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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합숙 (1)
기말고사가 끝나고, 성적이 확정되면 바로 여름방학이 시작된다.
자세한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으나 그 후 며칠 쉰 후에 바로 합숙하게 될 거다.
교류전 대표들의 일정 정리, 장소 확보 등을 위해선 미리 계획해 둘 필요가 있다.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시험 기간 중이나 학생회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나 보다.
염준열은 교류전 종목에 따라서 선발진 중에서 출전 멤버를 정하고, 그에 맞춰 훈련할 계획임을 밝혔다.
“일정 관리는 학생들 재량에 맡기고 있다만, 학교 측의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도록.”
“……코치로 모실 분을 찾는 중인데, 선생님들의 스케줄 확인을 부탁할게. 학생회 고문 선생님께서는 참가해 주신다고 했어.”
저 늙은 호랑이는 이 자리에 후배로서 있는 건지 이사장으로서 있는 건지 구분이 안 갔다.
염준열은 애써 웃는 얼굴로 부탁하기 무섭게 황지호가 움직였다.
황지호는 분신을 쓰는 걸 숨길 생각이 없는지 곧바로 디바이스를 통해 홀로그램을 하나 전송했다.
“간단히 명단을 추렸다. 합숙 기간이 정확히 정해지면 더 늘어날 거다.”
“……고마워. 참고해서 선생님들께 연락드려야겠다.”
둘의 대화는 매우 어색했으나 염준열의 노력으로 그럭저럭 굴러갔다.
염준열이 명단을 확인하는 사이, 나는 디바이스를 켜 간단한 훈련 계획서를 작성했다.
선발로 뽑힌 이들은 대부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였고, 나름 생각해 둔 게 있었기에 훈련 계획은 금방 떠올랐다.
사실 이 정도는 플마고를 제대로 플레이한 유저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특성에 맞추어 육성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모든 캐릭터를 키울 수 있다.
“조의신, 벌써 계획서를 작성했나? 빠르군.”
그래 봤자 늙은 호랑이가 분신을 부려서 명단을 작성하는 것보단 느린데.
황지호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염준열에게 홀로그램을 전송했다.
“종목에 맞춰서 훈련 계획을 세워 봤어요. 아직 참가자분들이 종목을 택하지 않았고, 제 개인적인 의견이 크게 반영되어 있어서 수정할 부분이 많을 거예요.”
“이렇게나 빨리…… 고마워, 의신아. 덕분에 금방 일정을 짤 수 있을 것 같아!”
염준열은 성실하게도 제자로서도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앞에 황지호가 있는데도 말이다.
“스승님께 부탁드리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하하하! 스승 대접을 받는 조의신의 얼굴이 매우 볼만하구나. 염치없는 용족이 많거늘, 그 후예는 예의를 아는군.”
황지호가 흥미진진해하며 관찰하다가 웃음을 터뜨렸으나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염준열은 아직 늙은 호랑이의 존재를 크게 느끼는 듯하나 곧 익숙해질 것 같다.
‘만약 학생회 측에서 저 계획표대로 일정을 짜면, 수를 두기 수월해질 거야.’
내가 만든 훈련 계획표에선 특정 종목, 포지션을 택한 대표의 경우, 개인 훈련 시간이 조금 길게 배정되어 있다.
아직 누가 무슨 종목을 택할지 정해지진 않았다고는 하지만, 멤버들의 성향이나 특기들을 고려하면 대충 결과를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 훈련 과정의 추이를 살피고 적극적으로 움직일 생각이다.
선발전 과정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였던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각오를 굳혔다.
“조의신,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네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았다는 걸 잊지 말도록.”
“……이능파 링크에서 사용하는 문자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어.”
염준열의 첫 번째 상담에 관해서도 생각해 두고 있었기에 거짓말은 아니었다.
황지호가 불필요한 말을 하는 바람에 염준열이 상담이 길어져서 미안하다며 사과하게 되었다.
그 사과를 들으며 느긋하게 내 몫의 차를 건네는 늙은 호랑이가 아주 얄밉게 보였다.
염준열을 다독여 자세한 내용을 듣기로 했다.
“황룡 형의 말씀대로라면, 이능파 링크의 매개는 굳이 그 문자가 아니라도 괜찮대. 오히려 시전자에 따라선 다른 것을 이용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해.”
