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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포스트모템 (4)
지익회관 기숙사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한이는 권레나와 함께 스터디 카페로 가는 대신 태호권 소모임 부실로 향했다.
올해 태호권 소모임에 가입한 1학년 학생들의 공부를 봐주기 위해서였다.
1학년 학생들은 사이가 좋아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시험 기간에 스터디 파티를 결성하고 전원 참가한 상태였다.
이를 알게 된 한이를 비롯한 2, 3학년 학생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태호권 소모임에 들러 1학년 학생들의 공부를 봐주기로 했다.
오늘 한이는 2학년 0반 아이들과의 스터디 모임을 가질 예정이므로 오전에 잠시 들러 공부를 봐줄 생각이었다.
‘작년에 넓은 곳으로 부실을 옮기게 되어서 다행이야. 덕분에 후배들이 모임 장소를 확보하느라 고생할 일이 없어. 내년에 이만한 인원이 들어오면 바로 정식 동아리로 승격될 텐데…….’
태호권 소모임 부실.
한이는 넉넉한 크기의 테이블에 둘러앉은 후배들을 보며 작년 일을 떠올렸다.
은광고에는 정식 동아리, 소모임 두 종류의 부 활동이 존재했다.
소모임의 경우, 양식을 갖춰 신청만 하면 바로 수락되는 등 결성과 해산이 비교적 자유로우나 인원수가 적고 실적이 없는 만큼 지원을 덜 받았다.
그래서 소모임은 이것저것 아쉬운 점이 많았는데, 작년부터 조금씩 좋아지더니 2학기에 들어서자 거의 동아리 급으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모든 소모임의 대우가 좋아졌기에 태호권 소모임도 그 혜택을 받았다.
‘총동아리회에서 진행한 게 아니라 학교 측의 지시로 그렇게 된 거라고 했지.’
소모임은 좋게 말해서 자유롭지만, 나쁘게 말하면 근본이 없었다.
훌륭한 성과를 거둔 동아리가 넘쳐나는 은광고에서 굳이 소모임에 더 투자할 필요성은 적었다.
게다가 태호권이나 체스 소모임처럼 확실한 활동 목적을 갖추고 진지하게 임하는 학생들이 참가하는 곳도 있지만, 아닌 곳이 더 많았다.
심심풀이로 친구들끼리 만들어서 소모임 지원금으로 놀고먹다가 졸업 즈음에 해산하는 소모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얼마 전에는 PlayerZ 유저가 모여 ‘은광Z’라는 성의 없는 이름의 소모임을 만들어 부실을 받아 지원금으로 굿즈를 사 진열하고 VR기기를 들여놓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사진 중 하나가 이러한 실태를 두고 이사장에게 소모임 지원 축소를 건의했으나 전혀 먹히지 않았다.
황명호 이사장이 대충 ‘내 돈으로 학생에게 추억을 만들 기회를 주겠다는데, 불만 있냐’라는 요지의 말을 하자 이사진이 알아서 입을 다물고, 이 소식이 퍼져 학생들 사이에서 이사장의 주가가 크게 올랐다고 한다.
‘황명 재단 측에서 진행한 일이니까 지호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지호는 이사장의 친척이니까.’
친척이고 뭐고 그냥 동일 존재이긴 했으나 한이는 이를 알지 못했다.
아직 고등학교 2학년에 불과했지만, 한이는 그 돌아이가 심상치 않은 존재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만약 2학년 0반에서 조의신 다음으로 수상한 존재를 꼽는다면 한이는 주저 없이 그 돌아이를 고를 생각이었다.
황지호는 말도 안 되게 강하고, 입학 후부터 지금까지 전 과목 40점을 유지하는 기행을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자주 했다.
한이가 어렴풋하게 짐작한 대로, 그 일련의 사태에는 황호가 개입해 있었다.
같은 반이고 태호권을 한다는 이유로 나름 신경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그 정체까지 알게 되자 황호는 거침 없이 굴었다.
청호의 제자들이 몰래 좁디좁은 태호권 소모임의 부실을 구경하다 저런 곳에 청호를 둘 생각이냐며 황호 앞에서 소란을 피웠고, 이에 공감한 황호가 건물을 몇 개 더 지어 소모임 부실로 제공했다.
