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19)
111. 합숙 (8)
2/4분기 학생 대표 회의를 마친 후, 복도에서 대화하고 있는 후배들을 발견했다.
대화를 나눈다고는 해도 말을 하고 있는 건 차석원과 은호 둘이었다.
1학년 0반 반장으로서 참석한 은서호와 학생회 소속 임원인 은이호는 둘의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둘 사이의 대화에 끼고 싶은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듣기만 하는 중인 것 같았다.
“여름방학에 기숙사에 남는다고 들었어. 방학 동안 해 볼 실험이 몇 개 있는데, 같이 할래? 은하가 도와주면 금방 끝날 거야.”
“시간이 맞으면 도울게.”
“고마워. 실험복 하나 더 준비해 둘게.”
차석원이 실험 운운하는 건 둘째치고, 후배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니 나도 절로 훈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은서호와 은이호는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다.
“둘이 더 친해진 것 같아.”
“맞아. 은하는 같은 0반인 우리보다 쟤랑 더 친한 거 같아.”
“은하가 기숙사 옆방이다 보니 대화할 기회가 많았어. 지익회 독서실에서 자주 마주치기도 했고.”
차석원은 악의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답했으나 은서호와 은이호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은호와 친해지고 싶었던 걸까?
두 후예는 차석원의 대답 중 ‘기숙사’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는지 중얼거렸다.
“기숙사…….”
“2학기에도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기숙사에 들어가면 은호와 더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같은 기숙사 소속이 되든, 같은 방에서 지내든 은호의 태도는 변함이 없을 텐데 그걸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은호가 온화하게 웃으며 답했다.
“2학기에도 들어올 수 있을 거야. 0반 선배 중에 2학기에 입소한 분이 있다고 들었어. 가족과 상담해 봐.”
“응! 그럴게!”
“오늘 집에 가서 말씀드려 봐야지!”
언뜻 듣기에 은호의 말은 두 사람이 기숙사에 들어올 수 있도록 조언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둘의 가족이라면 호랑이들이다.
은호의 후예는 이미 웅족 사이에 존재가 알려져 노려지고 있는 데다가 흑막이 인질로 삼기 딱 좋은 대상이다.
‘은광고 기숙사가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호랑이 저택만은 못하지. 안전 때문에 기숙사에 들어가는 건 반대할 거야.’
게다가 겨우 그 존재를 알게 된 후예와 떨어져서 생활하고 싶진 않을 거다.
황지호가 안 된다고 딱 잘라서 말할 게 눈에 선했다.
은호는 자연스럽게 둘이 허튼짓을 할 가능성을 없애면서도 이 자리에서 달래는 데 성공했다.
“의신이 형! 유리 누나!”
“안녕, 얘들아. 회의에 참가하느라 고생했어.”
뒤늦게 우리를 발견한 은서호와 은이호가 우리 쪽으로 왔다.
둘을 시작으로 주변에 있던 후배들도 하나둘씩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후배와 다정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김유리를 보니 얼마나 인망이 깊은지 잘 느껴져 내가 다 뿌듯했다.
은서호와 은이호는 기숙사 입소 생각에 들뜬 건지 적극적으로 말을 걸었다.
“기숙사에 들어가면, 의신이 오빠가 집에 놀러 올 때 저희가 없을 수도 있을 거예요.”
“맞아요, 그러니까 놀러 갈 때에는 저희랑 같이 가야 해요! 모처럼 오셨는데 못 보는 건 싫어요.”
은서호와 은이호는 참 귀엽고 고마운 말을 해 줬지만, 그 말엔 큰 맹점이 있었다.
그 말의 맹점을 알아챈 차석원이 지적했다.
“기숙사생이 되면 조의신 선배님이랑 더 자주 만날 수 있지 않아? 은하는 거의 매일 같이 아침 먹잖아.”
둘은 순간 내가 기숙사생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는 듯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둘은 삐걱거리며 나와 은호를 돌아보았다.
“의신이 형이랑 은하가…….”
“매일 같이 아침…….”
“부럽다…….”
은호는 여전히 온화하게 웃고 있었지만, 차석원을 조금 길게 응시했다.
차석원이 불필요한 이야기를 꺼내 은서호와 은이호를 자극한 게 조금 마음에 걸렸나 보다.
