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82)
107. 선발 (12)
가설에 관해 생각을 잇기 전, 운사가 말을 이었다.
“황호 님, 저는 친우가 아니라 죄인으로 취급받아야 합니다. 호족의 나락으로 보내 주십시오.”
호족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운사가 거듭 자신의 죄를 고하고 벌을 청했다.
운사가 그 말을 하며 고개를 숙이려 했는데, 움직이려다가 그만 침대 위로 쓰러질 뻔해 백호군이 붙잡아야 했다.
그걸 본 호랑이들의 속이 터지는지 운사가 볼 수 없는 방향에서 험한 표정을 지었다.
호족의 나락이라면 호족에게 잡힌 웅족이나 우족 등이 끌려간 곳 아닌가.
그런 곳에 호족들이 운사를 보낼 리가 없었다.
“무슨 죄로? 널 벌하라는 말이냐. 네 힘으로 인해 이계 충돌이 한반도에서 먼저 일어난 건 네 잘못이 아니다. 가든에서 있었던 일 또한 그렇다.”
“친우들의 변절을 알고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믿은 다정한 어리석음이 죄라면, 그들의 변절을 알지 못했던 무지함 또한 죄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호족 전원 다 같이 나락행이군.”
황지호가 그렇게 말하며 백호군과 적호 쪽을 보았다.
두 호랑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어서 한마디 말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풍백과 우사를 베었어야 했다. 내 실책이다.”
“황호의 말대로입니다. 다른 죄가 발각되었으니 다시 나락으로 가야겠군요. 아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이 몸은 차기 수장을 선정해야겠군. 배신을 알아채지 못한 자를 제외하면 후보가 매우 적다만…… 임시로 죽호를 대리로 세우면 되겠지.”
호랑이들은 짠 것도 아닌데도 능청스럽게 말을 척척 해 댔다.
진지한 척 말하고 있지만, 운사가 죄가 어쩌고 나락이 어쩌고 하는 걸 멈추게 하려고 저런 말을 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운사는 그들이 진심으로 나락에 가겠다 결심했다고 여기는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저 호랑이들은 신화 시대에서도 운사에게 저런 식으로 말을 하다가 먹구름을 뒤집어썼을 것 같다.
운사는 목소리를 겨우 쥐어 짜내어 그들을 말렸다.
그렇게 운사가 죄를 청하는 걸 멈추자 황지호가 말했다.
“모두가 결단력이 빠르고 용기가 있고 혜안이 있는 건 아니다. 네 어리석은 고민과 망설임이 화를 불렀으나 나는 그걸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때문에 풍백과 우사가…….”
“풍백과 우사는 호족의 은인 덕에 잡혔다. 걱정할 것 없다.”
갑자기 황지호가 나를 끼워 넣었다.
운사는 가든에서 왼눈을 잃은 사건 때문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데, 갑자기 나를 들먹이니 더 마음이 쓰일 거다.
나를 팔지 말라고 하고 싶었으나 운사의 안정을 위해 일단 협력하기로 했다.
운사는 괴로워하며 말했다.
“제 힘으로 조의신이 다쳤습니다. 저는 호족의 은인을 다치게 한 죄인입니다.”
“제 왼눈을 공격한 건 도철이에요. 그리고 제 힘이 부족해서 왼눈을 잃은 거예요. 그쪽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왼눈만 빼앗은 게 아니라…….”
운사는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저 태도를 보니 확실해졌다.
운사는 성형우의 광림이 발동했을 때, 내 과거와 후회를 본 것이다.
가족에게 모질고 모나게 굴던 그 모습을 다 봤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화로 속에서 온몸이 불타고 있을 때 못 보여 줄 걸 보여 주고 말았다.
나는 운사가 그 일에 관해 말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가든에서 있던 일은 그쪽 잘못이 아니에요. 만약 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제 이름을 두고 죄를 청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조의신…….”
정말 미안한 마음이 큰지 호족의 은인 운운하면서 죄를 청하는 것을 멈추었다.
