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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책임 (8)
나는 서포터를 택했다.
[나] 서포터 할게.
[도시후] 와, 나 딜러 하고 싶었는데! 그럼 원딜 해야겠다.
[유상훈] 내가 탱커 하니까 노서폿도 가능하긴 한데.
[장남욱] 그러면 상훈이의 부담이 너무 커지지 않을까? 파티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서포터가 필요하다고 했잖아.
탱커 하나, 딜러 셋도 이론상 가능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탱커가 죽어나고 딜러도 꽤 고생한다.
트레일러 영상에서 서포터 없이 홀로 플로어 마스터에 맞서 싸운 유상훈이 빈사 직전에 이르렀던 것처럼 말이다.
그걸 잘 아는 유상훈이 저런 소리를 하다니 내가 딜러를 했으면 하나 보다.
그래도 내 최우선 순위는 서포터였다.
‘장남욱이 서포터를 고르면 원거리 딜러를 할 생각이었는데, 잘됐어. 서포터는 맵을 넓게 보고 동료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쉬워.’
탱커나 근거리 딜러의 경우, 적의 움직임에 따라 최전선에서 대응해야 하기에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해야 한다.
이에 비해 서포터나 원거리 딜러는 동료의 위치나 지형상의 이점을 활용해서 싸워야 하기에 상대적으로 시야가 넓어진다.
같이 게임을 하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보고 싶었기에 넓게 보는 직업을 택하고 싶었다.
[도시후] 마법 쓰는 직업 골라야지.
[장남욱] 전기 쓰는 마법사 고를 거야? 시후는 전기술을 쓰니까 더 빨리 적응할 수 있겠다.
[도시후] 아니, 딴 거 할 거야! 게임이니까 현실에서 못 하는 걸 해 보려고.ㅎㅎ
[도시후] (사진)
[도시후] 이걸로 할게!
도시후가 찍은 스크린샷에는 어두운색의 로브 차림을 한 묵직한 인상의 ‘흑마도사’가 있었다.
초기 직업 중 전직하는 과정이 가장 까다롭고 방어력이 낮아 죽기 쉬운 캐릭터라 들었는데, 게임에 자신이 있는 걸까.
일반적으로 원거리 딜러는 사정거리가 넓은 대신 유리 같은 방어력과 체력을 가졌기에 지형을 잘 보고 동료를 방패로 삼아 위치를 잡고 공격해야 한다.
흑마도사를 골랐다면 한 대를 맞고 골로 갈 수 있기에 항상 조심해야 할 거다.
서포터는 다른 의미로 주변을 잘 봐야 한다.
‘서포터는 원거리 딜러와 달리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살리기 위해서 주변을 잘 봐야 해.’
서포터는 동료에게 버프를 주고, 적이 건 디버프를 해제하고, 체력을 회복시키거나 여차하면 대신 큰 기술을 맞아 주어 딜러를 지켜야 한다.
딜러 혼자 남았다면 적을 쓰러뜨릴 수도 있으나 서포터만 살아남은 상황에선 클리어를 기대하기 힘들다.
공격력이 높은 하이브리드 타입의 직업이거나 동료를 부활시키는 능력이 있는 서포터라면 모를까,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기믹이 있거나 오래 버티면 승리하는 스테이지가 아닌 한 서포터가 딜러 대신 죽어 주는 게 낫다.
동료를 잘 지켜보고, 생존을 책임진다는 점에서 나는 서포터를 택했다.
‘언젠가 장남욱, 유상훈 그리고 도시후도 싸워야 할 때가 올 수도 있어. 그때를 대비해서 싸우는 방식을 봐 두는 게 좋겠지.’
게임을 하다 보면 성격이 보인다는 말이 있다.
플레이어가 이런 류의 게임을 할 때에는 싸울 때의 버릇이 나온다고 한다.
직접 전투하는 걸 보느니만 못하겠지만, 아예 안 보는 것보다 나을 거다.
가능하면 싸우게 하고 싶진 않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최적의 수를 두고 싶었다.
[유상훈] 서폿 직업 중 뭐 할 거냐?
서포터만 한다고 하고 무슨 직업을 골랐는지 아직 말을 안 했었다.
나는 직업명을 밝혔다.
[나] 음유시인 골랐어.
내 화면에는 마법으로 구현한 켈틱 하프를 들고 있는 캐릭터가 떠 있었다.
서포터 계열 직업 중 무난한 직업을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유상훈이 웃어 댔다.
[유상훈] ㅋㅋㅋ
[도시후] 아ㅎㅎ
[장남욱] 시후 말대로 게임에서는 현실에서 못 하는 걸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게임 속에서 연주할 때에는 덜 고생할 거야.
