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73)
107. 선발 (3)
평소에 말이 없던 놈인가 싶을 정도로 유상훈은 이런저런 소리를 늘어놓았다.
장남욱과 친하게 지내는 바람에 길게 말하는 버릇이 옮은 걸까?
유상훈은 그놈의 갓겜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캐릭터 처음 만들 때, 광림이랑 스킬이 랜덤으로 부여돼. 원할 때까지 리셋할 수 있어. 아, 스킬은 게임 하면서 바꾸거나 또 얻을 수도 있다. 그런데 광림에 중복은 없고, 한 번 정하면 바꿀 수 없어. 좋은 광림 선점하려면 빨리 시작해야 해.”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유상훈은 주 무기로 방패를 택할 예정이라고 한다.
트레일러에서 ‘방패병’이라고 불리었는데, 아마 그 콘셉트를 계속 유지할 듯하다.
광림은 다르다고는 하는데, 방패를 들었다고 하니 크리스마스이브 때의 일이 생각나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광림을 고를 거면 ‘복수하는 바람’ 같은 정신 나간 내용과는 다른 걸 고르길 바랄 뿐이었다.
나는 성의 없는 목소리로 유상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잘 만든 게임인가 보네.”
“엄청 잘 만들었어. 게임 자체도 퀄리티가 높고, OBT 기간 동안 유저들이 건의했던 부분도 반영되고 있어서 더 좋아지고 있어.”
그건 말 안 해도 안다.
오래전부터, 정확히는 플마고에서 저 갓겜 얘기가 나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PlayerZ가 플마고 같은 개망겜과 달리 아주 잘 만들고 잘 운영되는 갓겜인 거 잘 알고 있다…….
갓겜은 그저 잘 만들어진 게임을 칭하는 게 아니라 운영, 추가 콘텐츠 관리, 업데이트, 유저 의견 반영 등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PlayerZ은 이를 완벽에 가깝게 해낼 것이다.
저 갓겜의 존재가 참 부럽고 씁쓸하게 느껴졌다.
“장남욱은 시험공부 시작 전까지만 한대. 할 거면 같은 서버에서 하자.”
“장남욱이?”
“어. 나 말고도 사관학교 애들도 한다니까 한번 해 보고 싶대.”
장남욱은 PlayerZ에 관심이 생겼다기보다는 유상훈과 사관학교 생도들이 걱정돼서 같이 하겠다는 것 같다.
게임을 안 해 본 사람이 훈수를 두는 것보다 같이 게임 한 이들이 하는 조언이 더 와닿을 걸 장남욱도 알 것이다.
‘장남욱은 다른 애들보다 유상훈을 제일 걱정하겠지. 심각하게 빠져 있으니까.’
좀 걱정되긴 하지만, 해 보고 싶은 걸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수능이 끝난 후에 플마고를 시작했지만, 만약 조금 일찍 출시되었어도 학업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했을 거다.
유상훈이 신나게 게임을 소개하면서 같이 하고 싶어 하는 걸 보니 점점 부러움과 걱정보다는 함께 놀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그래, 생각해 볼게.”
“할 거면 바로 메시지 보내라.”
유상훈은 내 대답에 만족한 후, 본인의 반으로 돌아갔다.
왜 우리 반 근처 복도에서 얼쩡거리나 싶었는데, 그냥 돌아다니던 게 아니라 나한테 게임 권유를 하려고 기다렸나 보다.
‘저렇게까지 같이 하고 싶어 하는데 한 번쯤은 같이 해 보는 것도 좋겠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유상훈네 집에 모여서 게임을 했던 것, 유상훈과 가끔 농구를 했던 것 등이 생각났다.
그때도 즐거웠으니까 저 갓겜을 같이 하는 것도 재밌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유상훈을 말릴 마음은 점차 옅어졌다.
하지만 유상훈과 다르게 말리고 싶은 아이들이 있었다.
“그럼 주말에 직관 가는 거야?”
“네! 다행히 아직 외야석은 매진이 안 돼서요, 가고 싶은 분들은 다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TC 나이츠가 홈이라고 했지. 홈 팀은 어느 쪽에서 응원해야지? 외야도 전광판 기준으로 갈리지 않아?”
