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71)
107. 선발 (1)
운사가 눈을 뜨면 어떤 말을 할지,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도착했다.
은호가 머무는 별채 앞에 가니 백호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호군은 도착하자마자 앞장서서 말했다.
“안내하겠다.”
이미 별채 구조는 잘 알고 있으니 굳이 안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모처럼 백호군이 제안했는데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어 순순히 뒤를 따랐다.
거실이나 응접실로 향할 것이라는 내 예상은 빗나갔다.
백호군은 평소에 내가 자주 머물던 게스트 룸으로 향했다.
왜 굳이 안내를 한 걸까?
“이제 쉬어도 된다.”
쉬라고?
그러고 보니 다른 호랑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황지호와 은호도 쉬러 간 걸까?
마지막으로 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좀 어려워졌다.
기껏 안내해 준 백호군을 내버려 두고 다른 호랑이들을 찾으러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쉬고 난 후에 대화해도 늦지 않는다.”
황지호, 은호도 그렇고 호랑이들은 내 생각을 잘 읽는 것 같다.
뭔가 더 생각해 보려 했지만, 쉬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피로가 느껴졌다.
다소 몽롱한 정신으로 쉴 준비를 하는데, 백호군이 여전히 문가에 서 있었다.
“…….”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다른 호랑이처럼 사과할 생각인가?
다치지 않고 운사를 찾아낼 방법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해서 이 사달이 났다.
오늘 호랑이들로부터 사과를 많이 들었는데, 그만했으면 좋겠다.
“……운사를 구해 줘서 고맙다.”
다행히 사과가 아니었다.
감사의 말도 낯간지러웠지만 사과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백호군은 친우가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은광구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는데,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어떤 마음으로 운사를 기다렸을지 상상도 안 가는데 백호군이 사과까지 하면 내 마음이 더 안 좋아졌을 거다.
“…….”
잠들기 직전, 문밖에서 희미하게 기척이 느껴졌다.
작은 발소리가 섞인 걸 보니 백호군과 올무가 주변에 있는 것 같았다.
올무에게 들어와도 괜찮다, 같이 쉬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금세 꿈 없이 잠에 빠졌다.
* * *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여전히 몸이 무거웠다.
‘조금 일찍 일어난 건가?’
꽤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은데, 아직 피로가 덜 풀린 걸 보니 일찍 일어난 것 같았다.
제일 먼저 왼눈을 확인했다.
렌즈를 착용한 채로 잠들었는데도 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전보다 눈 주변이 상쾌해진 기분이 들 정도였다.
‘호랑이들은 아침잠이 없으니까 지금 일어나도 누군가는 일어나 있겠지. 지금 몇 시지? 어……?’
시계는 내가 예상한 것과는 많이 다른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설마 새벽에 일어난 걸까 싶었지만, 점심 먹을 시각이 좀 지난 오후인 게 확실했다.
시간을 보니 몸에 남아 있던 피로가 놀라 달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난리가 났을 텐데 이렇게 오래 자다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후, 디바이스로 주요 언론사의 뉴스를 확인했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사진, 영상의 섬네일이 전부 성국언의 얼굴로 가득했다.
성국언은 평소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원하고 여유 넘치는 미소 대신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한 눈은 의료용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저 가려진 눈을 보니 죄책감이 치솟아 올랐다.
‘다치는 순간에는 성국언의 모습을 안 하는 게 나았을까? 아니, 그렇게 하면 계획이 어그러졌어. 처음부터 다른 수를 뒀어야 해.’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끌어 나가야 할 성국언의 눈이 저렇게 가려지다니!
자고 난 덕에 맑아진 머리로 열심히 생각해 봤지만, 어떻게 설득해도 성국언이 한 번 뱉은 말을 어길 것 같진 않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빨리 낫는 것 정도였다.
가장 조회수가 높은 영상을 확인하자 성국언의 암살 미수 건과 청소년 예비 플레이어 지원 센터 폭발 사건 등이 엮인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국언의 납치 과정으로 추정되는 저화질의 은광구 주변 기록 기기 영상, 이를 토대로 재현한 3D 영상, 성국언이 전이된 탄래중 주변에 위치한 가든의 잔해를 찍은 영상 등이 이어졌다.
‘뉴스에 맹효돈이나 다른 이들이 안 보여.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 성국언에게 맞춰져 있어. 억지로 맹효돈의 존재를 지웠다기보다는, 불필요한 부분이라 판단되어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는 느낌이야. 굉장히 교묘해.’
뉴스를 볼수록 감탄이 나왔다.
나중에 성국언이 있었던 가든에 누가 더 끌려 왔었다는 게 밝혀진다고 해도 책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성국언은 인터뷰 중에 누군가와 공투했음을 암시하는 말을 섞기도 했다.
하지만 댓글 반응도 그렇고, 다들 그게 비서 겸 경호원인 전무영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작년에는 그리 큰 주목을 받지 않았던 탄래중 주변 학교 비리 뉴스가 다시 끌어 올려지면서 자연스럽게 앞뒤가 맞게 됐어.’
작년에 성국언이 내 민원을 바탕으로 비리를 저지른 학교를 찾아내 고발한 적이 있었다.
뉴스거리가 되긴 했지만, 당시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비리 관련 뉴스는 매일같이 쏟아지니 금방 묻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하나 학생들이 다니던 센터가 폭발했고, 성국언이 안대를 해야 할 정도로 크게 다쳤다.