기숙사 화제가 나온 탓인지 현재 통학생인 후배들도 여기저기에서 기숙사 입소를 주제로 대화했다.
기숙사생이 늘어나면 필연적으로 지익회 일이 늘어날 텐데, 지익회장이 현재 그 꼴이라 괜찮을지 모르겠다.
“아하하, 의신이가 후배 사이에서 인기가 좋네…… 어? 얘들아!”
김유리와 함께 학생회관을 나섰을 때, 우리 반 아이들과 마주쳤다.
교외 활동을 하는 아이들을 제외하면 전원 그 자리에 있었다.
날이 덥고 슬슬 배고플 시간이었기에 다들 손에 슈가콘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아이들이 곧바로 이쪽으로 왔다.
“아이스크림 세 개는 더 살걸 그랬다. 쟤들 주고 나도 하나 더 먹게.”
“저는 종류별로 하나씩 더 사고 싶었습니다만.”
“어차피 그만큼 사 봤자 레나는 다 못 먹어요.”
“그럼 바로 매점으로 갈까? 아, 혹시 지금 어디 가는 중이었어?
김유리의 질문에 구슬비와 옹길동이 답했다.
“쟤가 학교 구경 하고 싶다고 했거든. 그래서 다 같이 왔어.”
“임시라고는 하나 당분간 은광고에 머무를 예정이니, 이 학교의 명소를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인선오의 안내를 겸해 다 같이 놀러 가는 기분을 내느라 여기까지 걸어왔나 보다.
아이들 가운데에 서 있던 인선오는 어느덧 가장 앞에 서 있었다.
인선오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대표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을 지켜보았다.
그냥 무심하게 시선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능은 쓰고 있지 않지만, 주의해서 관찰하고 있어.’
어느 정도 관찰한 후에야 인선오가 시선을 뗐다.
그사이에 반 아이들은 먹을 걸 두고 토론하고 있었다.
매점에 가 아이스크림을 더 사 먹을지, 카페로 가 음료를 사 마실지, 아니면 저녁을 먹으러 갈지 등등 여러 의견이 나왔다.
결정권은 반에 막 등장한 신참인 인선오에게 주어졌다.
인선오가 제안했다.
“기왕 만난 거 다 같이 저녁 먹으러 갈래? 식사하고 디저트도 먹으러 가자.”
“전 좋아요. 의신이랑 유리도 같이 가요!”
“그럼 대석이도 부를까? 지금 협회에 있긴 한데 저녁은 집에서 먹을 거라고 했거든.”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반 아이들과 다 같이 식사하게 되었다.
우리 반에 재시험자가 나오는 바람에 시험이 끝난 뒤풀이를 제대로 못 했는데, 오늘 식사 자리가 이를 대체할 것 같다.
예약하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괜찮은 식당을 머릿속에서 리스트업하고 있을 때, 인선오와 권레나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중앙 구역은 다 돌아봤는데, 다음은 어디로 갈까?”
“내일 1학년 구역에 가고 싶어. 이제 거기에서 수업 들을 일이 없으니까 한 번은 구경해 보려고.”
안내는 아이들이 맡고 있지만, 행선지는 인선오가 정하고 있었나 보다.
그렇다면 2/4분기 학생 대표 회의가 끝날 무렵, 중앙 구역에 반 아이들이 온 건 인선오가 선택한 결과다.
우리와 마주친 건 인선오가 의도한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 * *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합숙 시작까지 일주일 앞둔 시점, 독고미로가 메시지를 보냈다.
[독고미로] 야, 그냥 기분 탓일 수도 있는데 새로 온 등교생이 너한테 주목하는 것 같아.
[독고미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독고미로] 어쨌든 우호적인 느낌은 아니야.
인선오가 나를 주시하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마 황지호는 알아챘겠지만, 반 아이들 대부분은 아직 위화감을 감지하지 못했다.
‘독고미로는 눈치가 빠르구나.’
독고미로는 어렸을 때부터 시선과 악의에 노출되었으나 민그린이나 송대석처럼 방에 틀어박히는 길을 택하지는 않았다.
은광고에 오지 않았을 뿐, 데뷔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부딪치고 준비하고 무대에 올랐다.
그러니 독고미로는 주변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다른 애들보다 능숙했다.
[독고미로] 합숙 일정에도 관심을 보이기에 학교 홈페이지에 공개된 부분만 알려 줬어.
