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905화 (905/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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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포스트모템 (5)

스터디 모임을 마친 후, 호랑이 저택으로 향했다.

은호가 이용하던 현대식 별채로 가나 싶었으나 황지호가 본채로 안내했다.

“먼저 은호의 후예들을 보고 가지. 기말고사 준비가 많이 힘든 것 같더군. 너를 보면 힘을 낼 거다.”

설명도 안 하고 대뜸 본채로 끌고 온 건 좀 그랬지만, 아이들이 힘들어한다니 어쩔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샀을 텐데.

다음 주에는 더 신경 써서 1학년 아이들을 챙겨야겠다.

“그리고…… 나보다는 조의신 네 말을 더 귀담아들을 것 같아서 말이다.”

대체 그게 뭔 소리인가.

그 이유는 곧바로 알게 되었다.

본채로 들어서자 난장판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 곳곳에 타고 깨진 흔적이 보였는데, 강한 폭발이 남긴 흔적 같았다.

큰불로 번지지 않은 건 저택 내 방화 대책이 완벽했기 때문일 거다.

크르르…….

호랑이가 낮게 목을 울리는 소리 쪽을 돌아보았다.

벽에 그려진 황금색의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다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황지호 전용 공간이라는 호랑이 저택 5층에서 보았던 황지호의 권속이었다.

‘저 호랑이는 황지호의 권속, 화호(畵虎)라고 했지.’

호랑이 저택 5층 외의 장소에서 화호를 본 적이 없는데, 여기에서 보니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폭발을 감지한 화호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움직인 것 같았다.

추측하는 사이 목을 울리는 걸 멈춘 화호가 자리를 잡고 앉아 빤히 내 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반짝이며 관찰하는 모양새가 황지호랑 똑같았다.

그런데 화호가 올 정도로 큰 폭발이 있었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가.

“……그래서 장기 자랑 연습 때문에 불이 났다는 건가?”

“네!”

식당 쪽을 보니 어린 황유호와 은서호, 은이호 그리고 은재호가 보였다.

놀라서 저들을 살펴보니 다행히 다친 아이들은 없었고, 말하는 걸 보니 크게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엉망이 된 거실을 수습하는 동안 식당에 앉아 이야기 중이었나 보다.

폭발의 원인은 요리가 아닌가 싶었는데, 부엌과 식당이 멀쩡하고 장기 자랑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니 아닌 것 같다.

“여름방학에는 청소년 수련회가 있잖아요, 거기에서 장기 자랑을 한다고 들어서요!”

“맞아요, 반별로 무조건 하나씩 해야 한다고 하던데요?”

“장기 자랑 참가는 자율이다. 안전 문제로 규칙이 바뀌었으니 굳이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 이 몸이 청소년 수련회에 갔을 때에도 장기 자랑을 하지 않았다.”

“네? 작년에 장기 자랑을 안 한 건 사고가 터져서라고 들었는데요!”

“맞아요, 금찬왕찬 선배님들은 강제 참가였대요!”

은서호와 은이호가 해맑은 얼굴로 말하는 걸 듣자 머리가 아파졌다.

말이 엇갈리고 있는데, 착하고 어리고 똑똑한 황유호의 말이 맞았다.

우기환의 차력 쇼로 무대를 부수고, 금찬왕찬의 최면술 쇼라는 이름의 강제 마늘 먹방 사건이 있던 후로 장기 자랑은 자율 참가로 바뀌었다.

‘따지고 보면 은서호와 은이호의 말도 틀리지 않아. 사고가 나서 장기 자랑을 못 했고, 금찬왕찬은 하긴 했으니까.’

어쨌든 굳이 장기 자랑을 할 필요가 없는데 저 아이들이 폭발을 일으킬 정도로 급발진한 건 금찬왕찬이 쓸데없는 바람을 불어넣어서 그런 걸 거다.

툭하면 하극상을 벌이려는 1학년들을 잠시나마 장기 자랑 준비로 얌전하게 만들기 위해 저런 말을 해댄 게 틀림없었다.

난감해하던 황유호가 뭐라고 더 말하려 할 때였다.

“사실 제일 자신 있는 건 죽은 척하는 건데요…….”

