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18)
111. 합숙 (7)
염준열은 감탄이 나올 만큼 회의 진행을 잘했다.
학생회장으로서 처음 의장을 맡을 때에도 잘했지만, 지금은 더 잘하고 있었다.
금찬왕찬 선배놈들의 변함없는 모습을 보다가 염준열의 성장한 모습을 보니 더욱 감개가 무량했다.
염준열뿐만 아니라 선도부장인 천동하와 총동아리회장인 허채아도 발전한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회의 분위기상 박수를 보낼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그에 반해 퇴보한 놈도 있네.’
각 자치 기구의 정기 보고 중, 지익회 차례가 되었을 때였다.
지익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쏠렸는데, 처참한 행색을 본 회의 참가자들이 술렁였다.
‘계’새끼는 기억보다 더욱 음침해져 있었다.
며칠 잠을 못 잔 건가 싶을 정도로 눈 밑이 새카맸고, 제대로 먹지 않은 건지 볼은 홀쭉했고 피부색은 시허옜다.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하는 보고가 드문드문 끊기는 바람에 듣기 괴로웠고, 내용도 그다지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요새 지익회 애들 일 많이 없었다는데, 지익회장 상태가 별로네.”
“기말고사 때문에 그런가? 그런데 3학년도 성적 다 확정됐잖아.”
“재시험이라도 본 거 아님?”
“아닐걸? 지익회장 공부 잘하잖아. 작년 말에 이능 총 버린 후에는 실기 점수도 올라서 등수 올랐을 듯.”
“아니, 해머를 다룬 지 1년도 안 됐다고? 10년은 넘게 쓴 것 같았는데.”
주변에서 지익회장의 맛이 간 상태를 주제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거주 구역에서는 별사건이 없었고, 지익회는 일이 없었고, 시험은 끝난 지 꽤 되었으므로 다양한 추측들이 쏟아졌다.
PlayerZ를 원인으로 꼽는 이들도 있었는데, 나름 그럴싸하다고 생각되었다.
저 악플러의 게임 실력을 생각하면 잠을 안 자고 PlayerZ를 했다 쳐도 스토리 첫 챕터의 보스를 보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렸다.
‘게임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안다인 때문에 억지로 게임을 하지 않았나? 그 안다인이 현실에 있는데, 다른 게임에 눈을 돌릴 리가.’
인정하는 게 괴롭지만, PlayerZ는 정말 재미있는 게임이라 인생을 건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저놈은 이미 다른 세계에서 인생을 안다인에게 걸었다.
사실상 안다인 때문에 이 세계에 온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안다인이 현재 큰 대회를 앞두고 있고, 악성 댓글에 시달리고 있는데 플마고가 아닌 다른 게임에 한눈을 팔 리가 없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느 가설이 떠올랐다.
‘설마…….’
생각을 마무리할 즈음, 자치 기구의 정기 보고가 끝났다.
이어서 주요 회의 안건에 관해 논의하게 되었다.
현재 회의 참석자 중에 선발된 이들이 많았기에 관심도가 남달랐다.
나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관해선 잊고 염준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으로 합숙에 합류하게 될 코치진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부분 은광고의 교사진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프로 플레이어 팀에서 차출된 분도 있습니다. 외부에서 영입한 분들의 경우, 선발, 보수 지불 과정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황명 재단 법무팀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추가로 추천할 분이 있다면 법무팀에서 제안한 절차를 밟아 모실 예정입니다.”
각 테이블에 설치된 홀로그램 패널 위로 코치 명단이 떠올랐다.
용궁에서 황지호가 염준열을 도와줬던 결과가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특별한 점은 없었으나 눈에 띄는 이름이 몇 개 보였다.
‘맹효돈이 걱정됐나 보네. 탁거산도 합류했어.’
탁거산의 여름방학 일정은 불투명했다고 들었다.
탁거산에게는 맹효돈 외에도 제자가 하나 더 있었고, 못난 제자 방윤섭의 성취는 맹효돈에 비해 더디었다.
인비디우스 사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사족의 수장이 내린 가호를 받은 뒤로 방윤섭의 이능은 크게 성장했으나 본인이 그걸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예전에 비해선 전투 능력은 크게 향상되었으므로 방윤섭은 그 수준에 만족해 버렸다.
