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69화 (869/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69)

106. 혼 (7)

“수많은 사람의 이능파라면 설마 성장 중에 이능을 잃는 5%를 가리키는 겁니까?”

적호가 경악과 의문이 서린 얼굴로 말했다.

나는 흑막이 하는 짓에서 곧바로 저 5%를 떠올렸지만, 이 세계에서 살았던 이들이 바로 저걸 생각하는 건 어려울 거다.

그동안 이 세계의 법칙이자 상식이라고 여겼던 사실이 알고 보니 흑막의 수였다니,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청룡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능파와 신체의 성장이 맞지 않아 사라지는 경우는 실제로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5%는 지나치게 많은 것 같군.”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는 의문이지만, 실체화되고 나니 짚이는 게 있나 보다.

저마다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긴 침묵 속에서 다들 눈을 번뜩였다.

“이계 충돌은 고작 100년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초기에는 제대로 된 통계를 낼 수 있지도 않았지. 이 세계의 법칙인 양 위장하기엔 충분하군.”

인간에게는 일생에 가깝지만, 진족들에게는 고작 100년이라고 표현할 만한 시간이다.

그러니 조작의 여지는 충분했다.

황지호의 말대로 이계 충돌이 일어난 초반에는 살아남은 플레이어보다 전사한 이들이 많아서 통계를 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혼란을 틈타 흑막이 통계를 조작할 준비를 하는 건 어렵지 않게 연상되었다.

황지호에 이어서 성국언이 말했다.

“국가에 따라 성장 후 이능을 상실하는 플레이어의 비율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보통 그 차이는 지력의 유무, 이계 출현 빈도 등을 이유로 꼽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양성, 관리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제대로 된 통계를 내지 못하는 나라도 많습니다.”

흑막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지만, 해외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권제인이 영국에서 겪은 맨체스터 대이계 사건의 뒤에 흑막이 있지 않았던가.

아마 흑막의 계획은 먼 옛날부터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었을 거다.

“이쪽에서 눈치챘다는 걸 흑막도 알 거예요. 곧 각국의 센터나 센터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던 곳들에 문제가 생기겠죠. 오늘 탄래중 주변이 그랬던 것처럼요.”

“바로 홍규빈에게 알렸다. 그자가 증거를 지우기 전에 협회에서 얼마나 빨리 대처할지 모르겠군.”

이런 대담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 철저하게 대책까지 세우고 있었을 거다.

이미 증거를 지우기 위해 흑막이 움직이고 있을 게 눈에 훤했다.

지금부터 센터에 관해 추적해 봤자 흑막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여태까지 축적한 힘으로 무엇을 할 건지 알아내는 건 불가능할 듯했다.

그러나 이번 건으로 인해 확실해진 게 있었다.

‘이로 인해 흑막의 존재를 세상이 알게 되겠지. 그리고 이능파를 축적하는 짓도 더 못할 거야.’

누군가가 오래전부터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게 드러날 것이다.

센터를 통해 벌였던 짓들도 더는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만큼 플레이어들의 수는 늘어날 것이다.

대중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흑막의 전력을 깎아 내는 데에 성공한 셈이다.

‘그동안 쌓았을 이능파의 양을 생각하면 좀 아찔하지만, 조금이라도 줄면 이쪽이 유리해지겠지.’

이어서 수습과 대책에 관해 논의했는데, 다들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흑막의 끔찍한 수에 다들 질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순순히 흑막에게 굽힐 만한 성품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전원 가라앉은 눈으로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회의가 끝난 후, 푹 쉬고 가라는 용족과 바로 돌아가겠다는 호족 사이에 불필요한 마찰이 발생했다.

듣고 있던 내가 한마디 했다.

“잠시 황룡을 만나고 싶은데요.”

“잘 생각했네. 황룡도 용족의 은인을 만나고 싶어 할 걸세.”

“의신아, 잠시 만날 필요 없어. 하루 내내 봐도 돼. 여기 네 이름으로 된 용궁이 얼마나 많은데.”

청룡과 용제건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잠깐만 이야기하고 갈 생각인데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황지호가 내 생각을 대변하듯 말했다.

“호족의 은인은 허언을 하지 않는다. 정말 잠시만 이야기할 생각일 거다.”