“맞아! 그거 하면 진짜 다 속을 텐데. 시체놀이로 우리 0반도 갔잖아!”

“우리 반 애들도 한번 해 보고 싶다고 했고!”

그걸 또 할 생각이었나…… 그것도 0반 후배들과 단체로…….

하긴 호족과 토족은 물론이요, 은광고 면접관도 다 속을 정도이니 은호의 후예들의 죽은 척이 좀 완벽하긴 했다.

하지만 말하는 걸 보니 이번에 시체놀이를 연습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단체 시체놀이를 해 보고 싶었지만, 은하가 반대해서 다른 걸 하기로 했어요.”

“장기 자랑이니까 리얼한 장기(臟器) 모형도 준비한다는 애도 있었는데요, 아깝게 됐어요.”

그 장기 자랑을 하라는 게 아닌데.

피의 장기 자랑이 되는 걸 은호가 막은 것 같다.

착한 황유호는 그런 끔찍한 사태가 오지 않아 안심한 건지 표정이 다소 풀렸다.

“너희 반 부반장이 반대했나? 뭐라고 했지?”

“은하가 되게 좋은 말 해 줬어요! 뭐라고 했냐면요…….”

은서호가 그날 있던 일에 관해 말했다.

장기 자랑의 주제가 시체놀이로 확정되기 직전, 천은하의 모습을 한 은호가 반대하며 말했다.

―죽음을 가장할 수 있는 능력은 아주 귀해. 최전선을 오가는 플레이어의 생존 확률을 올려 주겠지.

―그럼 은하도 같이 시체놀이 하자!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반대해?

반 아이들의 항의가 쏟아지는 가운데 은호가 웃으며 기다렸다.

역대 최강최악이라 꼽히는 3학년 0반에게도 겁 없이 덤비던 이들이라 그런지 거칠게 말하는 이도 있었으나 은호는 웃을 뿐이었다.

결국 반 아이들이 먼저 꺾였다.

항의하는 목소리가 잠잠해진 후에야 은호가 천천히 답했다.

―그런 비장의 무기는 마지막까지 숨겨야 의미가 있어. 죽은 척에 능하다는 걸 상대가 알면, 반드시 확인 사살을 할 테니까.

―……!

―그러니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 무기를 사용하는 건 자제해야 해. 다른 주제를 생각해 보자. 어떤 안으로 정해지든, 최선을 다해 도울게.

은호는 평소처럼 온화하고 부드럽게 말했는데,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로 압박감이 느껴졌다고 한다.

열정적으로 시체놀이를 추진하던 은서호와 은이호도 입을 다물 정도였다.

기말고사 준비로 피폐해진 정신과 뜬금 없이 장기 자랑 건을 꺼내며 들뜬 분위기와 은호의 박력이 뒤섞여 교실이 조용해졌다.

―그럼 장기 자랑에선 안 해도 시체놀이 연습해도 돼? 난 하고 싶어. 비장의 무기는 많을수록 좋잖아!

다행히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윤여랑이 사심 없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다시 분위기가 전환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1학년 0반은 시험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시체놀이 연습과 장기 자랑 준비를 병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은서호와 은이호는 장기 자랑 준비를 하는데, 이걸 산령한테 배우는 중이라고 한다.

“장기 자랑으로 뭘 준비하는지는 아직 비밀인데요, 산령이 좋은 걸 가르쳐 줬어요!”

“네, 기대하셔도 좋아요!”

“……기대하마. 하나 급한 게 아니면 시험 공부부터 하는 게 좋겠군. 수석을 노린다고 하지 않았나?”

“으으…… 그렇긴 한데요…….”

착한 황유호가 아이들을 달래는 사이, 황지호와 화호가 산령을 족치러 갔다.

산령은 거실 한구석에서 그을음이 묻은 블록 장난감을 닦으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산령, 또 우리의 후예에게 위험한 걸 가르치려는 건 아니겠지?”

“나, 나는 다른 거 가르쳐 줬는데, 쟤들이 폭발시켰어!”

산령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실체가 분명해진 산령은 그냥 그림자 속에 묻힌 아이처럼 보였다.

