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81)
107. 선발 (11)
천칭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외적 중 가장 몸집이 크고 강한 힘을 품은 자가 천칭 위로 올라갔다.
쿠구구구……!
천칭 위에 올라선 외적이 천칭에 힘을 쏟아붓자 불길한 빛을 뿜었다.
외적이 손가락을 들어 아직 기도 중인 신인을 가리켰다.
신인의 기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몇 차례 외적의 습격으로 기도를 마치지 못했기에 이번에도 실패할 수는 없었다.
‘신인께서 우리를 믿고 계속 기도하고 계셔!’
처음의 넷만 있었다면 모를까, 이 자리에는 백호가 있으니 믿을 만했다.
청호는 곤혹스러워하긴 했지만, 신인에게 기도를 멈추고 도망가자고 권하지 않았다.
신인과 청호는 기도를 마치게 하기 위해서 은호가 백호를 보낸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백호 또한 그리 여기는 건지, 망설임 없이 행동 방침을 정했다.
적진에 뛰어들기 전, 백호가 청호에게 말했다.
“청호, 너는 신인의 곁을 지켜라.”
“그럴 거야.”
백호가 천칭을 향해 대검을 들어 올렸다.
천칭부터 부술 생각인 듯했다.
백호가 천칭을 향해 달려들자 외적이 보란 듯이 웃으며 신인을 향해 주문을 읊었다.
그러자 불길한 빛이 신인을 삼키기 위해 쏘아져 나갔다.
청호가 신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천칭의 빛이 유연하게 휘어 표적을 삼키기 위해 움직였다.
휘익!
청호가 허를 찔린 것처럼 보였지만, 곧바로 이에 대응했다.
청호는 자신의 기를 갈무리해 다리에 실어 빠르게 보법을 사용했다.
빛의 움직임을 순식간에 따라잡은 청호는 신인과 천칭의 빛 사이를 파고들었다.
파아아앗!
천칭의 빛이 청호를 삼켰다.
청호는 충격에 대비하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청호를 보고 외적들이 술렁였다.
그 술렁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무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거슬리니 먼저 부수어야겠군.”
외적들의 귀에 백호의 목소리가 몹시 가깝게 들렸다.
백호의 앞을 가로막던 외적들의 숨이 끊어져 있었다.
천칭 위에 올라선 외적이 망연자실해 있다가 이번에는 백호를 가리켰다.
그러자 이번엔 천칭의 빛이 백호를 덮쳤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만일을 대비해 몸에 백색의 기를 두르고 있던 백호가 사라지는 천칭의 빛을 보며 말했다.
“그것으로는 나와 청호를 어찌할 수 없다. 너희에게는 과분한 무기인가 보군.”
백호의 도발에 외적이 아우성쳤지만, 그 말대로였다.
그들은 천칭 위에 청호나 백호를 올릴 만한 힘이 없었다.
호족을 올릴 수도 없는데, 더욱 큰 존재감을 가진 신인을 천칭의 한쪽에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법 힘이 있어 보이던 외적은 의미 없이 청호와 백호를 노렸던 것만으로도 힘겨웠던 건지, 비틀거리다가 천칭 위에서 떨어졌다.
기절한 그자에게 관심을 두는 외적은 없었다.
땅 위에 쓰러져 있는 자를 보다 운사가 생각했다.
‘저들은 제대로 천칭을 움직일 힘이 없어. 강한 무기를 만들었지만, 다룰 수 있는 자가 없는 거야.’
아무리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어 봤자 다룰 힘이 없다면 사용할 수 없었다.
풍백과 우사는 굉장한 무기를 만들었으나 아직 저걸 다룰 수 있는 자가 나타나지 않은 듯했다.
퍼억! 카아앙!
백호가 힘을 실어 천칭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백호의 대검이 하얀 폭풍을 부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신인을 지키던 청호를 흉내 내는 것처럼 외적 몇몇이 그 사이에 끼어들었으나, 검압에 밀려 몸이 잘리거나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검격의 일부가 천칭에 닿았으나 천칭에는 흠집도 나지 않았다.
“제법 단단하군. 차라리 그걸 직접 휘두르는 게 낫겠어.”
백호가 대검을 고쳐 쥐고 다시 휘두르려 했지만, 그 전에 백호의 눈이 전장의 변화를 포착했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것보다 몇 배 더 많은 외적이 감지되었다.