그래서 탁거산은 방윤섭의 특훈 여부를 두고 상당히 고민했다고 한다.
‘그대로이거나 퇴보하는 선배놈들에 비해서는 훨씬 낫지만, 아쉽긴 하지. 그래도 본인의 선택이니까 어쩔 수 없어.’
고민 끝에 탁거산은 방윤섭에게 억지로 훈련을 시키는 대신 의욕이 넘치는 맹효돈과 같이 출전할 선발 멤버와 싸우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이런 결과가 나온 건 방윤섭의 재능이나 노력,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현재 방윤섭은 연애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던 탓이었다.
‘흡연하는 원인이 주수혁, 맹효돈을 향한 열등감이 아니라 최영희로 바뀌었을 정도지. 여전히 두 사람한테 경쟁의식을 품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우선순위가 바뀌었어.’
연애를 하다 발생하는 사소한 트러블을 두고 방윤섭은 세상이 망한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다 담배에 손을 대곤 했다.
그걸 알게 된 최영희가 직접 나한테 신고하여 빵과 쿠키를 받아 가는 사건도 있었다.
최영희가 내게 신고했을 때, 방윤섭은 나한테 짜증을 내면서도 최영희한테는 순하게 굴었는데, 그 광경을 보니 설탕을 한 줌 집어삼킨 기분이 들었다.
최영희한테 솔직하게 못 굴던 방윤섭이 저렇게 변하다니 원래 그런 놈이었나?
그래도 방윤섭의 변화를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느리고, 방향도 엉망진창이고, 가끔 멈추기도 하지만 방윤섭이 변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나] (링크)
[방윤섭] 뭐야?
[방윤섭] 아 진짜
[방윤섭] 꺼져ㅗㅗㅗ
생각난 김에 여름방학 청소년 금연 캠프 참가 신청 링크를 보냈더니 욕이 돌아왔다.
‘ㅗ’가 세 개 찍혀 있는 점을 고려하여 다음에 걸리면 빵을 세 개씩 사 오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금연 캠프에 참가할 마음이 없다면 사랑의 힘으로 졸업 전엔 담배를 완전히 끊어 부디 졸업 전에는 빵셔틀이 아니라 그냥 동급생이 되길 바랄 따름이다.
덤으로 주수혁과 맹효돈에게 품은 라이벌 정신을 실력으로 좀 더 발전시켰으면 했다.
“코치진에 권제인 선배님이 안 계셔.”
“이번 대표 중에 이능 악기나 물 관련 이능 쓰는 애 없지 않아? 안 불러도 될 것 같은데.”
“다른 학교에 이능 악기 쓰는 애 있어서 대처법 연구하려면 모시는 게 좋을걸? 그래서 학생회에서 권했는데 안 됐나 봐.”
“여름에 공연 일정도 없어. 방학 동안 푸른 바이올리니스트 없이 지내야 돼…….”
추가 코치 추천을 두고 회의 참가자들이 의견 교환을 하는 사이,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영원의 호수는 세 기사의 맹세와 치열한 정보전을 치르는 중이다.
아직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두 팀의 대립은 조금씩 격해지고 있었다.
서브 팀 마스터인 재러드 리가 납치될 뻔했는데 아직까지 전면전을 치르지 않은 게 기적에 가깝긴 했다.
‘그런데도 권제인은 이번 학기 명예 교사로서 할 일을 다 했어. 권레나를 위해서 무리를 한 거겠지.’
분명 여름방학에도 권레나와 하는 개인 레슨은 쉬지 않을 거다.
바쁜 권제인이 교류전 코치진에 합류하는 건 어려웠다.
코치진에 이어서 합숙 일정, 장소 등에 관한 조율을 한 뒤에는 교류전 진행에 관한 화제로 전환되었다.
교류전은 은광구에서 치러지긴 하나 교내에서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관학교와 스포츠 교류전을 진행한 은광 스타디움 등, 은광구에서 황명 재단이 소유하거나 사용 권한을 가진 시설들을 적극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다음은 가을에 열릴 사관학교와의 스포츠 교류전입니다. 한중일 청소년 교류전과 다르게 이능을 메인으로 한 행사는 아니지만, 두 학교의 많은 학생들이 참가 의사를 보이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다음 주제는 사관학교와의 스포츠 교류전이었다.
