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68)
106. 혼 (6)
성형우는 자신의 죽음과 시신을 이용하기로 했지만, 강력한 이능은 남길 수 없었다.
강한 이능일수록 발각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신 주변에서 들렸던 대화를 전부 기록하는 등의 이능을 사용했다면 정보 수집에 엄청난 진척이 있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성형우는 이 점을 고려해 아슬아슬한 선에서 정보를 남길 방법을 찾았다.
“피부와 머리카락의 성질을 바꿔 머물었던 장소의 정보, 흔적을 흡수한 건가.”
“상당히 원시적이고 비효율적인 이능이네. 소모된 이능파나 시간에 비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적으니 아무도 안 쓰는 방법이야. 이거면 눈치채지 못했을 법해.”
청룡과 용제건은 바로 성형우가 사용한 이능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감탄했다.
용족 둘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성형우는 정말 신중하게 사용할 이능을 고른 듯하다.
황지호가 성국언에게 물었다.
“이 시신이 시간대별로 어디에 머물렀는지 알 수 있나?”
“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이능을 사용하셨으니, 정보가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성형우가 AI에 정보를 이식할 때에도 정보 손실이 발생했었다.
시신에 이능을 사용한 것과는 원리와 과정이 조금 다르겠지만, 둘 다 죽은 후에 이루어졌으니 마찬가지로 시신 쪽에 정보 손실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시신이 이용당할 걸 알고도 정보를 얻기 위해 둔 수야. 손실이 적었으면 좋겠는데…….’
저 시신에 남은 정보에는 성형우의 깊은 뜻이 남아 있고, 정보 자체도 상당히 유용하다.
만약 정보를 온전히 읽어 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적의 아지트, 이동 경로, 가든의 위치를 전부 파악할 수 있다.
시간대까지 알면 공범을 밝혀 낼 수도 있다.
그 시각, 그 장소에 머물렀던 이들을 추적하면 답이 나올 거다.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돕겠다.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용족도 돕겠다.”
황지호와 청룡 역시 그 중요성을 크게 느꼈는지 그렇게 덧붙였다.
성국언은 두 진족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정보 분석에 능한 분을 붙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승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안심하시겠군요.”
성형우가 부활을 단호히 거절하긴 했지만, 그의 혼이 현세의 일을 잊고 편히 쉬고 있진 않을 것 같았다.
이런 귀한 단서를 남겼는데, 누군가 찾아내 주길 믿고 기다리는 것밖에 답이 없는 상황 아닌가.
나라면 절대 편히 눈을 감지 못했을 거다.
플마고에서는 아무도 저 단서를 찾아내지 못한 채로 끝이 났다.
게다가 손주인 성국언과 그의 심복인 전무영은 죽기 직전에 성형우의 이능에 당하지 않았던가.
플마고에서 둘을 죽인 건 풍백과 우사지만, 성형우의 이능에 공격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성형우의 이능이 누군가를 공격할 일은 없어. 성형우가 남긴 단서도 전부 찾아냈지.’
부디 이번 일을 계기로 그의 혼이 편해지길 바랄 따름이다.
윤회의 굴레 파수꾼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성형우에 관해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가 윤회의 굴레를 지나갔는지, 그곳에 머물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좋겠다.
성형우라면 부활 가능성을 지워 버리기 위해 미련을 외면하고 윤회의 굴레를 빠르게 통과했을 것 같긴 하다.
“적호를 붙여 주겠다. 성형우를 숨기고, 정보를 분석하는 데에는 적호가 적격이겠지.”
“알겠습니다. 정보를 파악하는 대로 보고하겠습니다.”
성형우는 적호가 담당할 것 같다.
호족 내에서 적호가 정보 수집을 담당하고 있고, 적연으로 시신이 드러나지 않게 감출 수 있으니 적호가 적격일 것 같다.
당분간 적호가 성국언의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성국언이 한 눈으로 생활하는 동안 위험한 일이 많을 텐데, 적호가 있으면 그 위험이 크게 줄겠지. 다행이다.’