“황호의 말대로입니다. 시간이 아까우니 헛소리하지 마시고 황룡한테 안내나 하십쇼.”

호족과 용족이 뭐라 하고 있는 사이, 내 주변에서 둥둥 떠다니던 운룡에게 황룡의 위치를 물었다.

운룡은 기다렸다는 듯이 풀쩍 구름에서 뛰더니 앞장섰다.

나잇값 못 하는 저 어른들보다 작은 운룡이 훨씬 착하고 도움이 되었다.

운룡은 황룡궁의 중심, 황운호로 안내했다.

‘황룡은 저기에 있는 건가?’

운룡이 향하는 곳은 이동했을 때 보았던 새 누각이었다.

흑단으로 된 누각은 황운호의 경치에 잘 녹아 있었고, 별처럼 빛나는 진주가 곳곳에 박혀 아름다웠다.

누각에는 황룡이 있었는데, 황룡이 있어서 그런지 전에 봤을 때와 달리 은은한 황색 구름이 떠돌고 있었다.

그림 같은 광경에 이곳이 새삼 용궁이라는 걸 실감했다.

누각 가까이에 다가가자 황룡이 입구로 내려왔다.

무녀들과 이야기를 마친 건지, 황룡은 혼자였다.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알고 있었는데도 직접 가지 않아 미안하구나. 네게 이 누각을 구경시켜 주고 싶었단다. 이 누각은 어떻느냐?”

“멋진 누각이에요. 구경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느꼈다니 다행이구나. 이 누각은 용왕신께 허락받아 너를 위해 지었단다.”

나를 위해 지은 누각이라고?

대체 황룡이 뭔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저번에 저런 소리를 들은 듯했다.

청룡과 황룡은 궁의 주인을 바꾸는 절차가 까다롭다며 이상한 소리를 했다.

청룡궁에 내 이름을 딴 전각을, 황룡궁에 황운호가 잘 보이는 곳에 누각을 짓겠다는 게 그 헛소리의 내용이었다.

그냥 한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그 짓을 했나 보다.

나는 저 헛소리를 상대하는 대신 말을 바꾸기로 했다.

“……제가 찾아올 거라는 걸 아셨나요?”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바꾼 게 티가 나서 그런지 황룡이 입술을 조금 올려 웃었다.

떼를 쓰는 아이를 보는 것 같은 웃음이라 반응하기 어려웠다.

말을 못 하고 있자니 언제 따라온 건지 호랑이들이 끼어들어서 뭐라고 떠들었다.

“참 쓸데없는 걸 떠넘기는 건 어느 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걸 조의신을 위해 지어 봤자 득이 되는 게 뭐가 있습니까?”

“적호의 말대로다. 제법 잘 짓긴 했다만, 그뿐이지.”

황룡은 저 둘을 신경 쓰지 않고 할 말을 했다.

황룡만 보면 호랑이들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안 갔다.

“용궁이 이사한 걸 알았으니, 신경 쓰이는 게 많겠지. 너는 마음을 쓰는 대상이 많지 않더냐. 그래서 올 거라고 생각했단다. 궁금한 걸 묻도록 하거라.”

내가 물어볼 게 많다는 걸 알고 있었나 보다.

신경 쓰였던 것을 하나씩 묻기로 했다.

“현재 용왕신의 무녀가 넷인데, 이사는 힘들지 않았나요?”

“쉽지 않았지. 하나 제 몫 이상을 하는 무녀들이 있어 어렵지 않았다. 새 유황의 무녀…… 여랑이가 채운을 여럿 부릴 수 있다는 건 너도 알아챘을 거다.”

역시 내가 생각하는 대로였다.

윤여랑이 있어서 이사가 잘 된 거구나!

황룡은 이어서 내가 마음에 걸리던 점에 관해 바로 짚어 냈다.

“이사는 잘 마쳤다만, 우리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무녀의 자리를 계속 공석으로 둘 수는 없다. 네가 신경 쓰이는 건 후임에 관해서겠지?”

현재 용왕신의 무녀는 넷으로, 오간색이 모두 갖춰지지 않았다.

사흉이 모두 갖춰진 순간 강한 힘을 발휘한 것처럼 용왕신의 무녀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상황에서도 윤여랑은 큰 힘을 발휘했는데, 용왕신의 무녀가 다섯이 있다면 더 큰 힘을 쓸 수 있게 될 거다.