교류전을 연이어 하는 만큼 관심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염준열이 참가 독려가 섞인 말을 건넸다.
총동아리회장 허채아가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포츠 교류전의 참가 주체가 대부분 교내 동아리 소속이라 총동아리회의 역할이 컸기에 긴장한 것 같았다.
차분하게 발표하던 허채아가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총동아리회에서는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스포츠 종목을 확정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온라인 게임 PlayerZ의 업데이트 여부에 따라 종목을 하나 더 추가해 달라는 건의가 있었습니다.”
PlayerZ이 언급되자 반쯤 졸고 있던 유상훈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현재 그 갓겜은 대규모 업데이트를 눈앞에 두고 있다.
지금은 게임사가 가장 후하게 이벤트를 여는 때로, 방학을 맞이한 학생들이나 휴가를 얻은 사회인의 유입과 복귀를 유도하는 시기였다.
PlayerZ는 갓겜답게 적기를 놓치지 않고 대목을 맞이하여 대규모 업데이트를 준비하고 있다.
업데이트 요소 중 하나가 바로 PVP의 팀전 모드 강화였다.
“사관학교 생도회에서도 같은 내용의 건의를 다수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종목 확정은 시간을 좀 더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직 업데이트되지도 않았는데, 각 학교의 유저들이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플마고에서는 저 요소가 엄청난 인기를 끈 덕에 프로 리그까지 만들어지므로 나름 선견지명이 있는 건의였다.
‘스포츠 교류전 최초로 두 종목에서 대표로 뽑히는 놈이 나오겠네.’
농구부의 에이스 슈터이자 작년 교류전 MVP.
PlayerZ의 CBT 랭커 방패병.
두 타이틀을 가진 유상훈이 어느 것 하나 포기할 리가 없었다.
유상훈은 의욕에 차 있었다.
나 말고도 유상훈에게 시선을 던지는 이가 많은 걸 보니, 나만 저런 생각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어째 내쪽으로도 시선이 모였다.
“의신이는 상훈이랑 플젯하지? 그럼 체스랑 플젯 둘 다 대표로 나갈 수도 있겠다.”
김유리가 작게 소곤거렸다.
나도 괜히 주목을 받은 건 유상훈 때문인 듯했다.
채널 구독자들의 요청으로 유상훈 단독 플레이 영상 외에도 나, 장남욱, 도시후와 같이 한 엉망진창인 레이드 영상도 올라갔는데, 그 덕에 나도 유명세를 탔다.
대부분의 댓글은 뉴비들의 플레이를 1열에서 직관하는 고인물 방패병의 리액션을 두고 즐거워하는 내용이었으나 나를 언급하는 내용도 섞여 있었다.
몇몇 댓글은 다음과 같았다.
[공략 보면 10분 컷인 걸 1시간 깎아서 깨 버리네ㅎ 방패병이랑 음유시인 없으면 진작에 전멸각]
[저기 뉴비 스펙으로는 버티기가 안 되는 레이드임;; 너네 파티에 저 수준의 탱이랑 서폿 없으면 흉내 ㄴㄴㄴㄴ]
[ㄹㅇ딜러들은 허접한데 서폿이랑 탱이 잘했다ㅋㅋㅋ]
[저 서폿 플젯은 뉴비인 척하는 썩은물이거나 딴 겜 화석이다에 손모가지 건다]
[음유시인도 CBT 때 랭커였나요?]
저런 말이 섞여 있긴 하지만, 내가 저런 소리를 들을 만큼 잘하고 재능이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플마고에서 세 자릿수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육성, 조작해 본 경험이 있어 직관적인 구성의 PlayerZ에 금방 적응했을 뿐이었다.
또, 딜러인 장남욱과 도시후가 못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내가 돋보인 것 같다.
장남욱은 진짜로 게임을 못하긴 했지만, 도시후는 본인이 즐거운 게임을 하느라 저따위의 플레이 기록이 남은 거였다.
그런 상황이라 PlayerZ의 대표 후보로 꼽힐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나 김유리가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유상훈하고 비슷한 처지가 될 수도 있겠다.’
나도 출전 종목이 두 개가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