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85)
108. 취재 (3)
용궁으로 향하는 길.
용궁 주변의 보안이 확실하다고는 하나 내가 드나드는 모습을 감추고 싶었다.
기록 기기의 사각을 노려 이동 루트를 짜되 모습을 숨기기 힘든 곳에선 전무영의 광림 ‘그림자 없는 시간’을 사용해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황지호의 등장으로 무산되었다.
갑자기 나타난 황지호가 말했다.
“이 몸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것 같군. 설마 혼자 갈 생각이었나?”
호랑이들과는 오늘 일정을 공유했다.
용궁에 몇 시에 방문할 건지, 어디에서 0반 선배놈들을 만날 예정인지.
일정을 확인한 황지호는 ‘알았다.’라고만 대답했기에 선배놈들을 만날 자리에서 합류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황지호의 말대로 혼자 갈 생각이었다.
대충 이런 요지의 말을 했더니 황지호가 어처구니없어하며 말했다.
“환자를 혼자 보낼 리가 없지 않나. 하물며 너더러 용족의 은인 운운하는 놈들이 모인 소굴이거늘.”
“환자?”
사지가 멀쩡하고 이제 이능파도 돌아와서 어지간한 이계의 공략은 혼자 할 수 있는데 환자라니.
내가 되묻자 황지호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넌 환자다. 용왕신의 힘으로 치료받아야 할 정도로 다친 주제에 아니라고 할 생각인가?”
용궁의 신세를 지는 입장에선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예정에 없었던 도움을 받아 이동하게 되었다.
이동하는 동안 황지호가 몸을 아껴라, 앞으로도 계속 바래다줄 거라는 등의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긴 했지만, 에어 리무진에 타고 내릴 때만 광림을 쓰면 되니 편하긴 했다.
용궁을 감싼 오색 채운의 결계를 넘자 마중 나온 용들이 보였다.
염준열과 용제건 그리고 운룡이 있었다.
운룡이 구름을 타고 날아와 열렬히 손을 흔드는 가운데 염준열이 먼저 인사했다.
“의신아, 어서 와. 지호도 왔구나.”
“……안녕하세요.”
염준열은 황지호가 호족의 수장인 걸 안 이후로 다소 어색한 반응을 보였는데, 오늘은 태도가 자연스러웠다.
황지호보다는 다른 것에 신경을 더 쓰느라 그쪽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황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고는 용제건 쪽을 보며 말했다.
“용족의 후예가 마중 나왔군. 그런데 왜 용제건이 여기에 있지?”
“안녕.”
용제건의 기분이 지나치게 좋아 보였다.
스승의 날 사건이 끝나고 마주쳤을 때나 학교에서 봤을 때에는 어딘가 날이 서 있었는데, 지금의 용제건은 달랐다.
황지호가 실실 웃는 용제건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용제건, 여기에서 뭘 하고 있나.”
“요새 신록이가 호족이 시킨 일 때문에 바쁘잖아? 덕분에 시간이 남아서 좋은 구경거리를 보러 왔지.”
“바쁜 김신록을 귀찮게 하다가 쫓겨나서 이리로 왔나 보군.”
“신록이는 나 안 쫓아내.”
안 쫓겨났는데 왜 여기에 왔는지 모르겠다.
용제건은 헛소리를 좀 늘어놓다가 여기에 온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선후배이자 사제지간인 우리 준열이와 의신이는 매우 친한 관계잖아? 게다가 마침 의신이가 용궁에서 치료를 받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당연히 의신이가 크게 다친 걸 아는 줄 알았는데, 모르더라고.”
예상은 했는데, 염준열에게 내 부상 소식을 전한 게 용제건인가 보다.
용제건은 염준열이 당연히 아는 줄 알고 말한 거라고 하긴 했지만, 염준열이 이번 건에 관해 모른다는 걸 알고 저랬을 게 분명했다.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고, 겉보기에도 멀쩡하고, 치료를 받아 곧 나을 텐데 왜 굳이 착한 염준열을 걱정시키는 건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지만 유희계 용족의 사고 회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게 일러바쳐 놓고는 굳이 여기까지 와서 왜 그걸 자기 입으로 밝혔는지는 더 이해가 안 간다.
용제건은 태연하게 자신이 한 짓을 읊어 댔다.
