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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포스트모템 (3)
흑막에게 청호의 육신이 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성형우의 시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 도복 띠는 청호의 육신과 같이 있던 거겠지. 그렇다면 청호와 성형우가 같은 장소에 있던 건가.’
호족이 그리 기뻐하지 않을 것 같은 가설이 떠올랐다.
성형우의 광림을 고려하면 그리 좋은 예감이 들지 않았다.
우선 확인해야 할 사항에 관해 묻기로 했다.
“운사가 있던 위치와 비교하면 어때?”
“같은 곳을 거쳤다.”
“시기를 알 수 있어?”
“구체적인 시각을 특정 지을 수 없다만,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공간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더군.”
운사, 성형우 그리고 청호의 도복 띠가 가까이에 있었다.
우연은 아닐 거다.
흑막은 저렇게 가치가 높은 수들을 한자리에 모아 두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흑막은 차근차근 수를 쌓아 상대의 숨통을 조이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도록 만드는 걸 선호했다.
그러니 한 수만에 역전되는 상황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은 사방팔방으로 나눠 두고, 곳곳에 가짜 단서를 숨겨 상대의 머리를 헤집었다.
TC 연구소에서 발견된 게 무지기뿐이었다는 게 그 사례였다.
‘한자리에 모아 둔 후 관리하고 이용하는 걸 선호했다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무지기와 운사가 같이 있었겠지. 하지만 둘은 같이 있기는커녕 동선도 겹치지 않았어.’
그 모든 것을 종합해 보았을 때, 저 셋이 한자리에 있었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데에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셋을 잠시나마 한자리에 둬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 거야. 운사는 힘을 공급하는 역할이었을 거고, 성형우는 귀한 광림을 쓰는 매개체였겠지. 그렇다면 청호가 거기에 있던 이유는…….’
운사가 성형우가 각각 힘과 기술을 사용한다면, 청호는 무엇이었을까.
운사와 같은 역할을 맡아 힘을 뽑혔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만일 힘이 더 필요했다면 운사와 청호를 같은 자리에 두는 대신, 둘 중 하나는 안전한 곳에 두고 무지기를 데려왔을 것이다.
그동안 청호에 관해 품어 왔던 위화감과 생각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조의신, 생각이 있나 보군. 말해 봐라.”
“말하기 어려워. 아직 확실하지 않아.”
“확실하지 않아서 말하기 어려운 건가, 아니면 확실하지도 않고, 말하기도 어렵다는 건가.”
전자나 후자나 비슷한 소리로 들렸지만, 전혀 달랐다.
엄밀히 따지면 후자 쪽에 가까웠으나 그렇다고 답변하기 어려웠다.
“둘 다야.”
“말하기 어려운 추측인가 보군.”
내내 읽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던 황지호가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고 눈가에 실려 있던 힘을 뺐다.
마치 어린아이를 안심시키려는 모양새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들어 보고 싶다.”
“틀릴 수도 있어.”
“틀리더라도 무슨 문제가 있나? 내가 너를 탓할 리가 없으니 안심하도록.”
탓할 리가 없다고 하는 것치곤 메시지를 안 받네 뭐네 하면서 잔소리를 많이 하더만.
확실히 저 늙은 호랑이가 내 추측이 틀렸다고 해서 뭐라 할 것 같진 않았다.
황지호는 정작 탓하고 뭐라고 해야 할 때에는 모르는 척하거나 웃고 지나가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래도 망설이고 있자니 황지호가 덧붙였다.
“나는 수장 자리에 있으면서 친우가 처한 위협을 알지도 못하고, 구하지도 못했다. 이번에 청호도 호족이 아닌 다른 이가 구해 줄지도 모르겠군. 나는 너를 믿는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침묵하기 어려웠다.
아직 말하기엔 시기가 이른 것 같지만, 확실한 것만 말하기로 했다.
그전에 질문을 하기로 했다.
“한이의 가족이나 혈연 관계에 있는 자는 아직도 찾지 못했지?”
“그렇다. 적어도 이 몸의 힘이 닿는 곳에 한이의 혈육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더라도 인간 사회에서 아무 활동도 하지 않은 채로 죽었거나 말 그대로 생존만 한 상태겠지.”