이능파 링크를 처음으로 찾아낸 존재는 금찬왕찬 일당이었다.
선배놈들은 이능파 링크를 사용할 때 이능파를 모으는 매개로 그들이 직접 만든 암호를 사용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해석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암호로 ‘제갈재걸’이라고 쓴 글자는 그 미친 자들의 결속력을 굳건하게 해 주었다.
창시자인 금찬왕찬이 쓰기에 따라 쓴 거지만, 다른 매개가 더 효율적이라는 건 쉽게 짐작이 갔다.
‘황룡도 그 점이 신경 쓰여서 김신록에게 다른 매개를 써 볼 것을 조언했다고 했지.’
용궁에서 사용한 매개는 사전에 김신록이 써 둔 문자를 활용했다.
김신록은 그 암호를 활용해 호랑이와 용이 들어가는 사자성어를 썼다고 한다.
용궁에서 돌아온 후, 김신록에게 그때 무엇을 썼는지 뒤늦게 물어보자 김신록 대신 용제건이 멋대로 답해 주었다.
김신록이 쓴 글은 용행호보(龍行虎步).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용처럼 행하고 호랑이처럼 걷는다는 뜻이었다.
용궁에서 김신록이 이능파 링크를 했다면, 높은 확률로 용이나 호랑이와 링크를 했을 테니 옳은 선택이었다.
‘그때 성공하긴 했지만, 더 강한 매개가 필요할 거야. 김신록과 황룡은 둘 다 긴 시간을 산 존재라서 큰 어려움이 없었던 거겠지. 그리고 잘 맞는 매개를 찾는다면 분명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거야.’
이능파 링크에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특히 향상심이 강한 염준열이라면 새 매개를 찾고자 했을 거다.
주수혁에게 패한 이후로 강해지기 위해 더욱 노력을 기울였을 테니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을 게 틀림없었다.
“용족 분들과 붉은 사자의 형, 누나들과는 이능파 링크를 몇 번 연습했어. 하지만 그분들은 나를 잘 아시니까 내게 맞춰 준다는 느낌이 커서…….”
“그래서 황룡이 조의신과 새 매개를 찾도록 제안한 건가?”
염준열이 말꼬리를 흐리자 황지호가 멋대로 말을 이었다.
황지호의 말대로인지 염준열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응, 이능파 링크에 관해 이해하면서도 아직 알고 지낸 지 시간이 비교적 짧은 의신이와 상담하는 게 좋을 거라고 들었어.”
“같이 그 매개를 찾아보죠. 합숙 때 쉬는 시간에 뵈었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염준열이 활짝 웃었다.
쉬는 시간을 빼앗는다고 했는데도 저렇게 기뻐하는데 돕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머릿속에 만든 개인적인 계획표에 염준열과의 일정을 채워 넣는데, 황지호가 툴툴거렸다.
“필요한 일이다만, 뒤에 용족 놈들이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드는군.”
“그럼 이제 공부할까요?”
“그래, 질문할 게 있으면 언제든지 해. 수강했던 과목이라면 얼마든지 질문에 답할 수 있어.”
황지호에게 공부 안 할 거면 먼저 가라는 의미를 담아 말했다.
늙은 호랑이는 내 의도를 알아챈 건지, 모르는 건지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운룡이 가져온 다과를 먹었다.
그러다 황지호는 홀로그램을 켜 텍스트를 읽는 나와 염준열을 관찰하기도 하고, 전각을 구경하며 용궁에 관광하러 온 기분을 만끽했다.
공부는 안 했지만 먼저 가지도 않았다.
1시간 정도 흐른 후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을 때, 황지호가 말했다.
“꽤 멋진 건물이군. 후예를 아끼는 용족이 공부하도록 내줄 만한 곳이다. 용궁 내의 배치가 절묘하여 어느 방향을 내다 보아도 멋진 경관이 눈에 들어오는군. 전에 왔을 때는 보지 못한 것 같은데 말이다.”
“이 건물은 최근에 용왕신께서 허락받아 청룡 삼촌이 직접 만들었어. 이곳은 청신각(靑晨閣)이라고 해.”
푸른 새벽을 가리키는 청신(靑晨).
저 단어는 맑은 첫새벽을 뜻하는 청신(淸晨)이 떠올리게 했는데, 이 건물과 몹시 잘 어울렸다.