성국언과 성형우 건은 적호에게 맡기면 될 것 같다.
황지호는 곧바로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천동하가 탄래중 주변에서 자신이 본 것들을 전부 정리해서 보냈다. 확인하도록.”
황지호가 홀로그램화된 보고서를 넘겼다.
보고서는 감탄이 나올 만큼 일목요연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천동하에게 했던 탄래중 주변을 살펴 달라는 부탁은 그리 구체적이지 못하고 모호했는데, 그는 무엇을 관찰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보고서로 정리했다.
천동하는 ‘건곤(乾坤)을 품은 눈’으로 맹효돈이 전이에 휘말리기 직전의 상황과 그 후에 발생한 일들을 제대로 살폈다.
‘전이 직전에 발생한 이능파의 이상한 흐름, 청소년 예비 플레이어 지원 센터로 빨려 들어간 이능파, 맹효돈과 은사가 있던 한식당에서 발생한 전이, 그 후에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던 이들…….’
이 보고서를 읽으니 혼란스러웠던 탄래중 주변의 상황을 직접 본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천동하는 이번 사건을 일으킨 주범과 공범, 연루된 자로 추정되는 이들의 리스트도 작성했다.
호족들의 이능파를 흡수해 무력화시킨 후에 공격하려던 집단부터 청소년 예비 플레이어 지원 센터에서 묘한 장치를 사용한 이들, 한식당을 빠져나와 도망치듯 떠나던 직원들 등등이 그러했다.
“이 몸은 이 보고서를 사전에 확인했다. 홍규빈에게도 바로 넘겼지. 규정집행부가 플레이어 협회 규정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플레이어들은 그쪽에서 맡아 처리해 줄 거다.”
“협회 규정으로 처리할 수 없는 쓰레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그런 것들은 이쪽에서 맡을 예정이다. 향록과 큰 거래를 할 생각이니 이쪽에서도 재료를 준비해 둬야겠지.”
황지호와 적호의 대화에서 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녹족의 수장 향록은 겉보기엔 착하고 똑똑한 아이로 보였으나 만드는 영약은 조금도 착하지 않았다.
“향록이라면 녹족의 그 향록 말하는 겐가? 향록은 요새 바쁘다고 주문도 잘 안 받던데, 호족과는 거래를 잘 하는 모양이로군.”
“향록이 바쁜 건 사실이다. 네놈들도 이능독에 당할 뻔하지 않았나? 향록이 만든 해독약은 완전치 않으니, 아직 연구의 여지가 있다.”
용족도 향록과 거래한 적이 있나?
그야 향록이 유능하긴 하니까 용족 측에서도 주문을 넣고 싶을 거다.
후예의 건강을 생각해 영약을 만든다고 날뛰는 용족의 모습이 아주 쉽게 상상되었다.
“설령 그렇더라도 호족의 은인에게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어렵게 거래를 하고 있지.”
“그렇군. 우리도 용족의 은인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지원하겠다. 그 거래의 재료라는 게 부족하면 언제든지 말하게.”
“네놈들의 도움이 없어도 거래는 성사될 거다.”
황지호와 청룡의 대화에서 아주 불길한 미래가 예상되었지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요소가 개입된 미래를 두려워해 봤자 아무 소용 없지 않은가.
끔찍한 미래를 미리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하느니 도주로를 짜 두는 게 차라리 도움이 될 거다.
“보고서의 마지막 장을 보도록. 천동하가 개인적으로 의견을 덧붙였다. 명확한 증거는 없다지만, 확인해 주었으면 한다더군.”
천동하가 명확한 증거 없이 보고서를 작성한다는 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굳이 쓴 걸 보면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듯했다.
그 마지막 장에는 청소년 예비 플레이어 지원 센터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청소년 예비 플레이어 지원 센터는 유상희, 도원우, 오혜지, 주수혁…… 등의 많은 은광고 학생들이 다녔던 이능 센터와는 조금 다른 곳이었지.’