나는 질문을 하나 더했다.
“내가 천단수에서 스킬을 사용한 후, 나눈 대화를 기억해?”
“기억하고 말고. 은인이 눈앞에서 쓰러진 걸 어찌 잊겠느냐.”
황지호는 대놓고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한참 지난 일인데 그때 일이 아직도 마음에 안 드나 보다.
황지호의 말에 사족이 붙어 있긴 하지만, 기억하고 있다면 이야기하기 편했다.
“나는 그때 ‘신인과 청호는 인간이 됐어?’라고 질문했고, 상대는 이를 긍정했어.”
“그랬지. 그 둘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니, 그건 모르는 일이야.”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그날의 대화를 전부 듣고, 같은 정보를 얻은 황지호라면 충분히 추측 가능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황지호는 떠올리지 못했다.
황지호는 친우인 청호와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가깝게 있기에 냉정하게 이를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황지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호족에게는 호족이 아닌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된 건 맞지만, 죽고 다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어.”
은호는 인간이 되었으나 죽지는 않았다.
이 세계의 은호는 깊은 잠에 빠졌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 깊은 잠에 빠진 은호를 곁에서 지킨 황지호라면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리고 운사는 청호에게 ‘시신’이라는 표현을 쓰는 대신 ‘육신’이라고 불렀다.
‘이쯤되면 황지호도 알아차렸겠지. 게다가 단서는 더 있어.’
한이는 지금 은호가 인간이었을 때와 같은 꿈을 꾸고 있다.
둘 다 꿈 속에서 눈을 가린 상위 존재, 천신과 만났다.
진족과 인간은 매우 다른 존재로, 신인과 달리 청호는 인간이 되기 어려웠다는 점.
초상 우주와의 교신 결과.
청호의 행적과 운사의 말.
은호가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경위.
그리고 천성헌과 한이의 공통점.
이들을 엮어 생각하면 답은 하나였다.
“네가 생각하는 건 설마…….”
“청호는 환생한 게 아닐 수도 있어.”
황지호의 눈이 커졌다.
충격에 빠진 것 같지만, 평소와는 달랐다.
이능파를 두른 것도 아닌데 크게 뜬 눈이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청호가 은호처럼 깊은 잠에 빠진 상태라고 생각해.”
청호도 은호처럼 깊은 잠에 빠진 채로 인간의 꿈을 꾸는 중이 아닐까?
내 추측은 호랑이들에게 아주 잔인한 말이었다.
친우가 살아 있다는 말에 희망을 한 번 주었으나 그 친우는 지금 흑막에게 잡혀 있다.
그 희망을 바닥에 처박는 듯한 말이었는데 황지호는 아주 기뻐했다.
“말해 줘서 고맙다.”
“그걸 왜 고마워해.”
“조의신, 왜 미안해하고 있는 거지? 친우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기뻐하는 건 당연하다.”
황지호는 처음 불러냈을 때와 다르게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속없는 호랑이는 내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기뻐하기만 했다.
사실 나는 내가 한 추측 중 한 가지를 말하지 못했다.
‘청호, 운사, 성형우가 한자리에 있던 이유는 아마…….’
운사의 힘으로 성형우의 광림을 살아있는 청호에게 사용한 게 아닐까?
깊게 잠든 진족을 상대로 어떤 효과가 났을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성형우의 광림이 통했다면, 청호는 깊게 잠이 든 채로 과거와 후회, 미래와 공포를 봤을 것이다.
* * *
기말 고사 준비 기간, 2학년 0반은 늘 그랬듯이 스터디 파티를 구성했다.
스터디 파티에 참가한 건 총 열 두명이었다.
참가한 이는 권레나, 김유리, 독고미로, 맹효돈, 목우람, 민그린, 사월세음, 송대석, 진정묵, 한이, 황지호 그리고 나.
관종 두 명과 등교 거부자 둘, 그 넷을 제외한 전원이었다.
그래서 시험 기간 동안 가장 넓은 스터디 룸을 대여했다.
오늘은 주말을 맞이하여 대여한 장소에서 스터디 모임을 갖게 되었다.
‘다들 일정이 있다 보니 열 두 명이 다 모이는 경우는 적지만, 넓은 곳을 확보해서 나쁠 건 없겠지.’