장남욱은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저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유상훈은 웃은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영상을 하나 올렸다.
[유상훈] (영상)
[유상훈] 가끔 본다ㅋㅋㅋ 플젯에선 연주 잘해라.
[도시후] 만물 사용으로는 악기 연주가 안 되나 봐ㅎㅎ
[장남욱] 만물 사용의 효과는 모든 무기와 방어구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거랬어. 에너미를 공격할 수 있는 이능 악기라 해도 분류는 악기니까 사용이 안 되지 않을까?
영상에는 작년 축제에서 뻣뻣한 자세로 기계처럼 트라이앵글을 치는 내 모습이 찍혀 있었다.
유상훈은 저 영상을 아직도 가지고 있나?
딱히 음악에 특별한 열정이 있거나 연주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서 음유시인을 고른 건 아니다.
음유시인이 경험치를 쌓으면 택할 수 있는 2차 전용 직업, ‘전설의 재담가’를 골라 넓은 범위의 통찰계 스킬과 버프를 쓰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유상훈은 내 변명을 들을 생각도 없는지, 내가 광림을 정할 때까지 실컷 웃었다.
저놈이 진정한 건 전원 캐릭터를 다 만든 후였다.
[유상훈] 캐릭터 다 만들었으면 프롤로그 깨러 ㄱ
[유상훈] 다 깨고 ‘시작의 초원’ 오면 파티 초대한다.
캐릭터 작성을 완료한 후, 프롤로그 겸 튜토리얼이 시작되었다.
프롤로그가 시작되는 곳에는 ‘이세계에 온 플레이어’라는 설정에 몰입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인지, 다른 유저들이 보이지 않았다.
프롤로그에서는 짧은 스토리를 통해 이세계 제타(Zeta)의 세계관을 익히고, 조작법을 배운다.
‘유상훈은 튜토리얼은 본편에 비해 재미가 없다고 했는데…… 재밌네.’
시작부터 조작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고 불리한 전장에 내던져서 죽여 버리는 ‘이름 없는 조연의 튜토리얼’과는 비교도 하기 미안할 만큼 차이가 났다.
내가 캐릭터 작성 시 택한 직업을 정식으로 얻으며 프롤로그가 끝난 시점엔 이미 한 시간이 넘게 흐른 후였다.
갓겜은 튜토리얼조차 재밌다더니, 사실이었다.
‘게임을 처음 할 때에는 새로운 몸을 사용하는 것처럼 적응도 안 되고 어색한데, 직관적으로 잘 만들었어.’
플마고를 처음 할 때 했던 고생이 떠올라 괜히 분했다.
분한 탓에 플마고 정도로 깊게 파고들진 않을 것 같다.
다른 애들에게는 이런 분한 마음이 없었기에 그냥 갓겜을 만끽하고 있었다.
[도시후] 남욱이 좀 울 뻔함ㅎㅎ
[장남욱] 플레이어가 제타로 이어지는 문을 여는 데에 성공해서 갇혀 있던 분들이 해방됐을 때에 많이 감동했어. 문이 열릴 때 연출을 보고, ‘문을 연 자’로서 보상으로 제타인으로서의 적성을 얻으니까 정말 내가 이세계에 온 듯한 기분이 들더라.
장남욱은 스토리에 몰입해서 프롤로그를 클리어한 듯하다.
정작 게임을 권한 유상훈은 스토리나 설정은 적당히 보고 전투 쪽을 철저하게 파고들었다.
이 둘과는 또 다르게 도시후는 게임 분위기와 같이 게임 하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셋 중 누가 제대로 게임을 즐기고 있느냐는 따질 필요가 없었다.
잘 만든 게임은 다양한 방식으로 즐겨도 재미있었다.
[유상훈] 왔냐? 지금부터 메인 스토리 퀘스트 할 때에도 파티 짜서 할 수 있음.
[장남욱] 빨리 가자! 초원에 은거한 현자가 ‘문’에 관해 알고 있다고 했어.
의욕이 넘치는 둘을 따라 첫 번째 메인 스토리를 시작했다.
이어지는 퀘스트를 따라가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렀다.
의외로 컨트롤을 잘해 초반 전투에서 대활약하던 도시후가 죽을 뻔한 걸 유상훈이 앞을 막아서 몇 번이나 살려 냈다.
또, 유상훈이 도시후를 보호하는 사이 혼란 상태에 빠진 장남욱을 내가 하프로 때려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기도 했다.
시작의 초원을 전부 불사르고 악신을 소환하려던 현자의 음모를 저지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뜰 시각에 가까워져 있었다.
[도시후] 와, 해 뜨고 있어.
[장남욱] 뭐라고?
도시후의 말에 장남욱이 기겁했다.
