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80화 (880/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80)

107. 선발 (10)

풍백과 우사의 변절을 확신한 밤.

해가 뜨기 전까지 운사가 그 변절을 알릴 기회가 있었다.

운사는 밤을 지새우며 고민했다.

‘풍백과 우사가 만들었다는 것을 보고도 내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풍백과 우사가 누군가를 해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둘이 신인과 호족을 위해 공헌한 바가 더 컸다.

그 점을 생각하면 아직 둘에게는 마음을 바꾸고 선택을 달리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운사는 친우들과 전장에서 공투하던 순간과 함께 웃었던 때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내 눈으로 그 무기를 확인하고 둘을 설득하자. 그게 되지 않는다면 그때…….’

운사가 결심을 굳혔을 때, 기척이 느껴졌다.

찬바람의 기세가 좀 죽었다고 생각했더니 바람을 등지고 백호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대검을 들고 있는 걸 보니 늦은 시각까지 수련한 듯했다.

계속 홀로 고민하던 중에 호족의 믿음직한 얼굴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백호, 고생이 많았어. 호족 최고의 무재가 이리도 수련에 힘쓰다니, 이 전쟁은 이긴 거나 다름없구나. 그리고…….”

백호는 무뚝뚝한 얼굴로 운사를 보고 있기만 했고, 운사는 점점 말꼬리를 흐렸다.

운사가 어색해하고 있자니 백호가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라.”

백호의 짧은 말에서 걱정이 묻어났다.

백호는 적호 못지않게 호전적이기로 이름난 싸움꾼이었으나 한 번 선에 들인 자는 남다르게 대했다.

운사는 망설였다.

만약 이 자리에서 풍백과 우사에 관한 의심을 입에 담으면 백호는 그 말에 귀 기울여 주고 자신과 함께 그 둘을 설득하려 할 것이다.

누구보다 자신의 힘을 믿는 백호이므로 풍백과 우사가 보여 주는 힘에 흔들릴 리도 없다.

‘……내 걱정을 나눠 줄 수는 없어.’

어쩌면 풍백과 우사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하여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공연히 일을 크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운사는 어설프게 속내를 숨기고 말했다.

“내일 신인을 모셔야 하잖아. 긴장했나 봐.”

“…….”

백호는 불만스러워 보이는 태도로 몇 마디 말을 더 붙였으나 별 소득이 없자 물러났다.

백호가 물러난 이후에도 운사는 좀처럼 잠에 들지 못했고,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날이 밝자 호족의 진영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늘은 큰 임무를 수행하는 날이었다.

“오늘은 천신 님께 기도를 올리고, 지맥의 힘을 키워 한반도의 오염을 막기 위해 움직이는 날이에요. 신인 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 안전에 더욱 신경 써야겠죠.”

신인은 보통 안전을 위해 호족의 진영 중심에 머무르나 출전을 피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외적은 한반도의 지맥을 파괴하고 오염시켜 이 땅에 사는 자들의 힘을 앗아 가고자 했다.

거기에 더해 어둠을 부르고 하늘을 덮어 천신과 이 땅의 연결을 차단하려 했다.

이에 대응해 신인이 지력이 강한 곳에서 천신께 기도를 올려 한반도에 내린 축복을 유지하고, 어둠을 지웠다.

신인만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었고 그만큼 위험이 따랐다.

“외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넷으로 나뉠 거예요. 신인 님을 포함해 전원 얼굴을 가리고 움직여야 합니다.”

은호가 신인의 곁에 서 있는 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청호와 그 제자들, 풍백, 우사 그리고 운사.

가리기 전에 이들의 얼굴을 잊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은호가 시선을 주었다.

외적의 침략이 발생하기 전보다 숫자가 줄어 있었기에 이 과정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신인의 대역으로 선정된 세 분께서는 이 천을 사용해 주세요.”

은호는 신인이 사용할 법한 질 좋은 옷감을 대역에게 건넸다.

여태까지 대역을 맡은 자들 대부분은 저 천을 몸에 걸친 채로 죽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들은 은호가 건네는 천을 기꺼이 받았다.