김유리는 늘 등교 거부자가 갑자기 나와도 대응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간식을 준비하곤 했다.
반장의 수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안타깝게도 시험 준비 기간이 시작된 후에도 그 넷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또, 자주 자리를 비우는 아이도 있었다.
협회 프로젝트로 바쁜 송대석과 다른 스터디 파티에도 가입한 사월세음이 그러했다.
“여름방학 동안 현상 수배범 최편득 사냥 파티에서 단체 훈련을 할 예정이에요. 한중일 교류전을 앞두고 못된 짓을 하는 분이 많잖아요? 그런 분들을 사냥하기 위해 훈련할 계획이라고 해요.”
사월세음은 현상 수배범 사냥 파티의 근황에 관해 전했다.
중간고사에 이어 저 스터디 모임에 가입한 사월세음은 앞으로도 저 곳에서 활동할 계획인 듯했다.
이 사냥 파티는 한중일 교류전과 맞춰서 목표를 설정했다고 한다.
‘타교 혹은 배팅 업체에서 심은 프락치 색출, 교류전 주요 경기 암표상 적발, 혼란을 틈타 사건을 일으킬지도 모를 국제 현상 수배범 사냥, 최편득 수색 및 제거…….’
한중일 교류전과 상관 없는 목표도 있었으나 바람직한 내용이라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한편, 여전히 등교 거부자를 따라다니는 관종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구슬비] 우리 큰일 났어. 엄청 유명해지고 주목 받을지도 몰라.
[옹길동] 같은 괴도로서 먼저 앞서 나가게 된 것 같아 미안하군. 다만 다소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괴도의 의지를 이어 주길 바란다!
[구슬비] 아, 무슨 목숨을 건 것처럼 말해. 멀린 스승님께서 운 나쁘면 좀 길게 잠이 들 순 있는데 별문제 없을 거라고 했어.
[옹길동] 하지만 우리 같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 자들이 며칠 자리를 비우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사회에 큰 손실 생길 것이다! 그러니 뒤를 이을 자가 필요하지.
[구슬비] 그건 그렇긴 해…….
[옹길동] 그래, 우리는 중요한 존재니까!
[구슬비] 맞아!
저 둘은 내가 이 메시지방에 있는 걸 잊고 있는 건 아니겠지?
방해하지 않을 겸 무시하려다가 그냥 무사히 돌아오고 시간 되면 스터디 모임에도 들르라고 말을 남겼다.
그렇게 말은 했으나 관종들은 나름의 이벤트로 바쁜 듯하니 기말고사가 끝날 때까지 얼굴을 보기 힘들 듯하다.
‘아마 양족의 수장과 관련이 있겠지. 악몽을 추적하는 등교 거부자를 회유하기 위해 단서를 뿌렸으니까.’
지금 저들은 양족의 수장과 접촉하기 위해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멀린의 말에 의하면 크게 위험한 건 아닌 것 같으므로 우선 방치하기로 했다.
기말고사 기간 중에 잠드는 건 좀 큰일이니 그때 깨어 있는지 확인해야겠다.
‘정작 저 둘이 등교시킨 무림인은 꼬박꼬박 등교 중인데 좀 본받았으면 좋겠네.’
진정묵은 성실하게 스터디 모임에 나타나 묵묵하게 공부했다.
관종들을 염려하던 진정묵에게 소식을 전하자 진중한 태도로 답변했다.
“그 둘이 서신을 보냈소? 시험을 앞두었으니 부디 정진하길 바란다고 전해 주시오.”
화선지 위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던 진정묵이 말했다.
기분 전환 겸 그림 연습을 하나 싶었는데 잘 보니 글자였다.
나름 공부 중인 듯 하지만 여전히 붓글씨가 엉망이었다.
‘진정묵의 저 붓글씨 실력은 한이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나…….’
그러고 보니 한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스터디 모임이 시작될 때까지는 시간이 있었으나 오겠다고 예고한 날에는 일찍 나왔기에 신경 쓰였다.
“한이는?”
“기숙사에서 조식을 먹을 때는 같이 있었어. 태호권 소모임에 잠깐 들렀다 온다고 하던데…….”
권레나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황지호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