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77)
107. 선발 (7)
해가 졌을 무렵, 별채에는 넷이 남았다.
향록은 신화시대에 있던 일보다는 큰 거래 결과 얻은 실험 재료를 써 볼 생각에 들떠 있었다.
‘제시간에 영약을 챙겨 먹어!’라는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향록이 떠나고, 안다인은 부모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그 결과, 황지호, 백호군, 나 그리고 운사가 남았다.
‘자리를 비우는 게 나을까? 아니, 신화시대와 흑막이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커. 그 시절 호족과 관련이 없는 제삼자로서 이야기를 듣고 단서를 모을 필요가 있어.’
그래도 마지막까지 망설였지만, 그 전에 황지호가 말했다.
“왔군.”
별채에 호랑이가 둘 더 왔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운사가 있는 이 방에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현재 별채의 이 방은 운사의 보호를 목적으로 견고한 결계가 전개되어 있는 상태였다.
결계를 작성한 황지호를 제외하면 외부의 기척을 느끼기 어려웠다.
황지호가 운사에게 설명했다.
“적호를 불렀다. 바로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다.”
사실 적호 외에도 호랑이가 하나 더 있었지만, 황지호는 이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적호는 성국언의 보조 임무를 잠시 김신록에게 맡긴 후 은광고에 들렀다.
그리고 기숙사에서부터 적연을 써서 은호와 함께 호랑이 저택으로 왔다.
하지만 은호는 운사 앞에 바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음을 밝혔다.
‘만약을 대비해 은호가 깨어난 건 알리지 않겠다고 했지.’
풍백과 우사가 그런 선택을 했으니 운사를 경계하는 건 어쩔 수 없을 거다.
향록과 안다인이 별채를 나설 때였다.
운사의 곁에 백호군을 남겨 두고 나와 황지호는 둘을 배웅하기 위해 방 밖으로 잠시 나왔다.
그 자리에서 황지호가 분신을 통해 적호와 은호에게 운사가 깨어난 소식을 전했음을 밝혔다.
적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운사를 만나야겠다며 기뻐했지만, 문제는 은호 쪽이었다.
은호는 운사가 깨어난 후 무슨 말을 했는지 자세히 확인한 후, 이렇게 말했다.
―여전히 운사 님이 풍백과 우사를 친우라고 불렀다 하셨나요?
운사는 풍백과 우사의 배신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성국언의 리플레이 속에서 그 둘은 운사의 화로를 직접 다루는 모습을 보였다.
정황상 도철보다 훨씬 능숙하게 화로를 다루었던 것 같은데, 그 솜씨를 보아 과거에 직접 운사로부터 힘을 짜낸 적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운사는 저들을 친우로 칭했다.
그 점을 재차 확인한 은호가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자칫하다간 적에게 제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으니까요.
―운사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알고도 의심하는 건가?
황지호가 그렇게 물었지만, 은호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자가 운사 님께 심어 둔 게 사기뿐일 거라는 보장이 없어요. 사상이나 믿음을 심어 마음을 변하게 할 수도 있겠죠. 풍백과 우사는 빠르게 변절했으나 운사 님은 조금 느리게 마음을 바꿀지도 모릅니다.
황지호는 은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같은 호족 수장 출신이긴 하나 황지호와 은호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황지호는 운사를 바로 친우로서 대했지만, 은호는 그러지 않았다.
어느 쪽이 더 수장다운 선택을 했냐고 누가 나한테 묻는다면 나는 은호를 택할 거다.
차가운 소리긴 하지만, 호족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은호처럼 구는 게 현명했다.
그렇긴 해도 은호가 정이 없어 보이진 않았다.
‘은호가 저렇게 말해도 풍백과 우사와 달리 운사에게는 꼬박꼬박 존칭을 사용하는 걸 보니 신뢰할 여지를 남기고 있는 것 같아.’
은호가 굳이 이 자리에 온 것부터 그랬다.
만약 운사를 철저히 의심하고 있었다면, 은호는 정보의 누출을 경계하여 이 자리에 오는 것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운사의 말을 멀리서 전달받는 편이 훨씬 안전하지 않은가.
은호가 깨어났다는 걸 감추고 있는 데다가 천은하라는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으니 정말 경계한다면 오지 말았어야 한다.
하지만 은호는 운사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호랑이 저택에 왔다.