“준열이가 많이 놀랐기에 걱정되어서 같이 의신이를 보러 왔어.”
“역시 용족의 후예는 몰랐나? 그럴 줄 알았다. 조의신이 말할 리가 없지.”
그 말을 끝으로 용제건과 황지호는 입을 다물었다.
염준열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겠다는 태도였다.
염준열은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진족들이 입을 다물 때까지 예의 바르게 기다린 후에 말하기 시작했다.
“용궁에서 보는 건 처음이네. 의신이는 자주 온 것 같지만 말이야.”
자주는 아니지 않나?
고작 세 번밖에 오지 않았는데.
하지만 용족과 관련 없는 일반인이 용궁에 세 번이나 방문했다면 자주 왔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진 않을 거다.
염준열은 내 왼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말했다.
“학교에서 마주친 적도 있었는데, 전혀 몰랐어. 심하게 다쳤다면서.”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요.”
“눈이 아예 사라졌다는데 심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용왕신께서 살펴도 한 번에 낫지 않을 정도인데.”
염준열은 사고를 치다 걸린 후배를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괜찮다고 다시 설명할 생각이었는데, 염준열의 얼굴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염준열은 매우 슬퍼 보였다.
감히 염준열을 슬프게 만든 죄로 청룡이 불벼락을 날려도 그냥 받아들여야 할 정도였다.
“의신아, 내 눈이 사라졌어도 똑같이 말했을 거야?”
염준열의 왼눈이 사라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용족과 붉은 사자, 홍룡 팬클럽이 다 들고일어나고, 나도 거기에 합류할 거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성국언이 지금 안대를 쓰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픈데 염준열의 눈은 아예 사라진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성국언 선배님이 최근에 안대를 쓰는 것과 관련이 있죠?”
염준열이 말투를 바꾸었다.
이번엔 선배가 아니라 제자로서 말하는 것 같았다.
제자 모드인 염준열을 처음 보는 구경꾼들이 ‘오’ 하고 짧게 감탄사를 뱉는 게 보였다.
특히 용제건은 황홀해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러다가 운룡이 던지는 조각구름에 맞았다.
염준열이 단호하게 말했다.
“스승이 그렇게 다쳤는데, 아무것도 몰랐던 못난 제자가 어찌 감히 두 눈을 뜨고 다니겠어요. 저도 안대를 쓰고 다니는 게 좋겠어요.”
성국언에 이어서 염준열까지 안대를 쓴다고?
실제로 염준열이 눈을 잃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래도 저건 좀 아니었다.
스타 플레이어 염준열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는 이들이 넘쳐 나는데, 그걸 어떻게 가리고 다닌단 말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황급히 사과했다.
염준열이 저런 말을 할 정도라면 아무튼 내가 잘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사과를 하는 내내 염준열은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과를 받고 싶어서 스승님께 이런 말씀을 드린 게 아니에요. 그냥 제 진심을 전하고 싶었어요.”
진심으로 눈을 가리고 다닐 생각이었단 말인가.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염준열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정말 염준열은 내가 나을 때까지 안대를 쓰고 다닐 게 분명했다.
평소에 말이 많던 용제건과 황지호는 이걸 구경만 하고 있었기에 나 혼자 열심히 말을 쥐어 짜내어 염준열을 설득해야 했다.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게 제일 좋겠지만, 만약에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꼭 말씀해 주세요. 지금처럼 제가 나중에 알게 되면 뒤늦게라도 스승님의 아픔을 공유할 거예요.”
염준열은 마지막으로 못을 박았다.
이제 다칠 때마다 꼬박꼬박 염준열에게 말해야 할 것 같다.
제자이자 선배를 걱정시키는 게 과연 옳은 일일지 모르겠지만, 그냥 저 말을 들어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쨌든 염준열을 슬프게 한 내가 잘못했다.
염준열이 사과하지 말라고 해서 사과의 말도 더 못 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들어가자. 다쳤는데 너무 오래 밖에 세워 놔서 미안해. 그 대신 편히 쉬고 가.”
다시 염준열이 선배로서 말하자 안심이 되었다.
용궁 한복판에서, 그것도 용족과 황지호 앞에서 염준열에게 스승 대접을 받는 건 힘든 일이었다.
“조의신, 네 제자가 말하는 걸 잘 들었나? 이번 기회로 반성했으면 좋겠군.”
