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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포스트모템 (1)
곽경구와 일전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기사가 올라왔다.
은호가 작성한 기사에는 주요 장면이 담긴 고화질 사진과 분할된 영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정된 사진과 영상은 여러 개의 기록 기기에서 촬영된 것인지 구도가 다양했고, 시각 자료와 알맞게 작성된 기사는 심도 있는 분석, 이능파와 스킬 운용에 관한 예리한 고찰이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나와 곽경구의 능력, 주요 스킬에 관한 설명은 모호하여 기사를 통한 전력 유출을 막은 게 참 절묘했다.
‘바쁠 은호가 이렇게 정성 들여 기사를 써 주다니.’
은호가 운이 좋아서 내 기사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운이 좋은 건 내 쪽 같다.
이런 훌륭한 기사를 쓰는 후배가 나를 담당한 게 참 고마웠다.
기사를 끝까지 읽고 난 다음, 밑에 첨부된 링크와 설명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이 기사 자체도 완성도가 높았는데, 설명에 의하면 완전판 기사가 따로 있다고 한다.
‘……분량이 적지 않은데 완전판은 따로 있다고?’
마지막 줄에 첨부된 링크를 누르자 몇 배는 더 긴 분량의 완전판 기사로 이동했다.
기사 분량과 내용에도 놀랐지만, 조회수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굳이 이 긴 완전판 기사를 따로 읽는 사람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이걸 다 읽었나 싶어서 댓글을 확인해 봤는데, 그 수가 상당했다.
[그냥 심심해서 봤는데 홀린 듯이 읽었음; 기사 잘 썼다…….]
[작성자 이름 안 봐도 누가 쓴지 알겠다. 요새 무명의 초신성이나 안중지계 기사는 얘가 다 쓰네.]
[개 좋아 계속 얘나 문새론이 써 줬으면 좋겠어]
[우리 반에 신문부원 있는데ㅋㅋㅋㅋㅋ 담엔 지가 쓸 거라고 뭐라 하더만 어림도 없을 듯ㅋㅋㅋㅋ 1학년 3반 소속 모 신문부원은 이 댓글 보면 시험 공부나 해라ㅋㅋㅋㅋㅋ]
[↑너 나랑 에너미학 개론 듣는 놈이지? 이번 기말 40점 미만 기원^^ㅗ]
[↑후배님들…… 에너미학 개론이면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40점 못 넘을 수도 있어요.ㅠㅠ 싸우지 말고 공부하러 가세요…….]
[↑경험담임? 수강생이면 족보 공유 좀]
[↑공청훤 선생님 수업에는 족보가 의미 없어요……. 협회에서 업데이트된 최신 에너미 정보도 시험에 나오는 거 알죠? 전 족보 믿었다가 추가 시험 봤어요…….]
[얘가 누군데?]
[↑선도부장 동생, 1학년 수석, 0반 부반장 천은하.]
[↑아…… 얘가 걔구나.]
[항공샷 영상 원본은 어디 올라와 있어요???]
[↑(링크)]
[↑감사합니다!!]
시험 기간 돌입 직전이라 다들 심심한 걸까?
기사와 관계없는 내용도 잔뜩 쓰여 있었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건 은호가 기사를 잘 써서 그런 듯했다.
기사만 봐도 은호가 썼다는 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과연 능력 있는 후배가 쓴 기사라 그런지 주목도가 남달랐다.
대체적으로 기사 자체나 아무 말을 늘어놓은 댓글이 많은 편이었으나 순수히 경기에 관한 코멘트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둘 다 잘 싸웠다, 선발이 확정된 상태라서 그런지 대놓고 봐주면서 했다, 재미가 없다, 본실력이 다 안 나왔으니 교류전이 기대된다, 후반에 둘 다 집중을 못 한 것 같다…….’
뼈아픈 말도 적게나마 섞여 있었다.
댓글수는 적지만 내가 마지막에 검에서 이능파를 거둔 걸 두고 의견이 갈려 있었다.
은호는 승패가 가려진 마지막 순간에는 별도의 해석을 덧붙이는 대신 그냥 과정과 결과만을 서술했기에 더 말이 많았다.