“잠실 구장의 경우, 홈 팀은 1루 베이스 쪽의 더그아웃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교실에 들어가니 반 아이들이 모여 야구 직관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들이 응원하고자 하는 팀은 무려 희대의 망팀, TC 나이츠였다.
어린이날, 봄 소풍 때 잠실에서 TC 나이츠가 보여 준 경기력 덕에 관심이 생긴 아이들이 있는 듯했다.
‘그 팀만은 안 되는데……!’
우리 학교에는 작년, 강력한 예언가 우기환이 있었다.
어느 정도로 우기환의 예언 능력이 뛰어났냐면, 본인이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차석만 할 것이란 걸 맞췄다.
그리고 우기환은 TC 나이츠에 관해서도 예언을 했다.
몇 년간 계속 꼴찌를 할 것이라고.
‘TC 나이츠는 또 꼴찌를 할 것 같아. 몇 년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작년 경기력을 생각하면 기대가 안 돼.’
TC 나이츠의 처절하게 망한 야구를 보며 절규하던 옥토연이 떠올랐다.
그게 우리 반 아이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TC 나이츠는 현재 리그 상위권의 성적을 거두고 있지만, 더워질 때쯤 본 실력이 들어나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다.
‘기왕이면 TC 나이츠와 마찬가지로 서울에 연고가 있고, 우승 후보인 주오 드래곤즈를 응원하면 좋을 텐데…….’
주오 드래곤즈 팬 장남욱은 팀이 만년 2등을 하는 바람에 고통받긴 하지만, 그래도 가을 야구를 할 때까지는 행복하지 않은가.
장남욱에게 반 애들이 야구에 관심이 생겼으니 영업 좀 하라고 부탁하면 어떨까?
장남욱이라면 몹시 기뻐하며 철저한 계획을 세워서 주오 드래곤즈 영업을 해 줄 것 같다.
반 아이들이 힘든 길을 가지 않도록 수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할 말이 있소.”
심각하게 수를 고민하고 있자니 진정묵이 말을 걸었다.
말을 걸었다고는 하지만 진정묵은 교실 구석에서 눈에 띄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발언했다.
오늘의 콘셉트는 무림인이 아니라 자객인 걸까?
‘평소에 말수가 적던 무림인이 저러는 걸 보니 뭐가 있나 보네.’
나는 순순히 진정묵의 콘셉트에 맞춰 주기로 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기척을 죽여 진정묵을 따라 교실 밖으로 이동했다.
진정묵은 2학년 구역에서 가장 빛이 들지 않는 산책로 구석으로 향했다.
은광고가 전체적으로 볕이 잘 드는 편인데 대체 이런 곳은 어떻게 찾았는지 모르겠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진정묵은 주변을 살펴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후 말했다.
진정묵은 조금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무슨 일 있었소?”
“왜?”
“이능파 상태는 정상이지만, 긴 싸움을 마친 강호인의 기운이 느껴지오.”
대체 저 무림인이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괜찮다고 둘러대니 진정묵이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몸 상태도 신경 쓰이지만,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반도로 온 신흥 마교도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소. 행여 그들과 싸운 건 아닌가 생각했소. 무명의 초신성 소협 또한 마교와 싸우는 자 아니오?”
진정묵의 말을 해석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한반도로 온 신흥 마교란 포모르 마족을 가리키는 말일 거다.
그런데 포모르 마족은 아바리티아나 인비디우스 같은 마신을 섬기지는 않으니 마교라 취급하는 건 좀 모호하지 않나?
절흑풍림은 인류를 위협하는 모든 마족을 마를 섬기는 마교도로서 적대하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긴 할 거다.
포모르 마족은 도품인 이무기의 귀천을 경매에 내놓았고, 경매에서 벌인 짓 때문에 구슬비와 옹길동이 다칠 뻔하기도 했으니까.
‘나를 마교와 싸우는 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에 한 대화 때문이겠지.’
진정묵을 등교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옹길동, 구슬비와 함께 발로르의 눈과 마주쳤던 일화를 말한 적이 있다.
해석을 마친 후, 진정묵에게 말했다.