‘직접 말을 들어 본 후에 결백하다고 판단한다면, 바로 운사의 얼굴을 보기 위해 여기에 온 거겠지.’
은호가 깊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큰 고민 없이 반가움을 표하는 이도 있었다.
적호가 그랬다.
“운사, 저 왔습니다! 누워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백호가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있는 건 아닙니까?”
적호는 방문을 열자마자 운사를 향해 직진했다.
적호가 운사를 부축하고 있는 백호군을 보며 툴툴거렸는데, 저건 죄를 지었으니 누워 있을 수 없다며 버티는 운사 탓이었다.
말이 없는 백호군 대신 항변해 주고 싶었으나 호랑이들이 재회하는 순간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기에 지켜보기로 했다.
적호를 본 운사가 눈을 크게 뜨며 반겼다.
“적호…….”
“깨어날 때 옆에 있어야 했는데, 잡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은광구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한가한 백호와 늘 저택에서 노는 분신을 남기는 황호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적호가 아무렇지 않게 호랑이들을 돌려 깠는데, 전부 사실에 기반한 말들이라 반박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런데 운사가 일어날 땐 저 한가하고 노는 호랑이들 외에도 나와 안다인, 향록이 있었는데 언급이 없었다.
그냥 적호는 저 호랑이들에게 뭔가 쌓인 게 있나 보다.
운사는 재생이 덜 되어 탄 흔적이 있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그리움과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말을 곱게 쓰네. 몇천 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아.”
저게 고운 건가?
적호가 흥분했을 때 뱉는 말을 생각하면 확실히 좀 고운 것 같긴 하다.
백호군과 황지호도 저 말에 동의하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설마 저 둘도 아직 적호의 말투가 귀에 익지 않은 걸까?
옛날 말투가 매우 인상 깊었나 보다.
“운사, 청자는 전부 모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말해 다오.”
호랑이들이 운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기다렸다.
은호는 방문 밖에 있긴 하지만, 운사의 이야기를 전부 들어 줄 거다.
운사는 먼 과거에 있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 * *
천신의 음성이 한반도에 널리 닿던 시대.
신성한 범들이 신화적 존재가 되기 전, 진명조차 없었을 때.
호족과 웅족은 외적의 침입에 대항해 손을 잡았고, 천신께 자비를 청해 힘을 하사받게 되었다.
힘을 얻기 위해선 시련을 거쳐야 했다.
시련을 받는 자는 호족과 웅족에서 각각 하나씩 선발했다.
선발된 자들이 바로 적호와 웅녀였다.
“적호가 쑥과 마늘만 먹고 햇빛 없이 100일을 버틸 수 있을까?”
“적호가 버틸 수 있을지는 같이 간 웅족에게 달려 있을걸. 웅족이 옆에서 버티고 있으면 오기를 부리겠지.”
“그래, 적호는 웅족을 무시하던 놈이잖아. 져 줄 마음이 없겠지.”
풍백과 우사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둘은 운사보다 키가 훌쩍 큰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저렇게 말하니 아이처럼 보였다.
신인이 선택한 관리로서 지상에 온 이후로 저들은 늘 고상하게 굴었지만, 이렇게 풍백과 우사, 운사 셋이 있는 자리에선 본 성격을 드러내곤 했다.
운사는 아끼는 다기에 친우들 몫의 차를 내어 주며 말했다.
“100일을 견디지 않아도 될 거야. 신인께서 선발된 둘을 위해 힘과 자비를 베풀어 달라 청하셨어. 천신께서는 그 모습을 기특하게 여기셨지.”
키득거리던 풍백과 우사의 웃음소리가 멈추었다.
그들은 다기에 손을 뻗는 대신 의아해하며 운사를 바라보았다.
아직 저 둘은 신인이 올린 청에 관해 잘 모르는 듯했다.
운사는 천신과 신인 사이에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직 듣지 못했나 보구나. 천신께서는 신인의 청에 응해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했어. 아마 약속된 기한을 반 이하로 줄여 주지 않을까? 그 과정을 노래로 만드는 자들이 있었으니, 곧 들을 수 있을 거야.”
이 땅에는 신인을 두고 노래하는 자가 많았다.
이번 사건은 노래의 소재로 삼기 아주 좋았다.