이런 자극적인 요소와 엮이자 작년의 비리 사건도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성국언은 평소에 큰 부상을 입어도 티를 내지 않아. 석고 붕대를 했을 때에는 일부러 언론을 피해 다녔지. 그런 성국언이 안대를 하고 나타났으니, 다들 큰 사건이라 생각할 거야.’
인터뷰 중 성국언은 범인에 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고 언급했다.
대신 납치된 가든에서 목격한 것과 그 위치를 언급하며 작년에 자신이 조사한 비리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했다.
성국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인터뷰를 끝마쳤다.
[……현재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에서는 각 센터에 대한 전수 점검을 진행 중입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총본부에서도 빠르게 움직여 이에 대응해야 합니다.]
성국언이 한 이 발언의 파급력은 생각보다 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국가에서 자연 이능파 방출 사건, 폭발 사건이 다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건이 일어난 곳은 청소년 예비 플레이어 지원 센터와 이름은 다르지만,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이었다.
그 덕에 성국언의 암살 미수 사건은 국내외로 크게 퍼지고, 화제가 되었다.
‘홍규빈도 고생했겠네. 디바이스 메시지로 우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까?’
혹시나 해서 디바이스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그런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홍규빈은 내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홍규빈] 의신아, 성국언 의원과 직접 이야기했다. 그쪽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홍규빈] 푹 쉬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바로 연락해.
정말로 홍규빈은 성국언의 모습을 했던 게 나라는 걸 알아봤구나.
들킨 건 어쩔 수 없으니 일이나 실컷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내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일하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충 난 괜찮으니 수고하라는 답변을 보냈다.
그 외에도 메시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주수혁] 의신아, 몸은 괜찮아?
[맹효돈] 부반장 괜찮냐
[주수혁] 지호한테서 네가 적절한 처치를 받았다고 들었어. 정말 다행이다.
[주수혁] 푹 쉬어. 학교에서 보자.
주수혁과 맹효돈이 있는 단체 메시지 방을 보니 미안해졌다.
메시지 수신 시간을 보니 황지호의 답변을 들을 때까지 좀 시간이 걸린 듯했다.
황지호가 좀 빨리 답변했거나 그냥 내가 먼저 확인하고 안심시켜 줬으면 좋을 텐데, 어제 정신이 없어서 그만 둘을 소홀하게 대했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는 답장을 적어서 보냈을 때였다.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톡톡.
어쩐지 일반적인 노크 소리에 비해 작고 낮게 들렸다.
누가 어떻게 두드린 건지 상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렇게 귀엽고 소중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생물은 이 호랑이 저택에 하나밖에 없었다.
“올무야?”
툭.
내 예상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어서 작은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올무가 나를 깨우러 왔다가 그냥 가는 것 같았다!
허둥지둥 그 발소리를 따라 문을 열었다.
‘천사가 그냥 가 버렸어…….’
복도 저편에 올무의 꼬리가 보였다가 없어졌다.
하얀 꼬리의 잔상이 눈에 어른거렸다.
왜 올무는 그냥 간 걸까?
누가 올무에게 나를 깨우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올무는 내가 꼴도 보기 싫어서 가 버린 걸까?
안 좋은 상상이 마구마구 솟아올랐다.
망연자실해 있자니 문 주변에 서 있던 백호군이 말했다.
“올무는 밤새 네 걱정을 했다.”
천사가 밤새도록 걱정했다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잠이나 잔 건가.
이렇게 낯 두꺼운 짓을 하다니, 나는 부끄러움도 없나 보다.
“밖에서 기다리겠다.”
백호군의 말을 듣고 나간 넋을 붙잡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다 일어난 차림으로 올무를 또 실망시킬 수는 없어 비척비척 게스트 룸으로 돌아가 몸단장을 했다.
게스트 룸에 마련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올무의 모습이 없었다.
마치 방금 꼬리를 본 게 신기루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천사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까.
빨리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천사의 모습을 확인도 못 한 채로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일어나셨어요? 안색이 훨씬 좋아지셨어요.”
“푹 잔 것 같군. 앉아서 차를 들도록.”
거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던 은호와 황지호가 나더러 앉도록 권했다.
둘은 어제 보였던 모습과 달리 비교적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불길한 예감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도망갈 틈을 찾지 못하고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게 되었다.
오늘의 차는 감나무 잎을 우린 감잎차로, 피로 회복과 피부, 눈에 좋은 차였다.
“괜찮아 보이지만, 렌즈 상태를 확인해 볼게요. 또, 간단히 맥을 짚고 체온을 확인할 거예요.”
“괜찮은데, 왜…….”
“중요한 거래에 필요해서요.”
차를 마시기 전, 은호가 손을 뻗어 맥을 짚었다.
중요한 거래가 뭐길래 내 맥과 체온을 알아야 한다는 말인가.
갑자기 황지호와 적호가 대화 중에 향록과 큰 거래 운운한 게 떠올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거래 결과로 어떤 불행이 닥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을 때, 찻잔을 놓고 이쪽을 보던 황지호가 말했다.
“당장 다음 주가 문제군. 어서 네 눈을 낫게 해야 하는데, 그때까지는 어렵다고 한다.”
“다음 주가 왜?”
다음 주에 무슨 일이 있는지 떠올려 봤지만, 딱히 걸리는 일정은 없었다.
고쳐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용족과 무녀들을 독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으나 황지호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다음 주부터 한중일 청소년 교류전에 출전할 학생들을 선발한다. 은광고의 대표로 네가 빠질 수 없으니, 큰일이지.”
여름 방학에는 한중일 청소년 교류전이 열리고, 그 전에 대표를 선발한다.
어느덧 대표 선발이 가까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