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70화 (870/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70)

106. 혼 (8)

조의신을 호족의 차까지 바래다준 후, 성국언도 용궁을 빠져나갔다.

행선지는 황명은광병원이었다.

성국언은 병원에서 형식상 진료를 받고, 황호가 결계술을 사용한 안대를 착용하기로 했다.

그 후에 성국언은 한 눈을 쓰지 않고 모든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었다.

당장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기에 바빴지만, 성국언은 언뜻 보았던 어떤 이의 얼굴을 계속 떠올렸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의 신상 명세를 보고서에서 본 것 같군.”

“기억하시는 대로입니다. 천동하의 동생, 천은하입니다.”

성국언의 말에 전무영이 답했다.

조의신을 통해 천동하와 알게 된 후, 성국언은 그에 관해 간단히 조사했다.

조사한 결과에는 천동하의 가족 관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손이 귀한 천씨 집안의 사생아, 현재 은광고 1학년 수석이라는 천은하에 관해서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천은하를 두고 호족과 의신의 반응이 묘하군.’

아무리 협력 관계라 해도 용궁까지 마중 나오는 건 이상했다.

그리고 짧은 순간이었으나 호족들의 태도를 보았을 때, 그들은 상대를 동등한 존재로 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 조의신은 석화 상태 이상이라도 걸린 것처럼 딱딱히 굳었다.

마치 오랜만에 숙제를 안 한 모범생이 불시 단속에 걸려 교사의 추궁을 받을 때의 지을 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대는 호적상 조의신보다 더 어린데도 말이다.

‘천은하 학생은 호족에게 빚을 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판단한 것 같군.’

손가락 하나 꼼짝도 못 하는 처지였던 천은하는 황명 연구소에서 회복되었다고 한다.

천동하가 지극정성으로 동생을 살핀 결과라고는 하나 황명 그룹의 지원 또한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고려하면 의문이 많이 생겼다.

성국언은 생각을 정리해 적호에게 물었다.

“천은하 학생도 호족과 협력 관계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 학생은 감금 증후군을 겪다가 황명 연구소에서 극적으로 눈을 떴다고 들었습니다만, 호족과 관계가 있습니까?”

성국언과 호족은 협력을 하는 중이라고 하지만,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므로 적절히 선을 그어 주며 말했다.

원하는 만큼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고, 그냥 얼버무릴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적호는 성국언이 고민한 게 무색할 정도로 시원하게 답했다.

“천은하 말입니까? 자세한 출신이나 사정을 밝힐 수는 없지만, 정체에 관해서는 말해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천은하라는 이름을 쓰는 자는 우리와 동년배이지만 뻔뻔하게도 학생 신분을 쓰고 있는 호족입니다.”

그런 뻔뻔한 진족 중 하나가 현재 호족의 수장 아닌가?

대체 호족이 어떻게 TC 그룹의 사생아로 있는 건지 상상도 가지 않았지만, 깊은 속사정이 있다고 판단했다.

성국언이 여전히 진족에 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TC 그룹의 사생아를 처리하고 그 자리를 호족으로 대체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가설을 세웠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김신록과 조의신이 그런 짓을 하게 내버려 둘 것 같진 않았고, 호족이 굳이 그런 짓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충격적인 사실이었으나 성국언은 담담하게 답변했다.

전무영이 놀란 나머지 입을 조금 벌리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과 비교되었다.

적호는 별말 하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홀로그램을 전개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추후 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알아 둬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조의신의 행보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보고서와 녹음 자료입니다. 외우십시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적호는 황호가 작성하고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를 대뜸 넘겼다.

상세하게 기록한 탓에 분량이 적지 않았는데도 성국언은 군소리 없이 즉시 모든 자료를 검토하고 암기했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머리에 새겨 흠 잡힐 만한 부분을 남기지 않을 기세였다.

실제로 성국언은 수십 일간 이어진 국정감사에서 나온 모든 발언과 시간대를 완벽하게 기억해 발언의 모순을 지적한 적도 있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다.

성국언은 순식간에 자료의 마지막 부분을 확인했다.

“홍규빈 팀장님과도 대화를 나눴군요.”

말없이 암기에 몰두하던 성국언이 홍규빈의 이름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적호는 홍규빈이라는 이름을 듣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쪽은 가짜 성국언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 점을 고려해 대응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 팀장하고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하핫, 문제라니. 아닙니다. 그저 홍규빈 팀장님과는 공감대가 있어서 그렇죠.”

적호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 전, 성국언이 말했다.

“좋은 선생님께 신세를 졌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스승의 날이라 생각나는군요.”

성국언은 자연스럽게 김신록의 이야기를 유도해 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 좋은 선생님이 김신록을 가리킨다는 것을 바로 알아들은 적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들 자랑을 시작했다.

성국언과 전무영은 기쁜 마음으로 적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적호는 아들 자랑을 기쁘게 들어 주는 이들을 만나 신나게 이야기했다.

*    *    *

아마 호랑이 저택으로 향하는 중인 듯한 에어 리무진 안.

어떻게 자리에 앉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리무진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은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아 있었고, 황지호는 맞은 편에 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호랑이들에게 포위된 기분이 들었다.

‘오늘 은호는 천은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어쩐지 천은하 같지는 않아.’

평소에 은호가 천은하의 모습을 할 때는 어쩐지 진족보다는 인간에 가깝게 느껴졌다.

용제건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완벽한 위장을 해서 그런 듯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위장을 하지 않은 건지 그냥 호랑이 같았다.

“누가 혼내기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긴장 푸세요.”