산령이 작은 손을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걸 보니 조금 안쓰러웠다.

대체 뭘 어떻게 가르치면 폭발이 일어나나 싶긴 한데, 후예들은 평범한 조리 도구를 사용해 요리할 때에도 이런저런 사고를 일으켰기에 산령 탓만 하기는 어려웠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백호와 신수더러 네 특훈을 담당하게 할 거다. 주의하도록.”

“응, 알았어!”

더 혼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황지호가 쉽게 물러났다.

산령이 혼자 블록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걸 지켜보다 황지호가 고개를 훽 돌렸다.

황지호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최근 들어 산령이 장난질을 쳐도 혼낼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어린아이한테 약한 네 성품이 옮았을지도 모르겠군.”

왜 내 핑계를 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산령의 실체가 분명해질수록 막 대하기 어려워진 건 사실이다.

저런 어린 애한테 혼낼 곳이 어디 있겠는가.

좀 개구지긴 하지만, 산령은 이 세계에서 알게 모르게 나를 도와줬다.

게다가 최근엔 은호의 후예들이 학교를 다니느라 바빠 혼자 놀 때가 많을 텐데 여러모로 안쓰러웠다.

“의신이 형이다!”

“의신이 오빠, 저희 시험 공부랑 장기 자랑 준비 다 열심히 하고 있어요!”

황유호와 이야기를 마친 은서호와 은이호가 내 쪽으로 왔다.

둘은 학교에서 자주 보는데도 저택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몹시 반가워했다.

둘의 말을 들어준 후에는 장기 자랑 준비는 좋지만,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잔소리도 조금 했다.

‘시험 준비가 고되다 보니 이런 일탈을 한 거겠지. 시간이 나면 애들 공부도 봐줘야겠다.’

싫은 얼굴을 할 법도 한데 착한 아이들이라 그런지 내 잔소리도 웃으며 들어줬다.

거기에 더해 아주 큰 선물까지 줬다.

“신수가 형 오면 전해 주라고 했어요.”

장기 자랑 건은 구경만 했지만, 은서호와 은이호에게 의리를 세워 같이 잔소리를 듣고 있던 막내 은재호가 홀로그램 하나를 보여 줬다.

홀로그램에는 천사가 찍혀 있었다.

평범한 천사가 아니라 윙크를 하고 있는 천재 천사였다!

천사의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 건 아쉬웠지만, 천재성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좌절했다.

“백호 님의 말로는 한 눈을 감지 않아도 될 때 만날 수 있을 거래요.”

심성이 고운 천사가 무슨 의도로 저 말을 전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 다친 왼눈 때문에 저러는 게 틀림 없었다.

왼눈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천사를 만날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 * *

현대식 별채.

천사의 사진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을 때, 황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의신, 그만 지능을 되돌려라.”

사진을 받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고개를 들어 보니 호랑이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은호가 내준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적호는 찻잔에 손을 대는 대신 은호에게 구시렁거렸다.

“은호, 후예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들었습니다. 시체놀이를 하는 걸 두고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칭찬 비슷한 말을 했더군요.”

“죽음을 가장하는 능력이 출중한 건 사실이니까요.”

“못 하게 막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말만 잘하면 그 아이들은 다시는 시체놀이 따윈 하지 않을 겁니다.”

적호는 예전에 시체놀이로 은호의 후예에게 크게 낚인 적이 있었다.

그걸 직접 겪은 입장에선 그리 탐탁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은호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아이가 위험한 무기를 다룰 줄 안다면, 멀리하는 게 아니라 더 잘 다루는 법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요?”

저 말에 적호의 말문이 막혔다.

은호는 저 시체놀이 마저 이용할 생각인 것 같았다.

사실 나도 저 능력은 좋은 수가 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적호가 더 뭐라 하기 전에 은호가 본론을 꺼냈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불러 죄송합니다. 아직 미완성품이지만, 의신이 형이 하셨다는 추측을 듣고 나니 빨리 보여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은호는 홀로그램과 종이로 인쇄된 자료를 꺼냈다.

그 양은 수십 권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은호가 자료의 정체에 관해 설명했다.

“여기에 있는 건 제가 기억하는 개천 신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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