태호권 소모임만 좋은 대접을 받으면 공청훤의 처지가 난감해질 테니 이를 배려해 희대의 돈지랄을 한 셈이다.
한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
“개천 신화가 기록된 문서로군. 이걸 읽고 있었나?”
같은 반 돌아이가 근처에 서 있었다.
황호는 한이가 자신을 돌아본 후에야 말을 걸었다.
한이가 기척을 잘 읽고 말을 잘 알아듣는 바람에 청각이 없다는 걸 잊고 뒤에서 말을 거는 우를 범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반 아이들 중에서도 가끔 실수를 하곤 했다.
하지만 절대 그런 실수를 하지 않는 이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황호였다.
황호는 늘 한이가 자신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있는 위치로 고개를 돌린 후에야 입을 열었다.
“어떻게 왔어?”
“내가 고문에게 허락을 받은 걸 잊었나? 알아서 들어왔다.”
질문이 잘못되었다.
황호는 정식 부원은 아니나 현재 언제든 태호권 소모임 부실이나 대련하는 자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상태였고, 1학년 학생들도 이를 알고 있었다.
황호가 그만큼 태호권에 정통했고, 아주 가끔 도움이 되는 조언을 던지기도 하고 직접 시연하여 소모임에 도움을 준 건 사실이다.
그런 사실이 있다 해도 공청훤은 2학년 0반의 돌아이에게 유독 물렀다.
한이가 다시 물었다.
“왜 왔어?”
“문득 아침에 친우 생각이 나서 말이다. 이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들렀다.”
미친 대답이 돌아왔다.
은광고에는 워낙 이상한 자가 많아서 티가 안 났지만, 황호는 저렇게 헛소리를 잘했다.
예전엔 황호의 헛소리를 듣고 기겁하던 1학년 학생들도 이젠 그러려니 하고 별 신경을 안 쓸 정도였다.
이번에는 황호가 물었다.
“개천 신화가 시험 범위에 포함된 공통 과목은 없고, 너는 진족이나 신화와 연관된 선택 과목을 택하지 않았다. 이 중요한 시기에 시험과 관계없는 텍스트를 왜 읽고 있지?”
“……그냥. 시험 기간에 공부만 하는 건 아니잖아.”
시험 기간이 되면 평소에 관심이 없던 시사 프로나 뉴스, 클래식 음악, 재미는 없어도 작품성은 있다는 영화 등에 흥미가 생기는 법이다.
양면 거울 최지나가 진행하는 플레이어 시사 프로의 경우, 시험 기간에는 시청률이 오르고 다시보기 동영상의 조회수가 평소보다 높아진다는 우스갯소리를 방송 중간에 할 정도였다.
물론, 한이는 해야 할 것을 외면하고 불필요한 사항에 몰두하는 나약한 정신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저 꿈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었기에 적당히 얼버무렸을 뿐이었다.
‘상위 존재가 나오는 그 꿈은 개천 신화와 관계있으니까, 쉬는 시간을 이용해 알아보려고 했던 건데…… 이걸 말하는 건 좀 그렇겠지.’
황호는 미소를 띤 채로 얼버무리는 한이를 바라보았다.
이런 어설픈 변명을 이상하게 생각할 법도 한데, 황호는 추궁하는 대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 몸은 이 학교에 있는 그 누구보다 개천 신화에 관해 잘 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질문하도록.”
캐묻지 않는 황호의 태도에 안심하기 무섭게 기가 막혔다.
교사보다 개천 신화를 잘 안다고?
은광고의 교원들은 플레이어로서의 실적은 물론, 전공 과목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강한 교사 임연화의 경우 학문적인 의미에서도 강했고, 진족 연구에서 권위 있는 논문을 여럿 저술했다.
은광고 교사진 중 개천 신화를 전공한 석학이 없는 것도 아닌데, 황호가 왜 저리 자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쟤가 이상하긴 해도 거짓말은 안 해.’
허풍인지 아닌지 가릴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꿈 내용 때문에 연이 없는 교사를 찾아가 질문을 해대는 건 꺼려졌는데, 마침 같은 반 돌아이가 저런 소리를 하니 써먹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한이가 질문했다.