그냥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고, 교묘하게 퇴로를 막아 포위하기 위해 먼 곳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청호가 한발 늦게 이를 알아채고 표정을 흐렸을 때였다.
“기도를 마쳤다. 이만 가자.”
기도를 올리던 신인이 자리에 일어섰다.
기도가 천신에게 닿고, 이 땅에 널리 퍼졌다는 증거로 신인의 뒤로 후광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청호는 그 모습이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운사 또한 그 후광을 보자 눈시울과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지금은 넋을 놓을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퇴각하는 건 어려워. 백호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아주 많은 외적이 오고 있어……!’
호족의 진영으로 이어지는 길은 막히지 않았지만, 그사이에 한 번이라도 습격을 당해 발이 묶이면 금방 외적들에게 따라잡히고 말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풍백과 우사가 이동 중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저런 천칭으로 신인을 노릴 정도인데, 퇴로를 적에게 노출하고 여차하면 직접 신인을 공격하는 짓쯤은 당연히 할 것 같았다.
‘외적이 천칭을 움직이진 못했지만, 백호가 한 번에 저것을 부수지도 못했지. 풍백과 우사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야.’
풍백과 우사는 표정을 잘 감추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비와 바람을 불러 외적의 발을 묶고 있긴 했지만, 그들이 마음을 바꿔 신인을 따르기로 한 것 같진 않았다.
“내가 여기에 남겠다. 그러니…….”
“풍백, 우사! 나와 함께 이 자리에 남아 줘.”
백호가 말을 마치기 전에 운사가 말을 끊었다.
최고의 전력을 두고 신인이 배신자들과 함께 가게 할 수는 없었다.
운사는 책임을 지고 자신의 친우들의 발을 묶기로 했다.
“우리 셋은 너희보다 발이 느리고 전투에 능하지 않아. 하지만 발목을 잡는 것만은 누구보다 잘하지. 그러니 남는다면 그건 우리 셋이어야 해.”
운사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셋은 전투에 능한 신이 아니었고, 그나마도 이 땅에 내려오며 많은 힘을 포기했다.
호족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전투에 능한 백호와 청호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비, 바람, 구름을 다루었기에 다수의 발목을 잡는 것만큼은 잘했다.
호족들도 셋에게 장난을 치다가 저들의 능력에 곤욕을 치른 적이 꽤 있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운사…… 너……!”
“풍백, 우사. 우리가 여기에 남자.”
풍백과 우사가 뭐라고 하기 전에, 운사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어제 우리가 나눈 대화가 기억나지? 그걸 듣고 생각한 거야.”
어제의 대화에 관해 언급하자 풍백과 우사가 입을 다물었다.
운사가 여기에서 그들의 배신에 관해 밝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호가 주저 없이 그들의 목을 벨 것이고 신인이 그들을 죽이라고 명한다면 청호는 군말 없이 따를 것이다.
결국 풍백과 우사가 운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 모습은 겉보기에는 운사의 뜻을 따르려는 친우들의 모습으로 보였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어 바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신인의 말로 그들의 행보가 결정되었다.
“풍백, 우사, 운사. 원군을 보낼게.”
“신인이시여, 부디 당신의 안전만 생각하세요.”
“…….”
운사는 답하였으나 풍백과 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운사의 말에 동의한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마지막까지 그들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운사가 홀로 인사했다.
“……안녕, 신인. 나의 친우들이여.”
운사가 부리는 먹구름은 외적을 붙잡고 있었으나, 비와 바람은 그렇지 않았다.
외적들이 유유히 비바람을 뚫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풍백과 우사가 그들을 허락했다는 증거였다.
그들은 짜증 어린 시선으로 먹구름을 보아 말했다.
“아아아, 천칭을 움직일 힘이 있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더만. 결국 이 꼴이 났네.”
“그걸 외적에게 맡기는 게 아니었어. 차라리 웅족에게 맡길걸.”
“웅족도 그다지…… 웅녀는 대체 언제부터 연구에 참가하는 거야? 적호가 밤낮 안 가리고 옆에 있는 바람에 못 오는 거지?”
풍백과 우사는 외관에 어울리지 않게 아이처럼 투덜거렸다.
아직 그들은 운사에게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오한이 느껴졌다.
풍백이 외적을 하나 지목하고는 물었다.
“야, 그분의 의중을 물어봐.”
외적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답했다.
그 답을 들은 풍백과 우사가 씨익 웃었다.