“우리 준열이가 저렇게 말했으니 이제 몸을 아끼겠지. 설마 저러고도 또 몸을 함부로 다루겠어?”
“또 비슷한 상황이 나오면 저러겠지. 하지만 반성할 기회는 필요하다.”
염준열이 안내를 시작하자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둘이 신나게 말을 쏟아 냈다.
나는 염준열을 상대하는 데에 심력을 다 쏟았기에 저 둘을 상대하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내 주변을 날아다니며 나를 올려다보는 운룡과 황룡궁에서 기다리던 윤여랑이 마음의 위안이 되어 주었다.
“의신이 오빠! 어서 오세요, 눈은 괜찮아요?”
용왕신의 힘을 빌린 치료 덕에 괜찮았다고 답하자 윤여랑이 아주 밝게 웃으며 다행이라고 답했다.
‘슬퍼하는 대신 저렇게 웃어 주면 좋았을 텐데.’
그간 내가 괜찮다고 하면 별로 기뻐하는 이들이 많지 않아서 속이 쓰렸다.
윤여랑은 염준열과 황지호에게도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윤여랑은 저 둘을 용족의 후예라거나 호족의 수장이 아니라 그냥 은광고 선배로서 대했다.
저 둘에게는 말도 못 붙이는 이가 많은데, 윤여랑은 배경이나 출신, 돌아이력 등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치료를 마친 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여랑이 내 쪽으로 뛰어와서 말했다.
“의신이 오빠 눈 다친 거 때문에 용왕신님도 마음 아파하셨거든요, 그런데 용왕신님 말고도 걱정하는 분들이 많은 거 같아요!”
“……설마 그 걱정하는 분들이 상위 존재야?”
어쩐지 치료 중에 눈에 머무는 힘이 안정되지 않더니, 이 눈에 힘을 준 죽음과 연관된 상위 존재들이 윤여랑에게 접촉했나 보다.
다른 상위 존재를 따르는 무녀에게 함부로 접촉할 수 없을 테니, 아마 용왕신의 허락을 받고 그랬을 거다.
그런데 대체 상위 존재들이 왜 윤여랑에게 접촉한 걸까.
“잘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시더라고요. 최선을 다할게요. 하지만 빨리 잘 치료해 드리고 싶은데 너무 특별한 눈이라 좀 걸릴 것 같아요.”
“천천히 해, 괜찮아.”
“아뇨, 서두를 거예요!”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윤여랑의 힘찬 대답을 마음에 들어 했다.
치료를 마친 후에는 방해가 안 되도록 빨리 용궁을 떠나려 했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황룡이 운룡을 통해 얼굴도 보고, 점심 식사도 하고 가라고 말을 전했기 때문이다.
‘황룡의 얼굴도 안 보고 갈 수는 없지.’
오늘은 치료 중에 황룡이 보이지 않았다.
황룡은 사전에 황룡궁에 힘을 남겨 두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황룡은 계절이 변하기 전에 날씨 대책을 세우느라 바쁜 듯했다.
이를 두고 윤여랑이 이렇게 말했다.
“요즘 학교 행사가 많은데 참가하지 못해서 아쉬워요! 그래도 여름이 오기 전에 날씨 대책을 세워야 하거든요. 비가 자주 오는 시기에는 수기(水氣)에 약한 용족 분들이 힘들어하시니까요.”
그 말을 들으니 나도 걱정이 되었다.
용족은 날씨에 영향을 크게 받는데, 용궁이 심해에서 지상으로 올라왔으니 대비를 해야 할 거다.
염준열만 해도 매일 기상 예보를 확인할 정도로 날씨에 신경을 쓰고, 비가 오면 외출을 자제할 정도가 아닌가.
“의신아, 용궁 건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용족분들과 무녀님들이 대책을 세우고 있어. 네 걱정만 해.”
“준열이가 말을 참 잘해.”
염준열의 말은 따뜻했으나 뼈가 있었고, 용제건은 기다렸다는 듯이 얄밉게 한마디를 거들었다.
용족과 함께 점심을 먹은 후, 0반 선배들을 만나기 위해 이동하려 할 때였다.
[성국언] 의신아, 눈 치료는 잘 받고 있어?
[성국언] 신문부 활동하느라 바쁜 것 같더구나. 조심해.
성국언으로부터 의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