
“아아아……!”
진주의 힘이 더해진 순간, 벽의 무녀와 자의 무녀가 순간 집중력을 잃었다.
오색 채운 중 두 개의 색이 지워지려 할 때, 윤여랑의 채운이 두 무녀를 감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윤여랑이 네 개의 채운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보통 무녀가 다루는 구름의 색은 하나고 인접한 색의 구름까지 최대 셋을 다룰 수 있다고 들었는데, 윤여랑은 지금 그걸 넘어섰다.
‘설마 윤여랑은 오색 채운을 전부 혼자서 다룰 수 있는 게 아닐까?’
두 무녀가 고마움을 표하며 고갯짓을 할 때에도 윤여랑은 웃으며 노래하고 있었다.
윤여랑이 그 둘을 도왔을 즈음엔 왼눈에 고여 있던 어두운 구름이 흩어지고, 묵직한 느낌이 대신했다.
텅 비어 먹구름으로 채워져 있던 곳에 왼눈이 돌아온 듯했다.
무녀들이 부른 치유의 노래가 멎었을 때 왼눈에 흐릿하게 상이 잡혔다.
‘왼눈이 생겼는데…… 이쪽으로만 보는 건 어렵겠어.’
왼눈은 잔뜩 서리가 낀 것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없어졌던 왼눈이 생기고 뭔가가 보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내 왼눈을 보고 있었는데, 할 말이 많은데 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음…… 한 번에 낫게 하긴 어려운가 봐요.”
제일 먼저 내 앞으로 달려온 윤여랑이 의기소침하여 말했다.
윤여랑이 얼마나 애쓰고 고생했는지 아는데, 저렇게 미안해하니 마음이 아팠다.
“앞이 보여. 괜찮아. 치료해 줘서 고마워.”
고맙다는 말에도 윤여랑은 여전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룡이 말했다.
“……직접 보는 게 빠르겠구나.”
황룡이 신호를 보내자 운룡이 의식에 쓸 법한 장식용 거울을 가져왔다.
운룡 둘이 거울로 내 얼굴을 보여 줬다.
왼눈을 보니 다들 이상한 반응을 보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력이 좀 떨어진 줄 알았는데…….’
본래 검은색이었던 내 왼눈에 오방색이 깃들어 있었다.
오색 채운과 진주의 색이었다.
“용왕신께서는 무녀의 힘으로 임시 안구를 만드는 것을 택하셨다. 한 번에 재생시키려 하면 네 몸에도 부담이 되는 모양이구나.”
황룡이 내 왼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치료가 오래 걸린다니, 그냥 이대로 놔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황룡은 내가 그런 제안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용왕신과 이야기하여 치료 계획을 잡겠다. 걱정 말고 기다려 다오.”
당분간 색이 변한 왼눈을 감출 수를 생각해야겠다.
황룡의 말에 알았다고 답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내 주변에 서 있는 이들이 보였다.
‘수가 왜 이렇게 늘었지?’
청룡만 온 줄 알았는데, 더 있었다.
먼저 보인 건 적호와 김신록 부자였다.
김신록은 전무영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온 건지, 복장이 같았다.
그리고 진짜 성국언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