“운사, 네 선택 덕에 우리 셋은 죽게 될 거야.”
* * *
운사의 말이 잠시 멈췄다.
기력이 부족한 건지, 감정이 북받친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운사의 상태를 살피던 황지호가 이어서 말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내가 대신해서 설명하겠다.”
황지호는 운사가 말을 멈춘 사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매우 먼 옛날의 일이었지만, 황지호는 얼마 전에 있던 일을 설명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설명했다.
어쩌면 계속 그날의 일을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 셋이 외적의 발을 묶는 사이, 백호와 청호는 신인을 모시고 퇴각했다. 그러나 매복을 피해 우회했고, 귀환이 늦어지자 은호는 추가로 원군을 보냈지.”
그날 가짜 신인 역할을 맡은 호족들은 모두 무사했다고 한다.
그걸 들으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 작전에서 신인으로 위장했던 다른 호족들은 무사했다는 건, 정확히 신인의 위치를 노려서 모든 전력을 퍼부었다는 뜻이겠지. 풍백과 우사, 신무기였던 천칭. 이 셋을 동원할 수 있는 타이밍이니까 놓치고 싶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갑작스러운 백호군의 등장, 천칭을 다룰 수 있는 자의 부재, 운사의 선택으로 그 수가 막혔다.
황지호가 이어서 상황을 설명했다.
은호는 그들이 귀환하자마자 곧바로 진짜 신인이 있을 곳으로 보냈다.
그 바람에 매복을 피해 우회하던 신인 일행과 원군이 엇갈리고, 원군은 곧바로 신인이 기도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은호가 보낸 원군은 그 셋의 죽음을 목격했다. 처음에 그들은 그 셋을 구하려고 했다. 하나 외적의 숫자가 많았고, 운사가 그들에게 신인은 이곳에 없으니 도망치라고 몇 번이나 외쳤다고 하더군.”
“……하지만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다. 멀리서 너희의 사지가 찢기는 걸 본 후에야 퇴각했지. 그리고 나중에 시신의 일부를 뒤늦게 수습했다. 몇 번이나 확인해도 너희의 것임이 확실하더군.”
황지호가 이어서 물었다.
“죽은 시늉을 하기 위해 신체의 일부를 자르고, 그런 촌극을 벌인 건가?”
“……네, 그렇습니다.”
황지호와 적호의 기운이 눈에 띄게 사나워졌다.
백호군도 평소보다 더욱 서늘한 눈을 하고 있었으나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다행히 호랑이들은 예전에 후예의 존재를 알았던 것처럼 폭발하진 않았다.
다 죽어 가는 운사가 앞에 있어서 겨우 참는 것 같았다.
“그 이후, 시간을 들여 잘린 사지를 재생하고 풍백과 우사를 만나게 됐습니다만……. 어린 모습을 하고 있었고, 더 강해졌죠.”
다시 만난 풍백과 우사는 관리였던 시절 청년의 모습을 했던 것과 달리 어린 외양이었다고 한다.
더는 배신을 감출 필요가 없어졌으니, 굳이 어른의 모습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풍백과 우사는 운사에게 한 번 더 변절할 것을 권했고, 이를 거절하자 화로에 밀어 넣었다고 한다.
운사가 거쳐 간 화로의 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바뀔 때마다 점점 더 뜨거워졌다고 한다.
“그자가 네 힘을 뽑으려 했던 건 알겠다. 그자는 힘을 축적해 두기만 한 건가?”
“……저는 그저 연료였을 뿐이니, 무엇을 위해 그렇게 타들어 갔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운사는 설명을 덧붙였다.
가든에 옮겨져 힘의 매개가 되기 전까지 운사는 말 그대로 연료처럼 타들어 가며 수천 년간 힘만 뽑혔다고 한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아주 큰 힘이 그 순간에 사용되었고, 그 이후에 저는 가든으로 옮겨져 힘의 매개가 되었으니까요.”
“그 순간?”
“약 100년 전, 그자는 그때 수천 년간 모아 온 힘을 한반도에 사용했습니다.”
1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바로 이계 충돌이었다.
하지만 진족의 힘을 많이 뽑았다고 해서 이계 충돌을 발생시킬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아마 그자는 언젠가 발생할 이계 충돌 과정의 일부를 조작했을 것이다.
‘그자는 이계 충돌이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발생하도록 수를 둔 것 같아.’
이 세계의 상황을 엮어 생각하니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