유상훈 덕에 이동 시간, 전투 시간이 단축되는 바람에 그런지 시간의 흐름을 잘 못 느꼈는데, 나도 조금 놀랐다.
[장남욱] 진짜 날이 밝고 있어. 말도 안 돼. 얘들아, 자러 가자!
[유상훈] 조금 자나 안 자나 똑같을 텐데.
[장남욱] 안 똑같아! 상훈아, 너는 아침 훈련도 있잖아. 그럼 이만 끌게. 바로 자.
장남욱은 조금이라도 자라고 신신당부하고 로그아웃했다.
유상훈은 그냥 잠을 안 자고 더 게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다른 아이들과 게임 진도를 맞출 생각에 순순히 물러났다.
나도 장남욱의 말에 따라 조금 자고 일어나서 기사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조의신, 할 얘기가 있다.”
등굣길에 오르자마자 황지호가 불렀다.
오늘은 종일 게임 얘기를 해 댈 유상훈한테 먼저 붙잡힐 줄 알았는데, 황지호가 한발 빨랐다.
아침부터 황지호가 불쑥 나타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인적이 드문 빈 교실로 이동한 데다 평소보다 결계가 두꺼워.’
결계를 친 후, 황지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밖에서는 표정을 감추고 있었나 보다.
“은호가 운사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청호의 육신이 그자의 손에 있다더군.”
과연 황지호가 저렇게 행동할 만한 소식이었다.
수천 년간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친우가 인간이 되고, 또 그 육신은 흑막의 손에 있다는데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청호는 그저 인간이 된 게 아니었구나.’
백호군은 웅족 수장의 오른팔이라던 흉내꾼과 대련하는 대가로 청호와 신인의 행방을 들었다.
웅족은 청호와 신인이 인간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웅족은 그 둘이 각각 한이와 공청훤이라는 건 모르는 듯했다.
알고 있었다면 그 둘이 살아서 은광고에 다니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나 운사는 신인에 관해 듣지 못했다고 한다. 신인의 육신이 있다면 운사를 흔들기 좋았을 텐데 말이다.”
나도 황지호와 같은 생각이었다.
운사를 정신적으로 압박하려면 청호보다는 신인을 언급하는 게 더 효과적이었을 거다.
흑막은 청호의 육신만을 확보했다고 추측되었다.
‘청호의 육신이 흑막의 손에 있다면, 한이의 존재는 뭐지?’
청호와 신인이 인간이 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황지호는 이런 말을 했다.
―인간과 혼혈이었던 신인은 인간이 되기 쉬웠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청호는…… 대체 무슨 대가를 치른 거지? 인간과 진족은 근본부터 다른 것을.
청호와 신인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인간이 된 게 아닐까?
그래서 청호의 육신은 이 땅에 남았고, 한이는 공청훤보다 큰 대가를 치렀을 가능성이 있다.
전에 황명 그룹의 힘을 이용해 한이의 혈육을 찾아보았으나 실패했다는 말도 같이 떠올랐다.
“은호는 그 후에는 신인과 청호에 관해 듣고자 했다. 그중 은호가 마음에 걸린 부분이 있다고 하더군.”
은호와 운사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은호는 운사로부터 말을 이끌어 내기 위해 새어 나가도 문제없을 정보를 흘렸다고 한다.
―그런데…… 청호는 전투 중에 붙잡힌 게 아니라 그냥 사라졌다고? 신인과 함께?
―네, 사라지기 전 청호 님께서 ‘신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네요.
마치 신인과 청호가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저버리고 떠난 것 같은 말이었다.
실제로 저들은 인간이 되어 나타났기에 저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은호는 신인과 청호가 인간이 되었다는 말을 숨겼는데, 그래서 그런 건지 운사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신인께서는 호족과 인간을 몹시 아끼셨어. 책임보다 소원을 우선하실 분이 아니야.
순진하게도 풍백과 우사를 믿었던 운사의 말이니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은호도 저 말에 공감했기에 황지호에게 전했을 것이다.
소원이라는 말을 들으니 문득 용궁에서 있던 일이 생각났다.
무녀들은 용족을 배신하고, 용궁을 파괴하려 하고, 황룡을 이무기의 비늘에 침식시키고, 괴물을 부르고, 흑막과 손을 잡았다.
한 행동은 여러 가지였지만, 무녀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용족의 멸망이 아니라 불로장생이었다.
목적으로 보이던 것이 수단에 불과했던 셈이다.
‘어쩌면 인간이 되는 건 수단에 불과하고, 진정한 소원은 따로 있던 게 아니었을까?’
신인과 청호에게는 인간이 되지 않는 한 이룰 수 없는 소원과 다할 수 없는 책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