그야 지금은 혼내고 있지 않지만, 나중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긴장을 풀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올 것 같은 예감에 더욱 신경 줄이 예민해졌다.

“운사 님을 구하기 위해서 하신 선택인데, 감히 저희가 어찌 혼을 내겠어요. 안 그래요, 황호 님?”

“은호의 말대로다.”

“오히려 사과를 해야 할 처지죠. 정말 죄송해요. 의신이 형이 다친 건 전부 저희 탓이에요.”

은호가 슬픈 표정으로 거듭 사과했다.

아무 잘못이 없는 은호가 저렇게 사과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차라리 혼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 조의신.”

황지호도 갑자기 사과했다.

은호에 이어서 저러니 그냥 내가 혼나는 걸 거드는 것처럼 보였다.

뭐라 하고 싶지만 표정을 보니 좀 침울하게 보이기도 해서 말이 안 나왔다.

그래도 계속 호랑이들이 사과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서 억지로 입을 열었다.

다치긴 했지만, 내가 다친 건 내 책임이고 눈은 시간을 들이면 재생될 것이니 그렇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사실에 기반해 설명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사과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보답해야겠네요. 눈 보여 주세요. 그쪽 눈 말고요.”

정신을 차려 보니 은호가 가까이 다가와 내 왼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방색의 눈이 은호의 눈동자에 반사되어 보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빤히 관찰했다.

시선이 따갑게 느껴져 눈을 깜빡이자 은호가 부드럽게 제지했다.

“눈 감지 마세요.”

언제까지 눈을 뜨고 있어야 하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은호의 눈이 은빛으로 일렁였다.

은호의 눈뿐만 아니라 머리카락도 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파아앗!

은호는 여전히 내 왼눈을 들여다보며 손을 움직였다.

대체 언제 꺼낸 건지, 은호의 손에는 아이템 카드가 여러 장 들려 있었다.

내가 사과 공격을 받아 멍해졌을 때 꺼내 든 게 아닐까?

아이템명은 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카드 테두리 색을 보았을 때 전부 SSR급 이상 희귀도의 아이템들인 건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은호가 단숨에 아이템 카드를 실체화했다.

그 순간 한쪽 눈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눈에 은빛 안개가 낀 것 같아.’

은호의 이능파가 왼눈의 표면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안구의 표면이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쉬이익!

은호는 여전히 시선을 왼눈에 고정한 채로 이능파를 운용했다.

은호의 손 위에서 실체화했던 아이템들이 녹고, 변형되고, 재구성되고 있었다.

보석으로 추정되는 아이템이 부수어져 다듬어지기도 하고, 귀한 약재로 보이는 것이 녹아서 보석 결정에 스며들기도 했다.

그 정교한 과정은 모두 은빛 이능파 속에서 이루어졌기에 마치 은호의 손 위에서 작은 규모의 은색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은호의 손 위에서 눈보라가 가라앉자 결과물이 보였다.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유리알 같았다.

‘아니, 유리알이 아니라 저건 렌즈 같은데…….’

상당히 집중하고, 큰 힘을 소모한 탓인지 은호가 숨을 몰아쉬었다.

은호는 숨을 가다듬자마자 황지호에게 말했다.

“황호 님, 부탁드립니다.”

“알았다.”

파아앗!

황지호의 눈과 머리카락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황지호는 그 상태로 방대한 이능파를 가는 줄기로 응축해 렌즈 위에 무언가를 새겼다.

오늘 가장 많은 곳에서 활약했을 텐데도 저만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니, 지력이라도 끌어다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황지호가 렌즈에 결계를 새기고 난 후, 굉장한 힘이 느껴졌던 렌즈가 평범하게 보였다.

결계술로 렌즈의 힘을 감춘 듯했다.

은호가 완성된 렌즈를 두고 말했다.

“치료를 마칠 때까지 이 렌즈로 왼눈을 보호하고, 가려 주세요. 이런 것밖에 할 수 없어서 죄송해요.”

척 봐도 막대한 가치의 아이템을 소모하고, 호족의 전 수장과 현 수장이 큰 힘을 써서 만든 아이템이라 받기 어려웠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이 눈을 감추기 위해 생각한 수가 몇 개 있었으나 저 렌즈를 안 받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렇게 미안해하다가 준 건데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감사의 인사를 입에 담았다.

“……고마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 잘못이니까요. 제가 넣어 드릴게요. 불편한 곳이 있으면 바로 말해 주세요.”

은호는 정중하게 손을 뻗어 눈에 렌즈를 넣어 주었다.

렌즈가 각막에 닿았으나 눈 쪽에는 어떤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왼눈이 한층 더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렌즈를 착용한 후, 은호에게 몇 가지 더 질문을 받았다.

눈을 깜빡일 때, 빛을 응시할 때, 이능파를 사용할 때 어떤 감각이 느껴지는지 하나하나 물었다.

긍정적인 답변을 할수록 은호와 황지호의 표정이 밝아져 덩달아 나도 안심이 되었다.

“그럼 이제 집에 가서 쉬죠.”

“조의신, 오늘은 본채에 들르지 않아도 된다. 바로 별채에서 쉬도록.”

기숙사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도 못했다.

방금 호랑이들이 손수 만든 선물도 받았는데, 그냥 가겠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좋은 소식이 있다.”

호랑이 저택에 도착했을 즈음, 황지호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분신으로부터 어떤 정보를 입수한 모양이다.

“운사는 시간을 들이면 곧 회복될 것 같다는군. 풍백과 우사와 다르게 말이다.”

어쩌면 운사 또한 풍백과 우사처럼 오래도록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운사는 그들과 달리 곧 눈을 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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