이 세계에는 어린 시절에 이능을 개화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이능 센터가 있다.
이능 센터는 미취학 아동,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플레이어 협회와 여러 이능 연구소가 지원하여 운영된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어질 만큼 이능 조절에 익숙해지면 이능 센터에서 수료증을 발급해 주고, 아이들은 센터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도록 이능 조절에 미숙한 아이도 있고, 중학생이 되어 이능을 개화한 아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곳이 청소년 예비 플레이어 지원 센터였다.
‘어느 쪽이든 센터에 다니는 건 강제되는 게 아니야. 한 번도 센터에 다니지 않고 은광고에 입학한 이들도 적지 않아.’
센터에 관한 정보를 떠올리고 있자니 영 좋은 예감이 들지 않았다.
황지호의 말을 들으니 그 예감이 점점 실체를 갖추었다.
“TC 연구소가 탄래중 주변에 있는 센터를 지원한 적이 있다더군. TC 연구소만 지원한 게 아니라 확신할 수 없지만, 어쩌면 이 이능파 이상 현상에 TC가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천동하는 TC 그룹과 연이 많으니 보고 들은 것이 많다.
누군가가 지나가면서 흘린 말, 메모, 일정 등을 종합해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결론 지은 것이다.
구체적인 증거가 없을 뿐, 둘이 연관된 건 거의 확실할 거다.
“주수혁은 곧바로 ‘황지호’의 디바이스로 어떤 정보에 관해 전했다. 이 또한 예의 그 센터와 연관되어 있었다. 맹효돈의 중학교 은사가 알아낸 내용이라고 했지.”
맹효돈의 중학교 은사는 탄래중의 학생이 겪은 이상 현상을 두고 의심을 품었다.
그래서 이능파 수치 측정 키트를 구매해 실험하여 어떤 가설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 센터를 방문한 후에는 항상 이능파 수치가 급격히 떨어졌다고? 맹효돈은 센터를 다니지 않았고, 또 탄래중 출신의 플레이어 수가 그렇게 적다니…….’
머릿속에서 체스 피스가 복잡히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탄래중 주변의 센터를 다닌 학생이 겪은 것.
TC 연구소의 개입 가능성.
이능 센터를 다닌 이가 겪은 어떤 상황.
이를 종합해 결론을 내렸다.
“TC 연구소는 이능파를 빼앗는 연구만 하진 않을 거예요.”
“무언가를 알아냈나 보군. 말해 봐라.”
알아냈다기보다는 아직 추측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들을 연관시키면 앞뒤가 맞았다.
황지호의 말에 대답했다.
“TC 연구소에서 아직 이능을 얻지 못한 플레이어를 빠르게 개화시킨 적이 있었어.”
내 말에 호족들과 용제건은 바로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챘다.
내가 말하는 플레이어는 바로 유상훈이었다.
유상훈은 이능을 제대로 개화하지 못했을 때에도 광림의 영향을 받아 주변의 충격을 멋대로 흡수하여 죽을 뻔했다.
유상희는 유상훈을 구하기 위해 TC 연구소에 도움을 청했고, 유상훈은 이능을 개화하여 살아남았다.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유상희는 강제로 실험에 협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축적한 이능파를 이용해 다른 이의 이능을 촉진시키는 연구도 했을 가능성이 있어.”
촉진시킨다는 말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나는 내 생각을 정리해 다시 말했다.
“적은 그저 이능파를 빼앗아간 게 아니라, 그걸 모아서 사용할 방법까지 고안했을 거야. 운사의 이능파를 그렇게 사용했던 것처럼, 수많은 사람의 이능파를 모아서 사용할 준비를 했을 수도 있어.”
흑막이 탄래중 근처에 있던 센터에만 손을 댔을 것 같진 않았다.
이능을 타고 태어나는 이들은 통계상 전 국민의 20%다.
그리고 17세가 될 때까지 이능을 유지하는 건 15%라고 한다.
흑막은 어쩌면 그 사라진 5%의 이능파에 손을 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