“포모르 마족을 말하는 거구나. 그쪽에 문제가 있다면 절흑풍림 쪽에서 먼저 파악할 것 같은데.”
“……그건 그렇소. 사부께서는 이미 마교도의 움직임을 파악하셨소.”
진정묵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절흑풍림이 포모르 마족의 묘한 움직임을 파악하고도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게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스승의 날 사건을 앞두고 미리 절흑풍림과 접촉해 이번 계획에 관해 논의했기 때문이다.
‘성국언과 포모르 마족의 계약을 두고 절흑풍림이 개입할 가능성이 있었지. 그걸 사전에 막기 위해선 이야기해 둘 필요가 있었어.’
절흑풍림은 포모르 마족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자세한 사정을 모른 채로 계약 건을 알게 되면 절흑풍림 측에서 성국언을 규탄할 것이다.
상대가 국회의원이든, 명망이 있는 플레이어든 마교와 연관되어 있다면 절흑풍림은 전력을 다해 싸우려 할 게 뻔했다.
그래서 속사정을 밝혀 둘 필요가 있었다.
‘포모르 마족은 현 목적은 다누 신족의 대관석 파괴인 점, 성국언이 한 계약이 인류의 안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 등등을 설명하느라 꽤 힘들었지.’
성국언의 계약에 관해 숨은 비밀을 절흑풍림 측에 밝혔지만 이는 현재 극비로, 아는 건 흑림의 검성과 그곳의 서브 팀 마스터 둘뿐이다.
진정묵은 성국언의 계약에 관한 비밀은 모르지만, 포모르 마족이 주말 사이 은광구에서 움직였다는 건 알아차린 듯하다.
진정묵은 설마 주말 동안 아무도 시키지 않은 순찰이라도 돈 것일까.
‘진정묵을 내버려 뒀다간 혼자 조사하겠다고 움직일 수도 있어.’
진정묵의 무위를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걱정이 되었다.
괜히 흑막의 눈에 찍혀 저쪽에서 수를 쓸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우선 진정묵이 납득할 만한 말을 하기로 했다.
“흑림의 검성께서는 생각이 있을 거야. 게다가 지금은 큰 사건이 터진 직후잖아. 센터 건에 마족이 개입해 있다면 절흑풍림이 나서도 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혼란만 줄 수도 있어. 지금 일어난 사건이 마족과 연관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일 거야.”
진정묵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진정묵이 다소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소생이 세간 사정에 어두워 생각을 깊이 하지 못했소. 가르침을 주어 감사드리오.”
진정묵은 이번 사건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에 또 마족과 연관된 일이 발생하면 반드시 나설 것 같다.
마계 시나리오에는 진정묵이 빠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때는 마족이 대놓고 나설 테니 절흑풍림 무림인이 다 나서서 설득해도 진정묵은 전장에 뛰어들 것이다.
‘이번에 맹효돈도 그렇고, 우리 반 애들이 점점 흑막과의 대결에 휘말리는 것 같아.’
맹효돈과 진정묵만 엮인 게 아니다.
이미 김유리는 호족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광림 때문에 사월세음도 노려지고 있다.
흑막이 위성을 노린다면 송대석 또한 그 대상이 될 거고, 그 외 다른 아이들도 얼마든지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옹길동은 원래 2학년 때 사망하는데, 성국언 암살 사건이 없어졌으니 괜찮지 않을까?’
플마고에서 성국언은 죽기 전에 단서를 남긴다.
그 단서를 얻는 게 옹길동이었다.
괴도를 자칭하며 이곳저곳 흑막과 관련된 것들을 들쑤시고 다니던 옹길동은 성국언이 남긴 단서를 얻는다.
전개는 달라졌지만, 옹길동은 감이 좋으니 이미 흑막의 존재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지금 옹길동은 흑막이 아니라 등교 거부자를 따라다니고 있지. 그쪽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그 등교 거부자가 악몽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긴 하다.
진정묵과 헤어진 후에 산책로를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여기서 뭐 하냐?”
말을 건 인물은 맹효돈이었다.
맹효돈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의신아, 찾고 있었어.”
천리안을 사용하고 있었는지, 주수혁의 눈에 이능파의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주수혁의 옆엔 안다인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