이능파의 총량, 집중력 부족으로 내가 어쩔 수 없이 이능파를 거둔 거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곽경구가 다칠까 봐 의도적으로 거뒀을 거라는 의견을 쓴 사람도 있긴 했지만, 상대의 무모한 방어를 너무 늦게 알아챘다는 말도 덧붙여져 있었다.
‘그렇게 보였나 보구나.’
겉보기에는 왼눈이 멀쩡한 탓일까, 잘 보이지 않아서 상황 판단이 늦은 게 그냥 집중력 부족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억울한 마음이 조금 들긴 하나 냉정하게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이긴 했다.
‘왼눈이 다친 게 드러나는 것보단 나아. 은호도 그걸 노리고 기사를 쓰고, 공개할 영상을 한정하겠다고 했지.’
은호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내 손을 살피며 기사를 어떻게 쓸 건지 말해 줬다.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곽경구의 검을 이능파 없이 받은 탓일까.
진찰한 은호의 말로는 피부 밑 근육이 손상되고 이능파의 흐름이 조금 흐트러졌다고 한다.
―의신이 형이 무슨 의도로 그런 선택을 하신 건지 알아요. 하지만 몸을 사리셔야죠. 의신이 형과 아픔을 공유하겠다고 일부러 손을 다치는 분이 나오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내 손의 상태를 점검한 은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지만, 대놓고 부정할 수 없었다.
왼눈을 다친 후에 용궁에서 비슷한 소리를 들었던 탓이었다.
착한 제자 염준열은 스승이 다치면 뒤늦게라도 아픔을 공유할 거라고 말했다.
‘황지호가 염준열이 한 말을 전한 건가.’
은호 뒤에 있는 늙은 호랑이가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내 생각대로인 것 같았다.
그걸 두고 뭐라 말하면 몇 배나 되는 잔소리가 돌아올 듯하여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늙은 호랑이보다는 염준열에게 다친 걸 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눈을 잃은 것에 비해선 하찮은 부상인데 이걸 굳이 전해야 할까?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손을 일부러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고민하고 있는 사이 은호의 말이 이어졌다.
―학생부회장은 대련 중 집중을 하지 못했으니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의신이 형의 눈 상태를 눈치채는 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어요. 영상을 공개할 기록 기기를 한정하고, 기사를 통해 대중이 주목할 부분을 조정해야겠어요.
은호가 말한 조정의 결과, 댓글에는 쓸데없는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이 적혔다.
어찌 됐든 경기와 기사가 이렇게 큰 관심을 받았는데도 내 왼눈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은호의 목적은 성공했다.
그런데 어느 선배놈들이 보낸 디바이스 메시지를 보니 은호는 기사를 작성한 것 외에도 바삐 움직인 듯했다.
[금찬솔] 님, 야유 날리려던 놈들 중에 딴 학교에서 심은 프락치 발견해서 쫓아냄. 국적도 다른 주제에 교복 입고 은광고생인 척하다 우리한테 걸림.
[왕찬솔] 1학년 0반 부반장 후배놈도 그 첩자 찾으려던 거 같던데, 우리가 먼저 찾았다.
[금찬솔] 생색 내려고 말한 거야. 1학년 후배놈들이랑 싸우게 되면 우리 편 들어!
[왕찬솔] 제갈 쌤한테 뭔 일 있으면 제일 먼저 우리한테 알려 주고!
금찬왕찬이 말하는 후배놈이란 착한 1학년 0반 아이들을 말하는 걸까?
두 살이나 어린 후배들을 싸우겠다고 선언하는 것도 그렇고, 또 그걸 편들어 달라 하는 걸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저래서야 누가 선배고 후배인지 알 수 없었다.
생색내는 소리는 듣지 못한 걸로 하고 전후 사정을 물었다.
금찬왕찬의 말에 의하면 타 학교에서 은광고의 분위기를 망치고 사기를 내릴 생각으로 끄나풀을 심어 두었다고 한다.
‘그저 야유를 보내는 건 시작에 불과했겠지. 시간이 흐르면 소문을 내고, 선발로 뽑힌 이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손을 대며 컨디션을 무너뜨리려 했을 거야.’
사복을 입고 야유를 하면 눈에 띄니 은광고 교복을 구해서 입고 그 짓을 한 걸까?
황지호와 은호는 그걸 알아채고 색출 작업을 한 듯한데, 금찬왕찬이 먼저 찾아냈나 보다.