황지호가 운사를 회유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호족의 은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죄를 청할 건가? 네 죄는 그 배신자들을 아직도 친우라고 칭하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은 제 친우였습니다. 이제 와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고집불통이로군. 친우 관계에 책임이나 의무가 있나? 나는 없다고 믿는다. 의무를 짊어지는 건 본인의 선택이지만, 그걸로 죄를 가릴 수는 없다.”
황지호를 필두로 운사를 설득했다.
백호군과 적호는 황지호만큼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으나 적절한 타이밍에 말을 얹어 설득력을 더했다.
굳게 마음을 먹은 운사조차 흔들릴 만큼 그럴싸한 말들이 이어졌지만, 나는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친우 관계에 책임이나 의무가 없다고? 황지호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황지호는 친우들이 곁에 없는 동안에도 긴 세월 동안 수장직을 지켜 왔다.
일종의 책임이나 의무를 느끼지 못했다면 그렇게 긴 시간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물론, 막판에 태만해진 바람에 이 난리가 났지만 말이다.
“운사,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쉬고 있도록.”
“……알겠습니다, 황호 님.”
“백호나 적호는 편히 대하면서 왜 이 몸에게만 그러는 거냐. 다음에 왔을 땐 편히 대하는 걸 보고 싶군.”
황지호가 툴툴거리긴 했으나 얼굴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운사는 아직 생각이 많아 보였으나 당장이라도 죽여 달라고 할 것처럼 죄를 청하는 건 그만뒀기 때문이다.
운사의 곁에는 황지호의 분신을 붙여 두기로 하고 전원 자리를 비우려 할 때였다.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모두 칼같이 듣고 멈춰 섰다.
운사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염치 없이 몇 차례 호족에게 도움을 청하려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살아서 나가기 위해 한 짓은 아닙니다. 적어도 호족을 노리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운사가 구조 요청을 했다고?
호랑이들을 둘러보니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플마고나 이 세계에서 운사의 구조 요청이라고 할 만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황지호도 짐작 가는 구석이 없는 듯했다.
“알았다면 당장 너를 구하러 갔을 거다. 너희의 생존에 관해 안 것도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청하려 했지?”
“이계 충돌 이후입니다. 화로를 옮긴 직후에는 틈이 생겨서 지맥을 이용해 제 힘을 호족의 신역 쪽으로 보낼 기회가 있었습니다. 역시 닿지 않았나 보군요.”
호족의 신역은 은광구 전역이고, 범위를 좁히면 은광고 교내다.
그곳에서 운사의 구조 요청이라고 할 만한 게 있었나?
그리고 왜 지금 시점에서 그 구조 요청에 관해 확인할 필요가 있는 걸까.
두 번째 의문은 운사가 곧 풀어 주었다.
“역시 그랬군요. 엉뚱한 곳에 피해를 입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만…….”
“피해라니, 네 구조 요청에 누가 다칠 수도 있단 말인가?”
“화로에 오래 있던 탓에 제 정신과 몸은 온전치 않았습니다. 제가 보낸 힘이 지맥을 타고 어떻게 흘러갔을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변했을지도 모릅니다.”
운사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지맥을 타고 이동한 바람에 지력에 의해 자신의 신호가 어떻게 변질되었을지, 어떤 피해를 일으켰을지 걱정되는 듯했다.
황지호가 운사를 안심시켜 주며 말했다.
“이계 충돌 이후 큰 힘이 여럿 작용하게 되어 지맥의 상태가 불안정하지. 요청 자체가 닿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네 구조 요청을 알아채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나 별일 없었을 거다. 걱정 말도록.”
“구조 요청이라면 운사의 위치도 포함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찾아내면 이동 경로를 파악할 수 있을 테니 도움이 되겠군요.”
“성형우의 시신으로 지금 이동 경로를 확인하는 작업에 진척이 있다고 했지. 흠, 운사와 항상 같이 있었을 리는 없을 테니 둘 다 알게 되면 도움이 되긴 하겠군.”
