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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포스트모템 (2)
시험 시작까지 3주가 남은 시점.
기말고사 준비 기간에 돌입하자 본선의 열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은광고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해가 길어지고, 기온은 올라가는 것과 달리 학생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런 경향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두드러졌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바로 유상훈이었다.
“야, 로그인만 하지 말고 일일 퀘스트도 해. 안 하면 손해야.”
유상훈은 여전히 PlayerZ를 하고 있었다.
스토리에 몰입하여 즐기던 장남욱은 칼같이 게임에 접속하지 않게 되었으나 유상훈은 달랐다.
유상훈은 우리와 진도를 맞추겠다고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매일 새로 갱신되어 랜덤하게 경험치, 강화 재료 등을 주는 일일 퀘스트와 굳이 깨지 않아도 되는 서브 퀘스트를 하는 중이다.
나는 저런 퀘스트를 하진 않아도 로그인을 하면 주는 재화를 받기 위해 매일 몇 초 정도만 켰다가 끄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 짧은 시간 마다 항상 유상훈이 접속해 있었지.’
내가 로그인 보너스를 받기 위해 접속했다는 걸 알면서도 유상훈은 꼬박꼬박 말을 걸곤 했다.
그리고 유상훈 외에도 도시후가 말을 걸었다.
도시후는 유상훈 정도는 아니지만 자주 접속해서 같이 논다고 한다.
그 바람에 둘은 제법 친해진 모양인데, 시험 기간에 저러고 있어도 될지 모르겠다.
장남욱은 이를 두고 내게 상담을 청했다.
[장남욱] 시후더러 게임하는 걸 자제하라고 설득하려 했는데, 오히려 전보다 공부하는 시간은 늘어나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안 하던 게임을 하게 되었는데 공부를 더 하게 됐다는 게 뭔 소린가해서 다시 물어봤다.
[장남욱] 시후는 원래 평소에 공부를 하고 시험 기간에도 비슷한 페이스를 유지해. 이번에는 전과 달리 게임을 하고 있긴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걸 보고 공부하는 시간을 그만큼 늘렸어.
[장남욱] 게다가 시후는 줄곧 1등만 했으니까, 내가 뭐라고 할 수 없는 처지야. 요샌 상훈이랑 친해졌다고 기뻐하기도 하고 그만큼 공부할 때 더 집중하고 있어서 말리지 않으려고 해.
[장남욱] 그래도 게임하는 시후를 보고 다른 애들이 의욕을 잃을 수도 있어서 적어도 안 보이는 곳에서 게임을 하도록 권유할까 생각 중이야.
장남욱은 도시후가 게임하는 걸 그냥 지켜보기로 한 듯하다.
게임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다면 굳이 말릴 필요가 없긴 했다.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지금 잘 하니까 게임을 안 하면 더 잘 하겠지’라고 생각해 괜히 욕심을 내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나도 한때 플마고를 억지로 접으려다가 집중력이 좀 흐트러진 때가 있었어. 그런데 유상훈한테는 긍정적인 영향만 있을지 의문인데…….’
유상훈은 현재 PlayerZ 공략 커뮤니티의 유명 인사다.
트레일러 영상에서 탱커와 VR 플레이의 로망을 보여준 유상훈은 ‘방패병’이라는 이름으로 유명세를 탄 상황이었다.
그리고 PlayerZ에는 게임 내에서 최초로 무언가를 했을 때, 서버 전체에 메시지가 뜨는 시스템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방패병’의 이름이 몇 번이나 전체 메시지에 뜨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상훈의 게임 실력을 고려했을 때, 높은 희귀도 레이드의 첫 번째 공략 멤버로서라고 생각했는데.’
유상훈은 현재 우리와 진도를 맞추느라 엔드 콘텐츠의 근처도 가지 못했다.
게다가 시험 기간에 가까워지고 우리가 접속을 안 하자 유상훈은 할 게 없어져 자신의 레벨에 맞는 필드를 여기저기 탐색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유상훈은 숨겨진 모험 요소를 몇 번이나 최초로 발견하게 되었다.
유상훈은 아무 단서도 없이 실종된 NPC ‘잊힌 숲의 정령’을 우연히 구출하여 접근 금지 장소였던 ‘죽은 숲’을 살려 내는 데에 성공해 게임 전체의 탐험 가능한 장소를 확장시키고, 막힌 수문을 부수어 말라 가던 마을을 되살려 NPC들과 상점에서 취급하는 상품을 대폭 증가시켰다.