[독고미로] 걔가 나쁜 애는 아닌 거 같은데, 네가 수상하니까 걱정이야.
왜 수상하다고 걱정하는지 모르겠다.
걱정인지 악담인지 알 수 없는 말로 메시지는 끝났으나 일단 신경 써 줘서 고맙다는 말은 해 뒀다.
그 이후로도 우리 반 아이들은 자주 만나서 놀았다.
개인 일정이 있는 아이들이 있어 전원이 모이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출석률은 상당히 높았다.
민그린이 추천한 플레이어 출신의 유리공예 장인의 개인전, 설치미술과 공공미술이 테마인 미술전.
목우람이 웃돈을 주고 참가비를 낼 뻔한 도예 체험.
권레나가 영원의 호수 팀에게 선물 받은 티켓들로 참석한 유명 관현악단의 정기 연주회.
관종들이 강력히 원했던 테마파크의 공룡 퍼레이드 등등.
우리 반은 하루에 일정을 두 개씩 소화하기도 하면서 온 힘을 다해 놀았다.
‘교류전 합숙하는 애들과도 같이 놀고 싶어서 이렇게 일정을 짠 거겠지.’
몇몇 일정은 날짜가 맞지 않은 게 아쉬울 정도였다.
한편, 합숙을 시작하기 바로 전날에는 야구 관람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변경되었다.
그 변경의 이유는 나였다.
“어, 왔냐.”
유상훈의 집.
척 봐도 들뜬 표정을 한 유상훈이 우리를 맞이했다.
오늘 초대받은 건 셋이었다.
나, 장남욱 그리고 도시후.
작년까지만 해도 도시후가 집에 온다 하면 대놓고 싫은 티를 냈을 유상훈이었지만, PlayerZ 덕에 친해졌기에 환영받았다.
“상훈아, 안녕. 냉방을 조금 과하게 튼 것 같은데 설정 온도를 조금 올리는 게 좋지 않을까?”
“VR기기 열 받아서 좀 낮춰야 돼. 추우면 옷 줄게.”
“추워서 그런 게 아니야. 바깥과 안의 온도가 너무 차이가 나면 몸에 안 좋잖아.”
“밖에 안 나가면 되지.”
장남욱의 잔소리를 건성으로 듣던 유상훈이 방 안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방문 선물로 준비한 것들은 전부 식량과 에너지 드링크 등으로, 오늘 일정에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유상훈의 방에 들어선 후 도시후가 물었다.
“상희 누나는?”
“…….”
“아, 원우 형이랑 오늘 데이트한다고 했…… 악!”
퍽!
도시후가 쫓겨나기 전에 장남욱이 보디 블로우를 날려 저지했다.
장신의 장남욱이 순식간에 몸을 낮추어 깨끗하게 주먹을 날리는 모습이 상당히 익숙해 보이는 걸 보니, 자주 해 본 듯했다.
바닥에 엎어진 도시후를 상대로 장남욱이 ‘상훈이 앞에서는 상희 누나랑 원우 형에 관해 얘기하지 않기로 했잖아’라며 설교를 시작했다.
유상훈과 나는 통증으로 몸을 떠는 도시후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눈에 띄게 기분이 나빠진 유상훈의 기분을 바꾸기 위해 말을 걸었다.
“세팅은 끝났어?”
“거의.”
유상훈이 가리킨 곳을 보니 거의 완벽하게 방송 세팅이 끝나 있었다.
귀찮음을 견디지 못하는 유상훈이 혼자서 저 정도로 준비했다니, 오늘 일정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짐작이 갔다.
한편, 맞은 충격이 가라앉은 후에도 바닥에 쓰러진 자세로 뒹굴거리며 디바이스를 보던 도시후가 탄성을 뱉었다.
“와, 방송 보려고 대기 중인 사람이 만 명이 넘어!”
도시후가 전개한 홀로그램에 방송 알림 설정을 한 사람들의 숫자가 보였다.
정말 그 말대로 다섯 자리가 넘어가 있었다.
오늘은 방패병과 그 친구들의 첫 라이브 스트리밍이 예정되어 있었다.
주제는 끝장을 볼 때까지 게임을 끄지 않는 것.
켠 김에 왕까지, 속칭 ‘켠왕’ 콘텐츠였다.