운사는 외적의 침입으로 침체되었던 이 땅이 신인을 노래하는 가락으로 채워질 것이라 생각하니 몹시 기뻤다.
그 노래를 친우들과 들을 생각을 하니 더욱 좋았다.
하지만 친우들이 보인 반응은 운사가 생각했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천신께서 그 말을 들어준다고?”
“……신인의 말 하나에 반 이상 줄여 준다니!”
풍백과 우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분개했다.
그 둘이 그리 기뻐하지 않는 것 같아 운사는 부드럽게 화제를 전환했지만, 뇌리에 깊게 저들의 모습이 새겨졌다.
그 둘이 신인에 관해 보였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천신이 신인을 아끼는 모습을 두고 그저 놀랐다기보다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왜 풍백과 우사가 화를 낸 걸까.’
천신이 힘과 자비를 베풀어 그 둘이 빨리 전장에 나설 수 있게 돕는다면 기뻐하는 게 마땅했다.
운사와 이 땅에서 노래하는 이들이 기뻐한 것처럼 말이다.
안 좋은 생각이 치밀어 올랐지만, 운사는 이를 삼켰다.
풍백과 우사는 다른 이들 앞에선 평범하게 기뻐하며 신인과 천신의 행보에 감탄하고, 적호가 빨리 돌아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 모습에 운사의 근심이 옅어졌다.
‘너무 놀라다 보면 화가 난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
운사가 풍백과 우사에 관해 잊게 된 건,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적호 때문이었다.
천신이 자비를 베풀어 백일의 기한을 삼칠일로 줄여 준 덕에 적호는 일찍 동굴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백호는 적호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대련해 봐야겠다며 대검을 들고서, 황호는 쑥과 마늘만 먹었으니 다른 것도 먹이겠다며 간도 안 하고 구운 고깃덩이를 들고 마중 나왔다.
청호는 저 둘을 한심해하면서도 신인을 모시고 적호의 얼굴을 보러 왔다.
동굴 앞, 이상하게 얼굴이 좋아 보이는 적호가 입을 열었다.
“시련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호족, 웅족 가릴 것 없이 말을 잃었다.
대다수가 적호의 험한 입담을 겪어 봤기 때문이었다.
적호가 나오자마자 ‘뭘 이렇게 몰려 있어. 구경거리라도 생겼냐? 다 봤으면 꺼지고 외적이랑 싸우기나 해라.’라고 말할 것이라 예상한 운사는 제 귀를 의심했다.
황호의 손에서 넓은 나뭇잎으로 감싼 고깃덩어리가 툭 하고 떨어졌다.
황호는 주울 생각도 못 하고 적호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적호?”
평소에 적호가 저런 말투를 쓴다면 황호는 견디지 못하고 처웃었겠지만, 시련을 마친 직후라 그냥 걱정되는 것 같았다.
적호가 잘못되었거나, 내용물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듯했다.
적호가 뭐라고 설명하기 전, 은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웅녀 님께서 붉은 천을 몸에 두르고 계시는군요. 축하드립니다.”
그 말을 들은 웅녀는 대답하는 대신 적호의 한쪽 팔을 몸에 두른 붉은 천으로 감았다.
적호의 뺨이 붉은 천 못지않게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황호가 ‘하하하하!’ 하고 처웃고 백호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청호는 기겁하긴 했지만, 이내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당분간 호족들은 곱고 정중한 말투를 쓰는 적호를 놀려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즐거운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외적이 가까이 침입했어요. 외적이 노리는 건 신인 님입니다. 청호 님과 그 제자들 외에도 곁에 있을 분을 선발할 겁니다.”
호족의 수장, 은호는 평소처럼 부드럽고 온화하게 말했으나 전황은 그렇지 못했다.
전선을 유지해야 했기에 신인 곁에 많은 병력을 배치하는 건 불가능했다.
신출귀몰한 방식으로 신인을 노리는 외적과 싸우다가 많은 청호의 제자들이 명을 달리한 상태였다.
신인의 곁에 있는 자는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때, 망설임 없이 지원하는 자들이 있었다.
“풍백 님과 우사 님, 감사합니다.”
누구보다 먼저 신인의 곁에 있겠다 지원한 자들이 바로 풍백과 우사였다.
운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언젠가부터 생겼던 친우에 대한 위화감이 운사의 마음을 잠식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운사가 은호에게 말했다.
“나도 지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