이 이벤트는 다른 플레이어도 다시 할 수 있지만,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영웅의 동상에는 ‘방패병’이라는 이름이 새겨졌다.
‘현재 유상훈이 머무는 대륙은 게이머들에게 있어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필드야. 레벨이 오르면 다음 콘텐츠를 즐기느라 돌아보지 않는 지역 중 하나지.’
몇 번이나 그런 사건이 터진 결과 유상훈에게는 무수한 친구 추가 요청과 귓속말이 쏟아졌다.
유상훈은 귓속말, 친추 거부 상태로 설정해 뒀으나 그 넓은 맵과 수많은 서버를 뒤져 방패병을 찾아내어 귀찮게 구는 이들이 생겼다.
그들은 팬이라면서 커뮤니티에 인증샷을 올려 달라, 방송해 달라고 드러눕곤 했다.
‘글 올릴 시간에 게임하는 게 낫다고 하는 놈인데 그런 걸 할 리가 없지.’
유상훈은 게임 커뮤니티에 가입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글을 올릴 마음도 없었으며 방송을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유상훈이 최초로 클리어한 퀘스트에 도전해 보려 해도 도저히 깰 수 없다며 징징거리는 사람이 늘어났다.
유상훈은 PlayerZ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귀찮음을 감수하고 뭔가 할까 말까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늘 메시지에 자음만 대충 치던 유상훈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긴 문장을 작성할 정도였다.
[유상훈] 저러다가 접으면 어떡하냐. 뭐라도 해야지.
PlayerZ의 동접자 수와 매출액을 보고도 그런 헛소리가 나오나?
거꾸로 매달아 놔도 매달린 채로 PlayerZ을 할 충성심 높은 유저가 넘쳐나는 데 뭔 소리를 하는 건가.
지금 이 갓겜은 여태까지 나온 게임의 기록들을 다 갈아치우는 중인데도 유상훈은 저런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플마고는 한 번도 잘나간 적이 없어서 유상훈의 처지에 공감은 전혀 안 갔지만, 다른 유저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했다.
[유상훈] 영상 녹화해 둔 거 있어서 그냥 업로드하면 될 듯?
[장남욱] 공략을 공유하는 건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상훈아, 시험 공부는 하고 있는 거지? 요새 상훈이가 플젯만 한다고 상희 누나가 많이 걱정하고 있어. 추가 시험 보게 되면 게임할 시간이 없어질 테니까 공부도 하면서 해.
[유상훈] 40점은 넘길 예정.
[장남욱] 40점이면 겨우 낙제를 면하는 정도잖아!
이제 유상훈은 평균 40점 황지호의 라이벌이 되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다인이 3학년에는 특별반에 저놈이 왔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던 것 같은데, 최근 모습을 보고 포기한 것 같았다.
이미 중간고사를 시원하게 말아먹었기에 특별반 입성은 물 건너갔고, 기말고사도 저 꼴이니 끝났다.
그래도 저렇게 게임에 시간을 갈아 넣어도 40점은 넘을 만큼 여유가 있는 건 긍정적으로 보기로 했다.
게임에 열정을 쏟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라서 조금은 돕기로 했다.
[나] 내가 영상 편집할게. 그러니까 적어도 유상희 선배님 앞에선 공부해.
[도시후] 나도 영상 편집 도울게 ㅎㅎ
유상훈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게임 공략 영상에서도 편집이 중요한데, 유상훈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잘 만든 공략 영상 덕분에 뉴비의 진입 장벽이 낮아지고 기존 유저들도 게임을 편하게 접하며 더 오래 버티는 거다.
나는 이 점을 열심히 설명하고 장남욱은 내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유상희의 근심을 덜어질 거라 생각하는지 내 말에 찬성했고, 도시후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3대1의 처지에 놓인 유상훈은 결국 항복하였다.
[유상훈] 알았으니까 대충 만들어라. 아님 시험 기간 끝나고 하든가.
협상에 성공하여 유상훈을 현실에 조금 더 오래 붙잡아 두는 데에 성공했다.
유상훈 건은 대충 처리가 되었으나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다.
