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67화 (867/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67)

106. 혼 (5)

성국언이 내 왼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씨익 웃었다.

“하핫, 내가 오는 걸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나 보군.”

날이 서 있는 이들이 꽤 있어서 긴장했는데, 성국언이 웃으니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성국언이 말하는 동안에는 이곳에 있는 진족들도 조용했다.

“나는 네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해야 할 입장인데, 네가 그걸 달갑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구나.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해야겠다.”

“아뇨, 저는 딱히…….”

“고맙다, 의신아.”

뭐라고 하기 전에 성국언에 의해 말이 막혔다.

성국언은 작은 것에도 감사를 표하는 참된 어른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내 눈 때문에 마음을 더 쓰는 것 같은데, 좀 괜찮은 척할 걸 그랬다.

이런 거창한 치료를 받는 장면과 색이 변한 눈을 보여 주는 바람에 괜히 성국언의 죄책감이 무거워진 것 같아 미안했다.

성국언은 힘 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네 치료를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사양하지 말고 모든 치료를 받거라. 의신이 네가 혼자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길 바란다.”

치료가 길어질 것 같고, 용족에 지나치게 신세 지는 것 같고 그래서 괜히 걱정하게 할까 봐 혼자 치료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성국언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했다.

황지호와 황룡은 성국언이 한 말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같은 색을 상징하는 진족들은 닮는다더니만, 이상한 데서 죽이 맞았다.

성국언은 시원하게 웃는 것과 달리 무거운 말을 했다.

“내 모습으로 잃은 눈인데, 염치없이 내가 두 눈을 뜨고 다닐 수는 없지. 네 눈이 나을 때까지 나도 한 눈을 쓰지 않겠다.”

“……네?”

“내가 두 눈을 쓰길 바라면 얼른 낫거라.”

성국언은 반론은 들을 생각이 없는 듯 내 어깨를 가볍게 치고 물러났다.

나 때문에 성국언이 한 눈을 안 쓴다고?

성국언은 허언을 하는 인물이 아니다.

아무리 크게 다쳐도 매주 이계 공략을 하겠다는 공약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저 말을 했으니, 이계 공략 중에도 정말 한 눈만 쓸 것이다.

성국언의 능력 중에는 눈을 활용한 이능이 있는데, 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전무영이 좀 말렸으면 좋겠는데…….’

이 자리에서 성국언을 말릴 만한 유일한 인물을 봤지만,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전무영은 성국언과 내가 대화를 마치자마자 바로 와서 말을 걸었는데, 딱히 한 눈만 사용하겠다는 결정에는 뭐라 하지 않았다.

그저 성국언이 없는 자리에서 있던 일을 사무적으로 간략하게 보고할 뿐이었다.

전무영도 말리지 않으니 답이 없었다.

“이곳에 성국언이 온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향후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다른 하나는 마지막으로 가짜와 진짜를 한 장소에 둬 둘의 구분을 하기 어렵게 만들기 위함이다.”

황지호가 안 물어본 것을 말해 줬다.

황명 빌딩에 배치해 둔 황지호의 분신과 그곳에 있던 이들이 작전 회의를 한 듯하다.

황지호의 말에는 나도 납득했다.

‘성국언이 나와 같은 장소에 한 번 머무는 게 적의 눈을 확실히 속일 수 있긴 해. 흑막의 성격이라면 진짜, 가짜 성국언 양쪽의 행방을 확인했을 테니까.’

문제는 성국언이 한 눈만 쓰겠다는 충격적인 선언이다.

슬프게도 이 자리에서 저 결정에 반대하는 건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황지호는 이어서 말했다.

“한 눈만 쓰는 건 그자의 눈을 속이기에도 적절한 수지. 이후에 성국언은 바로 황명 의료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이 몸의 결계술을 사용해 만든 안대를 착용할 예정이다.”

그렇게 하면 성국언이 용족과 호족과 연이 있다는 설이 더욱 공고해지고, 가든에 있었던 게 내가 아니라 성국언이었던 것처럼 가장하기 쉬워질 거다.