“지맥 네 곳을 정했습니다. 설명하는 시간을 아낄 겸, 좀 더 확인하기 편하도록 지도를 그렸어요. 이동 중에 확인해 주세요.”

은호는 당연한 절차를 설명하듯이 말했지만, 운사는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은호는 넷으로 나뉜 이들에게 대략적인 방향만을 설명하고 자세한 위치는 밝히지 않았다.

이를 두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으나 운사는 뭔가 마음에 걸렸다.

평소라면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겠지만, 풍백과 우사 건이 있어서 그런지 마치 은호는 이곳에 있는 누군가를 의심하는 듯했다.

은호는 신인이 향하는 장소를 다른 이들에게 감추기 위해 저리 행동하는 것 같았다.

“운사 님, 부디 무사히 다녀오세요.”

출발하기 전, 은호가 운사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운사는 신인의 곁을 수행하는 자로 선발되어 은호로부터 지도를 건네받았다.

운사는 은호의 믿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풍백과 우사가 무슨 일을 벌이더라도 내가 막으면 돼. 신인과 청호도 있으니 괜찮을 거야.’

운사는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청호가 신인의 경호 외에도 운사의 마음을 신경 쓸 정도였다.

풍백과 우사는 장난처럼 운사더러 겁쟁이라고 놀렸다.

‘반은 장난이겠지만, 반은 진심이겠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내가 겁쟁이로 보였을 거야.’

씁쓸한 심정을 삼키고 있자니 풍백과 우사는 곧 말을 돌렸다.

그 둘은 어제 나눈 말을 잊은 것처럼 태연하게 신인에게 말을 걸었다.

“지맥의 오염이 더 심해진 것 같아요. 본래 이 땅을 정화하는 건 무녀의 역할 아니었나요?”

“맞아요. 호족의 무녀는 다 약해 빠졌지만, 아주 뛰어난 무녀가 하나 있었잖아요?”

풍백의 말대로 호족의 무녀는 숫자도 적었고, 매우 약했다.

천신은 신인을 몹시 총애했기에 자신의 축복과 자비를 그에게만 쏟으려 했다.

그렇기에 무녀를 뽑고 말고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은혜를 베푸는 데에도 소극적이었다.

천신이 그렇게 나오니 굳이 무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적었다.

하지만 외적과의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아주 우수한 무녀가 등장해 호족이 크게 환영했다.

신인이 풍백과 우사의 물음에 답했다.

“무녀의 힘으로는 이 오염을 정화하는 게 불가능하다. 다만, 아주 뛰어난 무녀가 있는 건 사실이지. 그 무녀는 특별히 은호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더구나.”

“무슨 명령이요? 오염을 정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얼굴 보기 어렵다고 생각했더니 뭘 하고 있었나 봐요.”

일상적인 잡담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운사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저들이 호족이 아끼는 무녀에 관해 캐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술렁였다.

마치 배신자가 적의 동태를 살피는 것처럼도 보였기 때문이다.

‘호족을 ‘지상의 범 따위’라고 불렀던 이들이니 인간인 무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관심을 둘 것 같지 않아. 왜 저런 걸 묻는 거지? 누군가가 둘에게 무녀에 관해 알아 오도록 시켰나?’

운사는 신인이 중요한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으면 했다.

만약 운사에게 마음의 여유가 더 있다면 능숙하게 화제 전환을 했겠지만, 그저 지금은 당혹스러워하는 게 고작이었다.

신인은 아무 의심 없이 답했다.

“은호의 말에 따르면 다음 무녀 양성을 위해 힘쓰고 있다더구나. 뛰어난 무녀 한 명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금방 올 테니까.”

“아, 그런 거예요? 무녀 한 명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적으니 수를 늘리려고 하는 거군요.”

“얼굴 보기 힘들어서 뭐 대단한 걸 하는 줄 알았네요. 천신께서 베푸는 총애의 방향이 바뀔 리가 없으니 생각을 달리하는 게 좋을 텐데요.”