우리 반에는 유상훈과 달리 시험 기간 내내 책상 앞에 붙어 있어도 낙제할 가능성이 있는 애들이 있었다.
바로 맹효돈과 권레나였다.
그리고 목우람으로부터 맞춤 과외를 받는 권레나 보다 맹효돈의 상태가 심각했다.
“…….”
창가에 앉은 맹효돈이 햇빛을 맞아 녹아내리고 있었다.
돌멩이도 햇빛을 받으면 녹을 수 있나 싶었는데, 그냥 땀을 많이 흘려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효돈이는 다른 과목은 괜찮을까요? 수학 말고도 어려운 과목이 많잖아요.”
“공통 과목 중 플레이어 이론이 좀 까다롭긴 한데, 다른 선택 과목은 괜찮을 거야.”
“쟤 나랑 수업 많이 겹쳐. 선택 과목은 대부분 몸 쓰는 거야.”
맹효돈은 수학을 제외하면 대부분 전략적으로 수업을 선택했다.
그 바람에 학업에 뜻이 그리 없는 독고미로와 과목이 많이 겹쳤다고 한다.
두 사람은 항상 실기에서 만점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번 시험에서 둘 중 누가 위냐고 묻냐면 독고미로 쪽일 것 같다.
‘독고미로는 에너미학이나 수학처럼 시간을 많이 뺏는 과목을 택하지 않는 바람에 연습할 시간이 많았어. 게다가 최근엔 공청훤에게 부탁해서 트레이닝을 받는 중이라고도 했지.’
서로 봐주면서 했다고 하지만, 패왕 독고미로께서는 안다인에게 진 게 그리 달갑지 않은 듯했다.
독고미로는 대표로 뽑힌 후에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주겠다며 훈련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가끔 몸을 풀지 않으면 머리가 안 돌아가잖아. 같이 실기 연습할래? 한이도 같이 하자! 응?”
맹효돈은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데에 반해 독고미로가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주변 공기가 화사해지는 것 같았다.
같은 햇빛 아래에 있다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독고미로는 자연스럽게 한이를 끌어들였지만, 한이는 고개를 저었다.
독고미로는 한 번 더 권하려고 했지만, 한이의 얼굴을 보고 멈추었다.
“……같이 연습하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얘기해, 알았지?”
“응.”
“너무 무리하지 말고. 부반장이 사 온 쿠키 중에 설탕 대체품 쓴 거 있더라. 지금 먹자!”
한이의 안색이 평소보다 창백했기에 독고미로가 더 떼를 쓰는 대신 간식을 권했다.
공청훤의 ‘이계 환경과 에너미 생태’ 과목은 중간고사 보다 더욱 범위가 넓어지는 바람에 같은 과목을 수강하는 이들의 얼굴은 대부분 저렇긴 했다.
‘그래도 시험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공청훤이 말한 한이의 꿈이 생각났다.
나와 은호는 한이의 꿈에 등장하는 상위 존재가 천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최근 있었던 사건 덕에 무언가 변화했을지도 모른다.
‘청호의 육신에 관해 호족이 알게 됐으니 천신도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한이에게 직접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확인할 수 없었다.
멍해 보이는 한이와 연신 밝게 웃으며 먹을 것을 권하는 독고미로를 바라봤다.
그렇게 시험 기간이 한창일 때, 황지호가 나를 불러냈다.
황지호는 쓸데없는 말을 잘 하지만 보통 실없는 소리는 반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도 해대므로 중요한 일인가 싶어서 바로 응했다.
결계를 친 황지호가 말했다.
“적호와 김신록이 성형우의 시신이 거쳐 간 장소를 확인했다.”
“전부? 오래 걸릴 거라고 들었는데.”
성형우의 시신에 남은 정보를 분석에는 긴 시간이 소요될 거라고 들었다.
시신이 국내에만 있던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밖은 호족의 영향력이 떨어지니, 그만큼 분석하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대체 어떻게 성형우의 시신을 데리고 국경을 넘은 건지 알 수 없지만, 흑막은 진족인 무지기를 봉인한 채로 바다를 넘은 적도 있는 듯하니 불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아직이다. 다만 미리 알려 두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중간 보고를 할 정도면 중요한 정보인가 보다.
황지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성형우는 청호의 도복 띠가 발견된 장소를 거쳐갔더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