내가 성국언의 결정을 막을 만한 구실이 점점 없어졌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얼른 치료를 받고 낫는 것.

나는 황룡에게 가능한 한 빨리 치료 계획을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치료를 받을 결심이 든 것 같구나. 자주 만날 생각에 기쁘단다.”

냉정하게 따지면 이번 사건은 용족과는 큰 관계가 없었다.

그러니 황룡 입장에서 보면 그냥 번거롭고 까다로운 일을 떠맡은 건데, 기쁘다고 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조의신에게 쉬라고 하고 싶지만, 듣질 않겠지.”

“치료를 받아서 괜찮아.”

“괜찮다는 말을 들으려고 한 소리가 아니다.”

역대 최강의 무녀가 치료해 준 덕에 이젠 통증도 없고 기력도 돌아왔다.

그러니 정말로 괜찮은데 황지호는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래도 나를 빼고 회의를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았기에 반박하지 않기로 했다.

“이곳은 힘의 농도가 짙어 몸에 좋지 않으니 이동하는 게 좋겠구나.”

황룡의 제안대로 전원 이동하였다.

황룡은 중간에 운룡을 불러 이쪽의 안내를 맡겼다.

무녀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향하려는 듯했다.

“나와 무녀들은 치료 계획에 관해 좀 더 자세히 논의하겠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운룡을 통해 나를 부르거라.”

황룡은 청룡이나 용제건 대신 나에게 당부했다.

이곳은 용궁이니까 저런 말은 용족에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황룡은 정말 용궁의 주인 중 하나라 생각하고 나한테 저러는 것 같았다.

황룡이 간 후, 나잇값을 못 하는 진족들끼리 쓸데없는 소리를 해 댔다.

“용족 놈들이 작정하고 저러는군요. 황호, 저러는 꼴을 그냥 보고 있었습니까?”

“조의신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만 참아라. 이용하고 버리면 그만이다.”

“어허, 용궁을 버릴 생각인가? 용족의 은인이 그런 매정한 짓을 할 것 같진 않다만.”

“호족의 은인이 얼마나 매정한지 아직 모르나 보군.”

“의신이가 황호 씨한테는 매정한가 봐?”

저들은 이동 중 내내 그랬는데, 운룡이 안내한 응접실에 도착하고도 저랬다.

김신록은 적호가 좀 험한 소리를 할 때마다 멍한 얼굴을 했고, 성국언은 좀 흥미진진해하며 이 광경을 보고 있었고 전무영은 김신록을 걱정했다.

결국 마지못해 한마디 했다.

“……회의가 끝나야 쉴 수 있는데요.”

저 말을 하니 조용해지고 시선이 왼눈으로 쏠렸다.

빨리 쉬고 싶어서 저런 소릴 한 건 아닌데, 좀 다른 말을 고를 걸 그랬다.

그래도 저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회의를 진행할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시간 낭비하지 않는 게 좋겠군.”

“그러는 게 좋겠군. 언제든지 쉬고 싶을 때 말하도록. 용궁엔 네가 쉴 곳이 많다는 걸 기억하거라.”

“조의신이 오늘 용궁에 머물진 않을 거다. 자, 먼저 이 건에 관해 이야기하지.”

황지호가 결계술로 감싼 관을 허공에 띄웠다.

황지호는 그 난리 속에서도 성형우의 관을 잊지 않고 회수해 왔다.

“먼저 성국언의 조부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

마침 전무영의 보고를 전부 들은 성국언이 앞으로 나섰다.

황지호가 관을 내려놓자 성국언이 몸을 낮춰 성형우를 바라봤다.

성형우는 성국언의 조부였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했기에 둘의 나이 차가 크지 않아 더욱 닮아 보였다.

조손 관계라기보다는 형제처럼 보일 정도였다.

“직접 뵙는 건 처음입니다.”