‘저 선배놈들이 무슨 재주를 부렸기에 호족 보다 먼저 끄나풀을 찾아낸 거지?’
이 생각을 아주 정중하게 정리해서 묻자 금찬왕찬이 이렇게 답했다.
[왕찬솔] 야유에 진정성과 혼을 싣지 않고 뱉는 놈들이 있었어.
[금찬솔] 맞아,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대답을 듣긴 했으나 미친 자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이후의 일에 관해선 호랑이들에게 물어봤다.
예의 그 끄나풀은 은광고 교복을 입어 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기록 기기 확인 결과 학생들의 디바이스를 훔치려다 실패한 게 드러났다.
결국 그들은 황명 재단에 의해 결계 밖으로 쫓겨나고 영구 출입 금지 조치를 받았다.
타 학교에선 ‘일부의 독단’으로 단정 짓고 규정에 따라 처벌했는데, 실제로 일부의 독단인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이번 사건의 배후를 캐던 적호가 이런 말을 했다.
―실제로 ‘일부’의 독단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중일 교류전을 두고 국제 플레이어 전문 배팅 사이트에서 내기가 시작되었더군요. 아직 교류전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큰 금액과 플레이어 포인트가 걸렸습니다.
―협회의 공인을 받은 사이트는 아니겠군.
―물론입니다. 한중일 교류전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황지호는 매우 불쾌해하긴 했으나 웃으며 물었다.
―은광고의 결계를 통과할 만한 자를 이용하면서까지 수고를 들인 걸 보니 배당률이 높게 걸렸나 본데.
―얼마 전까지는 나름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만, 스타 플레이어 염준열과 주수혁의 경기로 배당률이 기울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에게 건 자들이 견제할 겁니다.
역시나 놀라운 무위를 선보인 둘의 대결이 예상치 못한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앞으로 두 학교는 물론이고 그 둘에게 돈을 건 자들을 상대해야 한다.
이번 교류전은 한국에서 치러지기에 가뜩이나 은광고는 견제를 받는 처지인데, 상대할 자들이 더 늘어났다.
‘상대할 자가 많으면 수련하기 좋을 테니 잘됐어. 하지만 그저 좋아할 수만은 없어.’
그저 교류전에서 질 가능성이 커져서가 아니다.
최근 벌어진 사건들을 고려해 봤을 때, 변수가 늘어나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 걱정 때문에 한중일 교류전을 중지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은 머릿속에서 수를 정리하며 지켜보는 길을 택했다.
한편, 허채아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서포트 부문에서 추가 모집이 이루어졌고, 박승현이 뽑혔다.
‘예상 대로 작년 개막식을 언급하니 바로 추가 모집에 응했어.’
박승현은 ‘나와 비슷한 힘을 아주 강력하게 다루는 사람’을 흉내 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건 백호군이 작년 개막식에서 검무를 출 때 광림을 쓴 나를 가리키는 거였다.
박승현과 잡담을 할 때, 이번 교류전의 개막식이 기대된다고 언급하자 바로 눈빛이 변했다.
어쩌면 올해에도 비슷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여긴 건지 의욕을 보였다.
올해 또 개막식 중에 내가 광림을 쓸 가능성은 적지만, 우선 박승현을 선발로 뽑았으니 됐다.
‘……그리고 의도하진 않았지만 마진승도 후보에 들었지.’
마진승은 추가 모집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지원했다고 한다.
딜러 부문인지, 서포터 부문인지 확인도 안 하고 지원한 바람에 현장에서 몹시 당황했다고 하나 나름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 결과, 뽑히지는 않았으나 예비 후보로 뽑혔다.
예비 후보는 선발 멤버가 개인 사정이나 사고 등으로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부전패 당하는 상황을 막기 위한 제도로, 예비 후보가 실전에 나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래도 마진승은 합숙 훈련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주말이 지났을 때에는 선발전의 여파가 다소 가라앉았으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선발전은 무사히 끝났는데, 아직 큰 고비가 남았어.’
선발전보다 더 큰 위협이 은광고 학생들 앞에 다가와 있었다.
무사히 선발전이 마무리된 직후.
은광고는 1학기 기말고사 준비 기간에 돌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