“……개천 신화에서 언급된 소원에 관해 궁금한 게 있어.”
“하하하! 얼마든지 질문하도록.”
황호는 한이의 질문에 막힘 없이 답하고 묻지 않은 내용도 덧붙였다.
황호의 말이 길어질수록 한이는 개천 신화에 빠져 갔다.
당사자가 직접 전하는 이야기인 만큼 무미건조한 활자의 나열과 다르게 수천 년 전의 신화가 피부로 느껴지는 듯했다.
추측과 통설에 관해 전할 때에는 고뇌의 흔적이 엿보이는 깊은 고찰이 묻어나고, 사실을 구술할 때에는 호랑이와 함께 질주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만 가지. 더 기다리면 늦을 거다.”
“아…….”
황호가 말을 마쳤을 때에는 어느덧 약속 시간이 가까워졌다.
개천 신화에 관심을 보이는 1학년 학생들도 황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아쉬운 듯 탄식했다.
한이도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하하하! 아쉬워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이야기해 주겠다.”
황호가 짧게 처웃은 후, 앞장서서 태호권 소모임 부실을 나섰다.
스터디 카페를 향하던 중, 황호가 말했다.
“친우가 개천 신화에 관심을 갖다니, 기쁘기 그지없군.”
그놈의 친우 소리 때문에 설명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려는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한이의 찌푸린 얼굴을 보며 황호는 뭐가 그리 좋은지 혼자 또 처웃었다.
한이는 뒤늦게 저 돌아이가 고맙다고 말하려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저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약속 장소에 도착해 버렸다.
* * *
한이와 황지호는 아슬아슬하게 약속 시간에 맞춰 등장했다.
한이는 생각이 많아 보였고, 황지호는 내내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해 보였다.
황지호는 한이에 관한 내 추측을 들은 후부터 계속 저런 태도였긴 했으나 둘이 같이 왔다는 말을 듣는 바람에 좀 마음이 쓰였다.
‘늙은 호랑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 선을 넘은 말은 안 했을 것 같긴 한데 기분이 너무 좋아 보여서 의심스럽네.’
나만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독고미로가 내 의심을 대변하듯 물었다.
“한이야, 쟤가 또 이상한 소리 한 건 아니지?”
“하하하! 이 몸이 친우에게 그런 말을 할 리가…… 있긴 하군.”
“했나 보네.”
평소에 호랑이들끼리 대화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백호군이나 적호에게 실없는 소리를 하고 반응을 보며 처웃는 게 일상 아니던가.
“오늘은 별말 하지 않았다. 이 몸이 개천 신화에 관해 아는 바를 말해 줬을 뿐이지.”
덜컹.
민그린 옆에 나란히 앉아서 사이좋게 필기를 교환하고 있던 송대석이 큰 소리를 냈다.
턱을 괴고 있던 손이 책상 옆으로 미끄러진 듯했다.
걱정하는 민그린에게 송대석이 둘러댔다.
“……손이 미끄러졌어.”
“어디 다친 건 아니지?”
“아, 얘들아! 사전에 신청하면 스터디 룸에 외부 음식 들여올 수 있대. 먹고 싶은 간식 목록 적어 줘!”
김유리가 말을 꺼내자 다들 황지호의 헛소리보다는 간식에 관심을 가졌다.
모든 걸 아는 입장에선 어색하기에 그지 없는 상황이었다.
황지호의 정체, 친우, 개천 신화.
이들을 엮어 생각하면 한이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저 둘은 황지호의 정체를 아니까 친우 소리의 의미를 짐작했을 거야. 맹효돈도 대충 알긴 하지만…….’
맹효돈은 수학 문제지 위로 돌멩이를 굴리고 있었기에 황지호의 말을 신경 쓰지 못했다.
김유리가 간식 목록표를 건넨 후에야 멍하니 고개를 들어 반응을 보인 게 고작이었다.
송대석과 김유리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지호가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개천 신화 하니 네게도 할 말이 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간식 목록이나 살피려 했으나 황지호는 무시할 수 없는 말을 꺼냈다.
“네 친한 후배가 만들고 있는 게 있다더군. 같이 봐 줬으면 한다.”
은호가 개천 신화에 관해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