성국언이 성형우에게 인사했으나 당연히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전에 성형우와 만날 때 했던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 성형우의 시신에 관해서 알게 되었을 때, 부활에 관해서도 생각했었는데.’

성형우의 시신이 잘 보관되어 있고, 아직 그 혼이 윤회의 굴레를 머물고 있다면 부활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나에게는 명계에서 얻은 아주 귀한 아이템이 있어 해 볼 만했다.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성국언과 함께 그를 찾았을 때 성형우의 AI가 이런 말을 했다.

[진족들과 계약을 할 때, 나는 계약에 틈을 만들었지. 그게 바로 죽음이다. 성형우가 살아 있는 순간만, 나의 혼이 그들에게 묶인다.]

성형우가 노린 계약의 빈틈은 죽음이었다.

성형우가 AI에 정보를 입력한 것도 전부 죽고 나서의 일이었다.

진족들은 설마 성형우가 죽고 나서 그런 짓을 하리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계약에 응했을 거다.

[혼을 묶는 계약은 나의 죽음으로서 끝났다. 죽은 후에 내주는 것은 육신뿐이다.]

성형우는 나와 성국언을 보며 씨익 웃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린 것 같았다.

[내가 죽은 후에 육신을 내주기로 했다만, 그들이 내 시신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죽은 내가 되찾아 줄 의무는 없다. 그러니 내 시신을 어찌하든 너희의 자유다.]

성형우는 죽은 후에 육신을 내주기로 했다.

그러나 죽은 성형우가 계약한 진족에게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할 의무는 없다.

시신을 이용해 무엇을 하고, 시신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할지는 계약한 진족들의 몫이다.

진족들도 계약할 때 죽은 성형우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므로, 죽음 이후에 관해서는 육신을 내주는 것으로 끝을 내기로 했다.

[그러니 시신을 되찾는다면 정보를 얻은 후에 부디 흔적을 남기지 말고 처리해 다오. 화장이든 뭐든 상관없다. 시신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선 안 된다.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부활을 시도해서도 안 된다. 내가 생을 다시 얻으면 혼을 묶는 계약 또한 부활할 수도 있다.]

성형우가 이런 AI를 남긴 건 정보를 남기고, 행여 자신을 부활시키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서였나 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성형우의 부활 건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성국언이 떠나기 전, 성형우는 자신의 손주에게 조언했다.

[너는 정치인이 되었으니 나 못지않게 위험한 계약을 할 순간이 오겠지. 그럴 때는 반드시 빈틈을 만들거라.]

―새겨듣겠습니다, 할아버지.

성국언은 믿음직스럽게 할아버지에게 답했다.

그 말이 씨가 된 건지 몰라도 성국언은 포모르 마족과 위험한 계약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형우의 조언대로 성국언은 계약에 빈틈을 만들었다.

“황호, 자네가 직접 시신을 회수해 여기까지 가져온 이유가 뭔가? 장례를 위해서인가?”

“그럴 리가. 그런 거라면 굳이 여기까지 가져올 이유가 없지.”

청룡의 의문을 황지호 대신 성국언이 풀어 줬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그자들의 말을 따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정보를 남기셨다고 합니다.”

“성형우의 숨겨진 유언이 있었나 보군.”

“비슷합니다.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성국언이 지하에 있는 AI에 관한 존재를 얼버무리며 말했다.

다행히 성국언의 저 말을 두고 의심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는 듯했다.

“그래서, 성형우는 무슨 정보를 남기려 했지?”

황지호의 질문에 성국언은 성형우에게 들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피부와 머리카락에 특별한 이능을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죽은 후 피부를 벗기고 머리카락을 밀어 버리지 않는 한, 그 기록이 남아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흑막은 성형우의 시신이 착용하고 있던 옷은 교체했지만, 피부와 머리카락까지 손대진 않은 듯했다.

머리카락은 그렇다 쳐도 피부에 이능을 새기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성형우의 집념이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성형우는 어느 정보를 남기고자 했다.

“피부와 머리카락을 분석하면 시신이 머물렀던 장소를 알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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