신인의 답변을 들은 풍백과 우사는 순순히 물러났고, 운사는 크게 안심했다.

다행히 그 무녀는 대단한 임무를 맡지 않았고, 신인도 이를 알고 있는 듯했다.

이 대화가 나중에 새어 나간다고 해도 아무 피해가 없을 것이다.

어느덧 해가 정점을 지나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시간은 많이 흐르지 않았으나 청호의 인도를 따라 빠르게 이동한 덕에 호족의 진영에서는 매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맥의 한 지점에 도달했다.

청호가 말했다.

“내가 동쪽을 보고 있을게. 운사, 너는 북쪽을 봐. 그쪽도 같이 볼 거야. 풍백과 우사는 서쪽과 남쪽을 맡아 줘.”

풍백과 우사는 청호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제 위치로 향했다.

그 모습은 호족을 존중하고 신인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관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운사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천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동안 신인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

운사는 청호가 말한 대로 북쪽을 살피면서도 풍백과 우사를 계속 의식했다.

그들은 평범하게 주변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휘이이……!

그때 따뜻한 바람이 운사를 감쌌다.

마치 그를 진정시키려는 것 같은 힘이었다.

다시 잘 느껴 보니 이건 바람이 아니라 신인의 말이 품은 힘이었다.

그는 천신께 기도를 올리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지키는 이들의 안전을 기원하고 있었다.

‘기도를 할 때마다 땅과 하늘이 신인의 힘을 크게 빼앗아 가는데, 우리에게까지 마음을 쓰다니!’

신인의 기도하는 음성에 힘이 실려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기도가 이어질수록 땅을 잠식하려던 오염이, 하늘을 덮으려던 어둠이 점점 옅어졌다.

땅이 원래 색을 되찾고 구름이 없는데도 흐렸던 하늘이 맑게 갰다.

신인이 기도를 반쯤 마쳤을 때였다.

청호가 갑자기 수신호를 보냈다.

‘……누군가 온다는 신호야!’

운사가 바짝 긴장했다.

막 나타난 누군가가 어쩌면 풍백과 우사가 보여 준다는 힘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운사는 곧바로 신인 곁으로 뛰어들 준비를 했다.

하지만 청호가 가리킨 방향을 본 순간, 온몸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청호가 발견한 존재는 백호였다.

“백호, 네가 왜 와? 오늘 너는 외적 토벌을 하기로 했잖아.”

“내 몫은 다 잡았다. 은호의 명령을 받고 여기에 왔다.”

백호는 별일 없었던 것처럼 말했으나 보통 일은 아니었다.

할당된 몫을 다 처리하고 여기까지 오는 데에 상당한 힘을 소모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백호는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고 최고의 무재다운 기백이 넘쳐 흘렀다.

‘그런데 은호가 어째서 백호를 여기에 보낸 거지?’

은호도 무언가를 느꼈던 걸까?

어쨌든 백호가 오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풍백과 우사가 나쁜 마음을 먹어도 백호가 있다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운사의 기대는 곧 무너졌다.

저 멀리에서 먼지구름이 일어나고, 백호의 안광이 저편을 꿰뚫었다.

백호는 말없이 대검을 손에 들었다.

저편에서 외적의 떼가 신인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풍백과 우사는?’

풍백과 우사는 멀리서 몰려드는 외적과 싸울 준비를 하는 백호를 번갈아 보았다.

그들은 외적의 등장보다는 백호의 등장을 더욱 신경 쓰는 것 같았다.

겉으로 봤을 때 갑작스러운 등장을 두고 그저 당황하는 것처럼도 보였지만, 예상외의 일이 발생해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냥 그 무기로 신인의 힘을 시험해 보려는 게 아니라, 설마 외적과 손을 잡은 거야?’

운사는 망연자실했다.

풍백과 우사가 신인과 호족에게 반감을 품어 웅족과 손을 잡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들이 노리는 건 외적을 토벌한 후, 호족과 신인을 저버리고 웅족이 실세에 올라서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외적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웅족도 외적과 손을 잡은 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외적들이 하늘에 무언가를 띄웠다.

거대한 천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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