이 건물의 벽, 기둥은 기본적으로 흑단으로 만들어졌고, 그 위에 청색 보석 가루를 뿌려 새벽이 가까워진 밤하늘을 연상하게 하였다.
게다가 황지호의 말대로 위치도 아주 좋아서 이 청신각에서 날이 새는 하늘을 보면 아주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황지호는 청신각이라는 단어를 듣자 미간을 좁히고 혀를 찼다.
“조의신의 이름을 따왔군. 설마 이 청신각이 조의신의 것이라고 할 생각인가?”
“응, 의신이 거나 다름없어.”
설마 했는데 청신각의 ‘신’ 자는 내 이름인 조의‘신’에서 따온 듯했다.
청룡은 청룡궁을 주긴 어려우나 대신 내 이름을 딴 전각을 하나 짓네 마네 하더니 진짜로 지었나 보다.
황룡도 전에 누각을 새로 지었다고 하더니, 이 용들은 한다고 한 걸 진짜로 실행해 버렸다.
‘청룡에게 이름을 다시 지으라고 권하고 싶어도 이 자리에 없어. 이런 건 시간이 지나면 더 무르기 어려워지는데…….’
만약 주변에 청룡이나 황룡이 있으면 왜 이런 걸 떠넘기냐고 한소리 했겠지만, 이 자리엔 후예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입장적으로 따지면 황지호보다 선배고, 실제 나이로 따지면 한참 어렸기에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염준열이 이 자리에 있는데 왜 다른 용족이 없나 싶었더니 이걸 노린 건지도 모르겠다.
염준열은 이 화제가 나오는 걸 기다린 것처럼 말을 더 이었다.
“그리고 용왕신과 청룡 삼촌은 만약 의신이가 용족의 일원이 된다면 새벽 용, 신룡(晨龍)이라는 별호를 지어 주시겠다고 하셨어.”
“새벽 용에다가 용족의 일원? 용족은 조의신이 인간이자 호족의 은인인 걸 잊은 것 같군.”
황지호가 어처구니없어했다.
나이가 워낙 많은 탓에 고등학생 모습으로 저래도 위압감이 조금 느껴졌는데, 염준열은 웃으며 받아쳤다.
막 청신각에 왔을 때에는 어색해하더니 다소 익숙해진 듯했다.
“응, 알고 있어. 하지만 여기에 있는 용궁들은 거의 의신이 거잖아. 그러니 용의 호칭 정도는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조의신, 호족에서 먼저 네 별호를 지어 주겠다. 후보를 열 개 정도 정해 올 테니 그중 하나를…….”
“됐어.”
그 이후로 짧은 시간을 이용해 늙은 호랑이가 투덜거리고, 어른스러운 염준열이 받아 줬다.
황지호는 온갖 것으로 트집을 잡으며 뭐라 했다.
“듣자 하니 황룡 형에 청룡 삼촌이라니. 체통도 양심도 없군. 이 몸은 후예들에게 그렇게 부르라 하지 않는다.”
김신록이 황호 삼촌이라고 하면 좋아할 거면서 말은 잘한다.
그리고 다른 후예인 은서호, 은이호, 은재호는 은호의 손주고, 은호는 황지호의 친우인 백호의 동생이다.
그러니 사실상 큰할아버지뻘이기에 형과 삼촌 대신 황호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그게 싫으니 일부러 호칭을 두고 뭐라 하지 않은 걸 거다.
“그럼 김신록 선생님은 ‘황호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는구나. 그러면 평소에는 ‘황호 님’이라고 불러?”
“……그렇다.”
“그렇구나…… 진족 간의 호칭 문화가 다른가 봐. 폐가 되지 않도록 밖에서 부를 칭호를 두고 용족 분들과 상의해 볼게.”
“…….”
염준열의 악의 없는 카운터에 황지호가 당했다.
저런 문제를 격의 없이 상담할 정도로 용족과 친했고, 김신록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김신록은 많이 변하고, 강해졌어. 이제 웅족과도 상대할 힘도 얻었지. 언젠가는 황지호에게 삼촌이라고 부를 날이 올지도 몰라. 얼마나 걸릴지는 짐작도 안 가지만.’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입으로 말하진 않았다.
뚱해 보이는 황지호를 두고 나와 염준열은 다시 시험공부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