현재 적호는 성형우가 죽기 전 신체에 남긴 단서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중이다.
적호의 말대로 운사의 구조 요청 신호까지 파악하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저 둘의 말대로야. 생각해 볼 가치가 있어.’
나는 운사의 말과 이 세계에서 있던 일을 되짚어 봤다.
긴 세월 화로 속에서 타들어 가던 운사.
이계 충돌 후, 은광고 쪽으로 쏘아진 운사의 구조 요청.
지맥과 지력에 의해 신호가 변질되었을 가능성.
운사가 예상하지 못했고, 호랑이들이 알아채지 못한 구조 요청의 형태.
‘설마 그것과 연관되어 있는 게 아닐까?’
은광고에는 온갖 괴사건이 터지곤 한다.
원인이 규명된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나는 신문부 소속의 부원으로 그런 사건을 여럿 조사해 왔다.
“조의신, 뭔가 떠오른 게 있나 보군.”
황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호랑이들과 운사의 시선이 몰려 있었다.
아직 별다른 근거가 없는 생각이라 검증 과정이 필요한데, 저렇게 쳐다보니 좀 그랬다.
그래도 조사 과정에 호랑이들을 동원하려면 말을 해야 하니 하기로 했다.
“우리 학교에는 괴담이 많잖아. 운사의 구조 요청이 변질된 형태로 도달했다면, 은광고 괴담 중의 하나가 그렇지 않을까 해서.”
신문부의 단골 취재 항목 중 하나는 바로 은광고 괴담이다.
파고들어 봤더니 특정 학생의 자작으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명확한 인과 관계가 존재하는 것도 있었다.
기숙사 건물에서 투신자살한 학생 원혼이 불러낸 붉은 벼락이 사실은 적호가 한 짓이었다거나.
폐쇄 구역 구교사에서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교직원의 유령이 두 학생을 홀렸다는 괴담은 사실 내가 부정 입학자를 상대로 벌인 짓이라거나.
은휘관 지하에서 이사진이 벌인다는 초혼식이 알고 보니 은호를 상대로 진짜 있었던 일이라거나.
학생회와 선도부가 만들었다는 비밀 결사가 실존한다거나.
“역사가 있고, 이능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괴담이 성행하는 건 흔한 일이다. 은광고의 괴담은 좀 많은 편이긴 하지. 그중 어떤 괴담을 가리키는 거지?”
“운사는 오래도록 화로에 있었어. 그러니 만약 괴담의 형태로 구조 요청이 남았다면 불과 관련되었을 거라고 생각해.”
“불이라……, 최근에는 안전을 이유로 이능 수업을 제외하면 학생들이 직접 불을 다룰 일이 거의 없다만.”
“응, 최근에는 그렇지.”
하지만 운사가 신호를 보낸 건 이계 충돌 이후의 일이다.
즉 100년 정도의 시간이 있던 셈이다.
“그리고 운사의 힘이라면 누군가는 목격했을 거라고 생각해. 아주 강한 힘일 테니, 꽤 큰 소동이 일어났을 거야.”
호족들은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 듯했다.
큰 소동이 일어났다고는 해도 은광고에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하는 건 일상이었다.
게다가 내 추측에 따르면, 운사의 구조 요청이 이 학교에 닿은 건 황지호가 태만했고 남은 호랑이들은 학교 밖을 떠돌 때였다.
더 큰 소동이 발생했더라도 호랑이들은 알아채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내 추측을 입에 담았다.
“구교사의 소각로에 비명을 지르는 귀신이 있다는 괴담이 있어. 그리고 현재 졸업한 0반 선배님들이 재학 중에 구교사에서 귀신을 목격했다고 해. 제령 하겠다고 졸업 후에도 소란을 일으키셨지.”
졸업한 0반 선배놈들이 목격한 구교사의 소각로 귀신.
그 정체는 바로 운사가 보낸 힘의 잔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