“생각하고 있는 후보가 있단다. 전전대 홍의 무녀지. 확인해 보니 그녀의 사퇴에는 배신한 무녀들이 개입해 있었다 하더구나.”

배신한 무녀들은 전전대 홍의 무녀를 회유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자 수작을 부려 자진 사퇴하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전전대 홍의 무녀는 용왕신을 따르고, 용족을 좋아했다.

전전대 홍의 무녀는 용궁 사건 당시 청룡의 비늘을 들고 와 위험을 알리기도 했다.

색이 바뀐다고 하지만 그 전전대 홍의 무녀가 복귀하는 건 나도 찬성하는 바였다.

“그 아이도 다시 무녀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고, 용왕신의 뜻 또한 그러하지. 하지만 그 아이의 몸과 정신 상태는 아직 온전치 않단다. 조금 더 쉬게 한 후에 무녀의 자리에 복귀했으면 하는구나.”

황룡은 현재 용왕신의 무녀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간단히 설명했다.

평소에는 윤여랑이 녹의 무녀 몫까지 채운을 부린다고 한다.

윤여랑은 힘든 티를 안 낸다고는 하지만, 가끔 방과 후 친구와의 일정이나 학교 행사 참가를 포기하고 무녀 일을 하러 올 때가 많다고 한다.

“여랑이 학교생활을 참 즐겁게 하던데, 마음껏 즐길 수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단다. 녹의 무녀가 정식으로 선정되면 그 아이의 부담을 덜어 줄 수 있겠지.”

금찬왕찬 패거리와 격돌 중인 1학년 0반의 어지러운 상황을 생각하면 무녀 쪽 일이 더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윤여랑의 뜻을 존중하고 싶으므로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리고 녹의 무녀가 공석인 걸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어서 질문했다.

“수정궁의 관리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수정궁도 함께 지상으로 가까이 옮겨 두었단다. 저번에 말한 ‘제안’에 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인가 보구나.”

“네.”

나는 황룡에게 조금만 더 수정궁의 관리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주오 그룹의 주수겸을 통해 오씨 그룹과 접촉할 때까지는 황룡의 도움이 필요했다.

“어떤 분을 통해 오씨 집안과 접촉했어요. 용궁이 이사했으니 일이 더 쉬워질 거예요.”

“용족의 은인에게는 늘 신세를 지는구나.”

황룡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티는 내고 있지 않았지만, 용궁의 이사와 수정궁의 관리까지 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을 거다.

이번 건이 잘 마무리되면 황룡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호족의 은인은 안 보이는 곳에서 또 용족을 위해 일을 했나 보군.”

“그렇게 은혜를 입은 주제에 용족은 또 조의신에게 뭘 시켰단 말입니까? 용족은 염치도 없습니까?”

“호족만 하겠어? 용족의 은인은 우리보다 호족을 위해 일한 게 더 많잖아.”

누각에 자리 잡아 운룡이 나르는 차를 마시는 한가한 진족들이 시끄럽게 굴었다.

황룡은 저 말들이 들리지 않은 것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허공에 선을 그었다.

그러자 홀로그램화된 디바이스 코드가 떠올랐다.

“내 디바이스 코드란다. 언제든지 연락해 다오.”

저 말을 들으니 용궁 깊숙한 곳에 있던 황룡이 진정 지상에 올라왔다는 게 실감 났다.

나는 기꺼이 디바이스 코드를 입력했다.

그 후로 호랑이와 용들이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어쨌든 갈 준비를 했다.

“조의신을 바래다주겠습니다.”

전무영이 말했다.

내 눈이 이렇게 됐으니 누가 보면 바로 들키지 않겠는가.

그 점을 생각해 전무영이 ‘그림자 없는 시간’을 써 주려고 제안한 것 같다.

“마중이 나왔으니 차 앞까지만 부탁하겠다. 적호, 너는 바로 성국언과 움직이도록.”

“괜찮겠습니까?”

“괜찮다. 차 안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군.”

“아, 그렇군요.”

차에 뭐가 있나?

그 의문은 바로 해결되었다.

황지호가 차 문을 열자 안에 있던 이가 나를 반겨 주었다.

“오셨어요?”

차 안에서 은호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나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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